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연쇄 파산 전엔 항상 이런 일이 있었다
■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이전 트럼프 전 대통령 때 벌어진 일
미국 내 16위 은행, 실리콘밸리은행이 파산 절차를 밟고 있죠. 우리나라 산업은행 자산 규모보다 조금 적은 2,120억 달러 규모 은행입니다. 미 정부가 다른 은행들로 위험이 전이되는 걸 막기 위해 발빠르게 유동성 지원에 나섰지만 전 세계는 여전히 불안한 눈길로 미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은행(SVB)은 금융위기 때처럼 위험한 상품에 투자한 것도 아니고 국채 위주의 투자를 했습니다.
문제는 자산 대비 너무 많은 비중, 55%가량을 국채 같은 장기 증권에 투자했다는 겁니다. 채권은 금리가 상승하면 반대로 가격은 떨어져서 손해를 보기 때문에 만기 이전에 찾아가면 손실을 보죠. 그런데 때마침 주 고객인 벤처기업들이 자금이 부족해 예금 인출에 나섰고, SVB는 현금이 없어 손실을 보고서라도 국채를 팔아치우다가 소식이 공개되면서 뱅크런을 불렀습니다.
미 정부는 은행 시스템은 건전하다고 하고 있지만, 일시적 충격 시 피해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실리콘밸리은행처럼 아직 겉으로 손실이 난 것은 아니지만 미국 은행들의 장부상 손실, 미실현 손실액이 지난해 말 기준 6,200억 달러, 우리 돈 807조 원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처럼 예상 밖에 현금이 필요할 때 은행들은 가지고 있던 증권을 팔아야 해 미실현 손실은 그대로 실제 손실로 이어져 뱅크런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사태의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 현지 언론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시절 규제완화를 한 원인으로 보며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뿐만 아니라 이전 은행위기 때에도 위기 발생 전에는 규제완화가 있었습니다. 먼저 이번 사태만 볼까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드러난 위기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에선 2010년 이른바 '도드-프랭크법'이 제정됐습니다. 이 법은 경제위기 상황을 가정해 충분한 자본을 쌓고 있는지 평가하기 위해 은행들이 스트레스 테스트를 하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헤지펀드 등 고위험 자산 투자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전 대통령 당시인 2018년, 이 규제 대상을 자산기준 500억 달러 이상에서 2,500억 달러(320조 원) 이상으로 대폭 완화해줬던 겁니다. 실리콘밸리은행 자산 규모는 지난해 말 기준 2,120억 달러이기 때문에 규제완화만 없었더라면 이 은행이 위기에 대비해서 꾸준히 스트레스 테스트를 받아 채권투자 비중을 이렇게 늘리지 못했을 거라는 지적인 거죠.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3일 기자회견에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완화된 금융 규제를 언급하면서 의회와 금융 당국에 은행 관련 규제를 강화하도록 요청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 2008년 금융위기 이전 이걸 풀면서 위기 확대
그렇다면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어땠을까요? 당시 위기의 핵심은 부동산과 파생상품입니다. 이른바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 대출 확대로 부동산 거품이 커졌고, 이 과정에서 CDO·CDS 같은 복잡한 파생상품이 역할을 하면서 단기간에 부실을 키웠습니다.
조금 쉽게 말해 보겠습니다. 금융위기 전에는 소득이 적은 사람들은 집을 사기 어려웠지만, 2005~2007년에는 심지어 소득이 없어도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바로 CDO(부채담보부증권)라는 이름의 파생상품 때문이었습니다. 비빔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비빔밥 안에 있는 계란이나 맛있는 나물, 고추장은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받은 주택담보대출을 기초로 한 증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에 몇 개의 맛없는 나물을 섞어 보죠. 이 맛없는 나물은 소득 수준이 극히 떨어지거나 심지어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받은 주택담보대출 기반 증권이라고 보면 됩니다. 나물만 따로 떼 내면 위험한 대출담보증권이죠. 이걸 섞어놓으면 위험한 대출이 건전한 대출에 섞여서 잘 안 보이고 전체적으로 괜찮은 비빔밥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맛있어 보이는 비빔밥(CDO)이 불티나게 팔렸고 그 덕에 돈 없는 사람들도 쉽게 대출을 받아 주택을 구매하면서 버블이 급팽창하게 됐던 겁니다. 그러다 버블이 터지고 말았죠.
버블 붕괴 과정은 생략하고 관심은 "그 때 버블을 키운 단초가 뭐냐"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소득이 적어도 대출을 받도록 했는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같은 신용도 낮은 상품에 대한 대출기준이 완화됐기 때문입니다. 규제 완화였던 거죠.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의 당초 취지는 저소득층 금융지원 확대였지만 취지와 달리 부동산 투기로 활용됐습니다.
여기에 더해 2004년 미국 정부는 5대 대형 투자은행들이 자본에 대한 부채 비율을 12배로 제한하는 총부채 규제를 해제해줬습니다. 결국 규제 해제로 부채 비율은 30배까지 늘어났습니다. 투자은행들이 주택저당증권 등을 더 많이 매입해서 주택거품을 키우는 결과를 낳고 말았죠. 자본이득에 대한 세율 인하 조치 역시 당시 대출을 통한 투자 확대를 부추겼습니다.
물론 이 모든 버블의 한가운데에는 CDO 같은 파생상품이 어떻게 구성됐는지 제대로 알 수 없도록 이리저리 묶어 판매한 금융기법이 있었죠. 금융당국은 이 복잡한 상품 안에 부실이 얼마나 되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파생상품을 만든 사람도 어떤 부실 대출 증권이 들어가 있는지 본인도 모를 정도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습니다.
■ 1980년대 저축대부조합 파산 전에도 규제 풀어 준 정부
1980년대 저축대부조합 파산도 시작점은 지금 실리콘밸리은행 파산과 비슷합니다. 당시 저금리 덕에 단기예금을 받아 장기로 대출해 수익을 내오던 저축대부조합들이 시장금리가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높아진 예금금리를 적은 양의 대출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위험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연쇄 도산으로 이어지게 된 거죠.
이때도 연쇄 파산 이전에 규제 완화가 있었습니다. 1982년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예금금융기관법안에 서명했는데 이는 저축 관련 금융기관들이 더 많은 돈을 수신하고 더 위험한 자산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었습니다. 70년대 말부터 투자신탁회사의 MMF가 발달하면서 은행의 경쟁력이 떨어지자 이와 비슷한 수시입출금 예금 MMDA를 개설할 수 있도록 했고, 예금금리 상한을 단계적으로 철폐했습니다. 금리 인상에 따라 예금금리로 쭉쭉 올리게 된 거죠. 예금보험 한도도 기존 4만 달러에서 10만 달러로 늘려줬습니다.
주택 대출도 업무 영역을 더 터줘서 상업용 부동산, 기업, 농업 대출까지 확대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자산의 40%까지 상업용 부동산에 대출할 수 있도록 허가했는데, 이 당시 부동산업자가 저축대부조합을 매수해 자신의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받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결국 금리인상과 부동산 시장 급락이 맞물리면서 연쇄 부도가 일어났습니다. 1986~1991년 사이 700여 개 저축대부조합이 파산하고 미국 GDP의 6%에 달하는 3,000억 달러 이상이 사라졌습니다.
규제완화를 무턱대고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규제완화가 시장에 미칠 영향을 감안한다면 규제완화 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고 규제완화 뒤에 그에 따른 파장을 면밀히 모니터해야 합니다. 어쨌든 그동안 규제완화와 관계없이 연쇄 파산이 난 게 아니라 규제완화에 따른 허술한 구멍이 부실을 키웠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현재 미국 은행 파산 여파는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미국 당국은 은행시스템은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전 2008년 금융위기 때에도 같은 논리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죠.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 정부는 "동남아 외환위기 영향은 제한적이다", "미국 금융위기 영향은 제한적이다"라면서 시장을 달랬었죠. 하지만 정부의 말과 다르게 위기의 여파는 국내를 강타했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해외 여러 나라에서 금융위기를 겪었던 것처럼 규제완화에 따른 부실 발생 가능성을 철저히 체크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금융당국이 금융권 경쟁 유도를 위해 규제완화 카드를 만지고 있다는 뉴스도 전해지는데, 적어도 해야 할 시기와 말아야 할 시기는 분명히 구분해야 할 것입니다.
박찬형 기자 (parkch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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