시끄러운 도서관 [산을 오르는 아이들]

12 작은학교 도서관

ⓒ 2024.윤경 All rights reserved.

옆 교실에서 노래 연습하는 아이들 목소리가 도서관까지 들려온다. 곧 다가올 가을 학예회 준비가 한창인가 보다. 어쩌다 보니 아이의 작은학교 도서관에서 사서 봉사를 하게 되었다. 1학기를 하고 2학기에는 좀 쉴까 했는데, 그 사이에 좀 친해진 아이들 얼굴이 하나 둘 떠올라서 2학기도 이어서 하기로 했다. 시골의 작은 도서관이지만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보면 흐뭇한 마음이 든다. 실은 그것도 잠시다. 오늘 자기가 뭘 했는지 이야기해 주려고 내 책상 주위로 아이들이 몰려온다. 재잘재잘, 재잘재잘! 아니,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저 아이들은 또 어쩐담?

일주일 중에 내가 담당하는 날은 가장 시끄러운 도서관이 되고 만다. 의도한 건 결코 아니지만 여기서 몸과 마음이 좀 풀려서 자유롭게 있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간다. 물론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된다는 건 아이들도 다 알고 있다. 나랑 있을 땐, 그게 좀 잘 안될 뿐이다. 모처럼 학교에 못 보던 얼굴이 등장했는데,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모양이다. 하여간, 언젠가 한번은 수업 시간에 5학년 담임 선생님과 아이들이 다 함께 도서관에 왔다. 그리고 잡담을 하는 아이들을 향해 “얘들아 조용히! 숨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라고 선생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순간 나도 얼음이 되어 그 반 아이처럼 입가에 웃음을 멈추고 책장을 조심히 넘겼다.

아이가 학교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도서관이 있어서라고 말했다. 1학년이 말하는 이유 치고는 의외였다. 물론 나는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또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도서관에 머무는 시간이 아주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이 공간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각자의 어린 시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면 좋겠다. 순간의 것들이 감각적으로 남아 추억이 된다. 도서관이 머금고 있는 오래된 책 냄새, 시간을 품고 있는 공기, 따뜻한 이야기가 숨 쉬는 편안한 감정을 기억해 낼 수 있는 장소였으면 좋겠다. 학교 안에서 저마다의 비밀의 장소가 되는 것도 좋겠다.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가면 나 홀로 있는 시간이 찾아온다. 책 정리를 해놓고 한숨 돌리는 시간이다. 어떨 땐 아이들과 나눴던 대화를 되새겨 보기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시간이 찾아온 거다. 가끔 아이들은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다 표현하지는 못하고 한 번씩 말을 툭 던지고 갈 때가 있다. 오늘은 2학년 남자아이가 와이시리즈 중에 <사춘기와 성> 책을 계속 찾았다. 너무 궁금하고 읽고 싶은데 보호자가 읽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학교 도서관 책 목록에도 이 책은 없었다. 터덜터덜 돌아가는 꼬마에게 괜히 미안해서 “있잖아, 궁금해하는 건 몹시 중요한 거야!” 하고 뒷통수에 대고 외쳤다. 나 역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전할 때가 있다.

ⓒ 2024.윤경 All rights reserved.
ⓒ 2024.윤경 All rights reserved.

명색이 도서관인데 책 빌리러 오는 아이들도 있지만, 손가락을 다친 걸 보여주는 아이도 찾아온다.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첫 생리를 알리는 아이도 있다. 내가 자신의 엄마와 같은 동남아 나라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아이도 있다. 엄마를 주말 밖에 만나지 못한다는 아이, 별명을 부르며 쫓아오는 아이도 있고, 그림책을 읽어달라는 아이도 있다. 지난주는 왜 안왔냐고 뾰로통하는 아이도 있다. 도서관 사서 봉사라고 해서 그저 책 반납 처리가 주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결국 책 이전에 사람이라고 본다.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 책이 있었을 뿐이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도서관으로 찾아온다. 아이들이 도서관에 더 자주 오길 바란다면,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대화가 더 우선일 것 같다.

아이들은 투명해서 자신의 처지와 마음을 닮은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받고 싶어 한다. 아쉽게도 내가 자기 엄마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내게 태국 관련 책을 찾아와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아이라는 존재와 가까이 대화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만화책이 아닌 책을 읽게 되기까지 아이들의 마음을 가만히 따라가 본다. 여기 이렇게 가장 시끄러운 도서관이 된다고 해도, 엉덩이 무거운 책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느긋하게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창밖으로 낙엽이 소리 없이 물들고 떨어진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기운찬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밟으면 바스락 소리가 나는 낙엽 밟기 놀이가 재밌는 건 아이들이 기막히게 잘 안다. 어느새 그 놀이도 시들해지면 자연스럽게 책장 속이 궁금해지는 날이 오기도 하겠지.

ⓒ 2024.윤경 All rights reserved.

*
글쓴이 : 윤경

생태적인 삶과 자연농 농부로 사는 게 꿈입니다.
마음을 어루만지며,
보다 나답게 사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여덟 살 여자아이, 여섯 살 남자아이,
남편과 시골에서 살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yoon.vertclaire@gmail.com

*
이 글은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 무료 구독

#지식토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