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중] “이승만 반민특위 해체, 헌법·국회 짓밟은 윤석열 내란과 닮았다”

MBC라디오 2025. 8. 1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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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수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반민특위, 헌법에 근거한 조직...좌우익 모두 찬성
- 이승만, 친일파와 결탁...‘국론 분열’이라며 청산 반대
-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 감싸...반공에 ‘치안 기술자’ 필요
- 반민특위, 수사·기소·재판권까지 갖춘 전무후무한 기구
- 특별검찰·재판부에 사회 명망가 참여...‘시대의 양심’ 반영
- 친일 경찰의 국회의원 암살 음모...‘법기술’로 무죄
- 이승만, 외신에 ‘특경대 해산 명령’ 당당히 밝혀
- 반민특위 해체, 12.3 내란과 닮아...헌법·국회 유린, 증거인멸까지
- 독재정권 검찰의 뿌리, 반민특위 와해 과정서 시작
- 검찰 문화·역사 인식까지...친일 잔재 그대로 계승

■ 방송 : MBC 라디오 표준FM 95.9MHz <김종배의 시선집중>(07:05~08:30)
■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 대담 : 이강수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진행자 > 올해로 광복 80주년을 맞았는데요. 친일 청산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 구성과 해체 과정을 복기해 보면서 왜 우리는 친일 청산에 실패했는지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강수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함께하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 이강수 > 예, 반갑습니다.

◎ 진행자 > 연구위원님은 반민특위 관련 책도 여러 권 저술하신 바가 있는 그런 분인데요. 아마 많이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또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오늘 반민특위를 조명을 해보려고 합니다. 근거가 반민법 이게 근거가 되는 거죠? 법률적 근거가.

◎ 이강수 > 그렇습니다.

◎ 진행자 > 제정 과정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 이강수 > 일단 제정 과정 하기 전에 배경이 있을 것 같아요. 해방 직후에 모든 민족 세력들이 좌우 민족 세력들이 친일파 청산을 요구를 했습니다. 특히 임시정부 같은 경우에도 신한정의사라는 것을 만들어서 해방 직후에 조경한 선생이 친일파 청산을 위한 연구 조사를 하기도 했고요. 김승학 선생이 친일파 명부라는 것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미군정자문위원회라고 하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도 친일파 처벌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부일협력자를 10만~20만 명, 그리고 민족반역자를 1천 명, 전범을 200~300명 정도를 했으니까 당시가 2천만 명이 인구였으니까 현재 기준으로 치면 한 친일파를 40~50만 명 정도를 잡은 겁니다. 최근에 우리가 친일파 청산 논의에서 친일인명사전이나 조사위에서 기껏해야 1천여 명 정도 갖고 논란이 됐지 않습니까?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어마어마한 차이인 거죠. 이럴 정도로 거국적으로 좌우익을 막론하고 다 제기가 됐다가 그것이 제헌국회가 개원되면서부터 곧바로 반영이 됐습니다. 1948년 5월 30일 날 개원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곧바로 유진오가 헌법초안을 제출했는데 원래 거기에는 반민법 개정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가 내부에서 헌법초안 기초의원들끼리 논의를 하는 가운데 1945년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는 처벌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 그들을 위한 특별법을 만드는 것을 헌법조항에 집어넣어야 하지 않겠냐라는 논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100조를 만들다가 그것이 수정되면서 101조가 된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반민법은 그냥 일반법이 아니고 헌법에 기초해서 만든 법입니다.

◎ 진행자 > 특별법.

◎ 이강수 > 특별법이죠. 특별법인데 그것도 헌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이다. 그래서 반민법을 반대하는 것은 헌법을 반대하는 거하고 같다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 진행자 > 그렇게 되는 거군요.

◎ 이강수 > 예,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바로 1948년 9월 7일 날 국회에서 상정됐는데 사실 제헌국회는 단정 세력들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석자가 141명 중에서 반대가 6표밖에 안 될 정도로 절대 다수가 찬성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민족 세력만이 아니고 단정 세력마저도 모두 다 찬성했던 이런 법이었고 그것이 9월 22일 날 공포가 돼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반민법이 된 겁니다.

◎ 진행자 > 그 얘기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민당 세력이나 이들도 거의 대부분이 동의를 했다. 찬성을 했다.

◎ 이강수 > 그렇죠. 그건 자의든 타의든 당시 열화와 같은 국민적인 바람이 결국은 그걸 거역할 수가 없다 보니까 다 찬성을 하게 된 거라고 볼 수가 있는 겁니다.

◎ 진행자 >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되게 미온적이고 부정적이지 않았습니까?

◎ 이강수 > 맞습니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사실은 자신이 독립운동을 해외에서 했지 않습니까?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보니까 국내에 들어와서는 물적 기반이나 인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친일파들하고 결탁하게 됩니다. 그들하고 결탁이 돼서 친일파 청산을 방해하는 이런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는 건데, 이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승만 정권의 입장에서는 친일파 청산이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는 거, 혹은 정권의 붕괴를 시키는 이런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을 정도로 부정적으로 봐서 사실은 계속해서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1945년 10월 16일 귀국하자마자 기자회견을 합니다. 친일파 청산이 국내에서 논의가 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했더니 먼저 정부를 수립하는 게 우선이다. 친일파 청산은 정부 수립 이후에 한다. 기자의 그다음에 질문이 그러면 정부에 친일파들이 다 대거 들어가지 않겠냐, 그랬더니 누가 친일파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거죠.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냐,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는 친일파 청산은 국론 분열이다. 민심 혼란이다. 그리고 친일파의 행정 경험을 활용을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또 반대를 하게 됩니다.

◎ 진행자 > 위원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그때 당시 한민당의 주축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친일성향의 지주들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정치적 조직 기반에 반하는 입장을 보이기 힘들었다까지는 그렇다고 치는데 예를 들어서 노덕술 같은 아주 악질적인 일제에 부역했던 경찰들 있잖아요. 변호하지 않았습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왜 그렇게까지 했던 걸까요?

◎ 이강수 > 이승만 입장에서는 치안기술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흔히 국무회의에도 많이 나오는 단어가 치안기술자라고 표현이 나오는데요. 당시 상황에서는 반공이라고 하는 부분이 너무나 컸던 것 같아요.

◎ 진행자 > 반공이.

◎ 이강수 > 네, 이승만을 이승만으로서 정권을 잡는 하나의 키워드로서 가장 컸던 것이 반공이란 키워드였던 것 같고요.

◎ 진행자 > 이른바 빨갱이를 잡아내려면 노덕술 같은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 이강수 > 맞습니다. 그래서 노덕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데 얘를 잡으려고 하니까 안 되니까 결국은 노덕술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석방 시키려고 다양한 방법을 하는 겁니다.

◎ 진행자 > 그게 나중에 반민특위 습격으로까지 연결이 되는 거잖아요.

◎ 이강수 > 예, 맞습니다.

◎ 진행자 > 그건 좀 이따 여쭤보고 그렇게 해서 반민특위가 구성이 돼서 발족하는데 전무후무한 게 수사권 기소권 재판권을 다 갖고 출범을 했던 그런 기구 아니겠습니까?

◎ 이강수 > 예, 맞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특위가 많이 만들어져 있는데 국회 특위라는 건 기껏해야 조사만 하는 이런 거지 않습니까?

◎ 진행자 > 조사특위죠.

◎ 이강수 > 조사특위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 상황에서는 특별검찰부도 있었고 특별재판부도 있었고 심지어 특경대까지 있었어요.

◎ 진행자 > 특경이 특별경찰대.

◎ 이강수 > 특별경찰대를 특경대라고 하는 건데요. 당시에는 검찰이나 판·검사들 경찰들이 친일파들이 너무 많다라고 봤고 결국은 믿을 수가 없다라고 해서 국회 내에서 이걸 가지고 엄청 논의를 합니다.

◎ 진행자 > 경찰의 물리력에 의존할 수 없다.

◎ 이강수 > 그렇죠. 검찰의 물리력도 의존할 수 없고 조사해서 만약에 검찰에 넘긴다고 한들 일반검찰에서는 기소하지 않을 거고 일반재판부로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처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별도의 특별검찰과 특별재판부를 만들어야 한다, 특별경찰도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을 해서 그 조직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요. 우리가 현재 특별검찰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다 현행법에는 변호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만을 하게 됩니다.

◎ 진행자 > 그랬어요?

◎ 이강수 > 현재 그렇게 운영됩니다. 특위가 만들어지면. 당시에는 사회계 인사를 꼭 집어넣습니다.

◎ 진행자 > 사회계?

◎ 이강수 > 사회 지도층 인사나 사회 명망 있는 사람이나 혹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을 일정 정도를 반민특위에 다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특별검사나 특별재판부에는 법 기술자들이 아니고 일반 사회계 사람들도 일정한 비율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 진행자 > 쉽게 말하면 시대의 양심.

◎ 이강수 > 그렇죠. 시대의 양심.

◎ 진행자 > 표상할 수 있는 이런 인물들이 꼭 있다.

◎ 이강수 > 맞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기 때문에 현재에도 내가 보기에는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입니다.

◎ 진행자 > 영화 ‘암살’을 보면 배우 이정재 씨가 분했던 염석진인가요. 염석진이 끌려가서 재판받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게 반민특위 특별재판부 그거잖아요. 그때.

◎ 이강수 > 맞아요.

◎ 진행자 > 당시 온갖 방해 공작이 계속 벌어지는데, 여기에 몇 가지 특성이 있다고 위원님이 쓰신 책을 보니까 나오더라고요. 그 가운데 하나가 그렇게 법 기술, 법 논리를 앞세웠다고 하는데 이건 무슨 얘기입니까?

◎ 이강수 > 법 기술이 여러 개가 있는데 첫 번째 특위 요원 암살 음모 사건을 보게 되면 반민특위 위원들을

◎ 진행자 > 반민특위 위원 중에 국회의원이 포함이 되어 있었죠?

◎ 이강수 > 맞습니다. 당시 노덕술을 필두로 해서 친일 경찰들이 친일파 청산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이런 사람들을 그대로 놔두다가는 남한 사회가 소위 그들 생각으로는 공산화가 될 것이다라고 보는 거죠. 왜 그러냐면 친일파들이 자기네들이 없어지면 결국 이 사회는 공산집단이 된다라고 본인들은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실제 노덕술이 테러리스트들한테 말할 때도 꼭 그런 말들이 나와요. 이대로 놔두다가는 이 사회가 엉망이 된다. 내지는 친일파 청산이 되다가는 남로당 세상이 된다.

◎ 진행자 > 반공논리 이념을 앞세운 거고.

◎ 이강수 > 그들의 보고서나 그들의 멘트에서는 그런 것들이 자주 나오게 되는데 노덕술이나 이런 사람들이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합니다.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서, 김웅진, 노일환 등을 3명을 납치해서 38선 근처로 가서 성명서를 세 부를 쓰게 합니다. 성명서는 나는 이남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는 것보다 이북에서 살기를 원한다라는 그런 성명서를 쓰게끔 해서 이걸 38선 가는 데에서 애국청년이 죽인 것처럼 위장하려는 사건이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김웅진, 노일환 의원만이 아니고 그때 참여됐던 게 김병로 대법원장, 신익희 국회의장 그다음에 이청천 장군 등등 여러 사람들이 총 국회의원들이 13명이 포함돼 있고 기타 5명 그래서 총 18명이 암살에 대거 포함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백민태가 사건이 너무 커지니까 국회의원도 대법원장도 다 죽이니까 무서웠죠. 겁도나고. 그러다 보니까 결국은 자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알려진 건데

◎ 진행자 > 실토를 했네요.

◎ 이강수 > 실토를 해버린 거죠. 근데 문제는 이렇게 알려지면서 노덕술하고 그 일당들이 전부 체포가 됐는데 재판하는 과정에서 보니까 백민태가 범죄 행위를 하지 않았다. 범죄 행위를 하지 않았으니까 교사죄는 성립되지 않는다라고 서울고등법원에서 판결을 하면서 무죄를 선포를 하는 겁니다. 이게 법 기술이 적용되는 하나의 부분입니다.

◎ 진행자 > 그리고 아까 얘기했듯이 수사권 기소권 재판권 다 갖고 있으니까 삼권분립 원칙에 위배되는 거 아니냐 이런 식으로도 딴지 걸고 막 이랬다면서요.

◎ 이강수 > 맞습니다. 그것도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아까 말했던그 세 가지가 그러니까 국회, 행정부, 검찰이나 경찰권은 행정부에 있었던 거고 특별재판부까지 전부 다 갖고 있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라고 했는데 사실은 알고 보면 헌법에 의해서 혹은 특별법에 의해서 별도로 만든 법이거든요. 그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만든 거고,

◎ 진행자 > 아까 말씀하신 헌법에 기초해서 만든 특별법이라고.

◎ 이강수 > 당시의 상황이 경찰이나 검찰이나 재판부가 친일파들에 의해서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만든 거예요. 그리고 대법원장 자체가 이 건에 대해서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라고 아예 판정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부분을 강조하는 거죠.

◎ 진행자 > 법 기술은 그때부터 있었네요.

◎ 이강수 > 그때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 진행자 > 그렇군요. 그래서 법 기술 부리고 조금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반공 논리를 우선해서 앞세우면서 물타기라고 해야 될까요? 희석시켜버리는 부분들이 나타나고 그러다가 마지막으로는 결국은 물리력을 동원하는 거잖아요. 이게 반민특위 습격 사건까지 가는 거 아닙니까?

◎ 이강수 > 맞습니다.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사실은 시작은 국회 프락치 사건하고 연결이 되기는 하지만, 극우시민단체들이 반공대회를 개최합니다. 여기도 비슷하게 최근에 나오는 그런 것처럼 극우 반공대회가 여기저기서 계속 개최됐는데 그거의 배후로 최운하라는 당시 서울시 사찰과장을 체포하게 됩니다. 반공대회 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얘네들이 반민특위까지 와서 이 안에는 빨갱이가 있다 여기에는 국회 프락치들이 있다, 그리고 습격을 하니까 1차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배후에는 누가 있느냐라고 해서 봤더니 최운하가 있더라라고 해서 최운하를 6월 4일 날 체포를 합니다.

◎ 진행자 > 반민특위에서 체포한 거죠?

◎ 이강수 > 네, 반민특위에서 체포한 거죠. 그러다 보니까 6월 6일 날 최운하가 당시 국회 프락치 사건도 조사하고 있었던 장본인이었고 노덕술 부하이기도 하지만 그랬던 상태였기 때문에 6월 6일 날 서울시 중부서장 윤기병이 수십 명의 사법경찰을 데리고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습격만 한 게 아니고 관계자의 자택도 들어가고 심지어 자료도 압수를 합니다. 일정한 목적이 특경대를 목적으로 했다라고 하면 자료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거든요. 근데 그때 투서라든지 진정서라든지 반민피해자 조사서라든지 이런 여러 자료들을 다 압수를 해서 현재 그 자료가 없어졌어요. 실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 진행자 > 아, 자료만 있었어도.

◎ 이강수 > 그렇죠.

◎ 진행자 > 친일 부역자 조사하는 데 훨씬 수월했을 텐데, 나중에라도.

◎ 이강수 > 그렇죠. 그들 죄명도 나오고 그들이 어떻게 변론을 하고 있고 어떤 변명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기껏해야 한 몇 십 명밖에 안 됩니다.

◎ 진행자 > 그때 자료를 탈취해서 어디다 몰래 보관한 것도 아니고 다 폐기했다고 봐야 되는 건가요? 지금 추정으로는.

◎ 이강수 > 그렇게밖에 볼 수가 없어요.

◎ 진행자 > 발견이 안 되고 있으니까.

◎ 이강수 > 발견이 안 됐어요. 그중에 일부가 남아서 60여 명 정도 물량만 남아 있어서 그것이 자료집으로 일부 남아 있지만 나머지는 전부 다 없는 거죠. 어쨌든 반민특위 습격 사건 때 이승만 대통령은 AP통신과의 기자회견에서 내가 특경대 해산을 명령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 진행자 > 아예 대놓고.

◎ 이강수 > 대놓고. 윤석열이 방송에서 나와서 이거는 계엄 선포한다라고 하는 것처럼 이 사람도 AP통신에 당당하게, 불법적인 건데.

◎ 진행자 >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1949년 6월 6일에 있었고 이게 반민특위 해체의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는 거고.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이 6월 26일에 있었던 거잖아요. 이때 말 그대로 대대적인 반격이라고 해야 되는 겁니까? 이게 이때 다 이루어지고 사실상 여기서 어찌 본다면 모든 것들이 갈렸다 이렇게 봐야 되겠네요.

◎ 이강수 > 그렇습니다. 첫 번째는 국회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고 두 번째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6월 23일서부터 본격화되고 있었고 그다음에 6월 26일 날 백범 김구가 암살 당하는 건데 그전까지만 해도 언론을 통해서 삼권분립이다 뭐다 한다든지 아니면 시위를 한다든지 다른 어떤 방해공작을 했지만 이거 갖고는 더 이상 될 수가 없다라고 판단을 해서 결국은 이승만 입장에서는 대대적인 공격이 필요하다라고 구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련의 사건으로 비슷하게 반민특위 습격 사건, 국회 프락치 사건, 백범 김구 암살이라고 하는 이게 발생돼서 우리는 그걸 이승만의 6월 총공세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 진행자 > 6월 총공세. 잠깐 말씀해 주셨는데 반민특위가 발족이 되니까 온갖 방해 공작이 법 기술도 동원하고 이른바 반공 논리도 동원을 하고 그것도 안 되니까 결국 무력까지 써서 해체해버리는 일련의 과정이 가는 게 12.3 내란까지 도달하는 과정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거든요. 위원님도 그렇게 보세요?

◎ 이강수 > 저도 그렇게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거든요. 내용적으로 보면 반민특위 해체과정을 보면 반민특위 자체가 헌법을 기초한 거니까 헌법이나 국회를 유린한 것이라는 것은 명확한 거고요.

◎ 진행자 > 국회 프락치 사건도 나오고.

◎ 이강수 > 네, 국회 프락치 사건도 그렇고. 반민특위 활동 자체가 국회 활동이에요. 반민특위 활동을 와해시키려고 했다는 것은 국회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했다라고 하는 자체인 거고. 그리고 국회 프락치 사건도 말씀하신 대로 있는 거고. 아까 말했던 국회의원 제거 사건, 1차가 반민특위 의원 사건이고 2차가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국회의원 제거 사건도 일으키는 거죠. 이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비슷하고 이 외에도 사실은 관변단체를 동원하는 모습이나 혹은 국무위원들을 통해서 사건을 조작하려는 모습이나 법정에서 증거 인멸하려는 그런 모습 등등이 사실은 너무나 비슷하다고 볼 수가 있을 것 같아요.

◎ 진행자 > 우리가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친일청산이 미완으로 되면서 결국은 그 이후에 한국 현대사를 굴절시켜다, 이런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어떻게 영향을 미쳤다고 보세요?

◎ 이강수 > 결국 친일파들이 사회 각 분야로 다 진출하지 않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를 다 진출하게 되는데, 결국은 그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그와 같은 관행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검찰의 모습 하나 사례를 들면 역대 검찰총장을 쭉 살펴봤을 때 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군정기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역대 검찰총장 상당수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들이에요. 미군 정기 초대 검사장이었던 김찬영은 정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서 범죄 사실이 확인되면 엄중 처벌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때 민복기는 민병석의 아들 이완용이 사촌이었던 거고. 그다음에 박정희 대통령 때 검사 같은 경우에도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조작하고 나중에 서울시장 내무부 장관을 했던 장본인인데 역시 친일 검찰로 표현 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현재 운영하는 조직 운영 방식이 잘 아시고 있는 것처럼 검사동일체 원칙이지 않습니까? 근데 이것이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거거든요. 상명하복식 검사조직을 운영하는 건데, 역시 운영 방식에서도 비슷하고 심지어 역사 인식에서도 비슷해요. 윤석열이 얼마 전에 그랬지 않습니까? 미래를 위해 과거를 덮자라고 하고 있고, 그 당의 한 의원은 친일파 청산은 민족을 분열시킨다라고 했어요. 근데 여기에서 윤석열이 말했던 그 말은 1949년 1월 8일 날 박흥식을 체포할 때 이승만이 했던 말이고, 나경원 의원이 말했던 것은 1949년 반민법 반대를 했던 이종형이나 반민법 반대 국민대회에서 나왔던 논리와 동일한 내용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적 조직적 역사적 인식이 동일하게 작용된다면 그 뿌리가 현재까지 남아서 그대로 작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부분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 진행자 > 아까 노덕술을 잠깐 여쭤봤는데 1980년대 전두환 독재 정권 시절에 유명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 사실은 이근안의 계보를 따라가면 원조가 노덕술이다 이런 얘기도 제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결국은 고문기술도 일제 때 했던 고문기술을 그대로 계승해 온 것이다라는 이런 얘기도 있던데요. 어제 새로 나온 뉴스가 하나 있더라고요. 아까 그 국회 프락치 사건을 이야기를 했는데 영화 1987을 보면 김윤식 씨가 분했던 박처원 대공수사처장 전두환 정권 때, 이 박처원 대공수사처장이 국회 프락치 사건 수사에 합류했던 사실이 이번에 새롭게 밝혀졌다고 뉴스가 나왔어요. 결국은 그 이후에 현대사회에서 독재 정권을 유지했던 이른바 경찰 치안본부 시절 이 토대도 거슬러 올라가 보다 보면 결국 반민특위 습격이나 여기서부터 비롯됐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 이강수 > 네. 맞습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은 그 당시에 사건 일정대로 쭉 가보면 지금 하고 있는 공안 사건을 만들어 내는 과정하고 너무나 비슷한데요. 예를 들어서 처음에는 국회 프락치라고 하는 근거가 있어야 할 텐데 근거를 맨 처음에 잡지는 못해요. 5월 18일 날 첫 번째 의원들을 체포할 때 당시만 하더라도 이 사람들이 남로당을 만났다가 이유예요. 만나서 뭐했냐 이게 없잖아요. 지령을 받았다가 아니고 만났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는 그러고 나서 일단 체포하고 수사를 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고 나서 여자 스파이를 체포해서 이 사람이 국회 소장파 의원들한테 남로당 지령을 줬다라고 하는데 그 지령의 내용이 외국군 철수라는 내용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외국군 철수라는 내용도 백범 김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주장했던 내용들이었단 말이죠. 별것도 아닌데 그걸 가지고 남로당 지령문에 나왔다는 내용으로 연결을 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 이 사람이 나한테 지렁을 줬다는데 확인을 해보려고 할 거 아닙니까? 만나자라고 몇 번이나 했는데 검찰이나 경찰들은 제공을 안 해요. 서로 만나게끔 안 해주는 거예요. 3자 대면도 안 시켜주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재판이 있기 바로 직전인 1949년 12월 달 총선을 시켜버립니다. 증거를 없애버린 거죠. 유일한 증거였는데 그러고 나서 그냥 재판 판결이 나는 그런 모습을 취하게 되는 겁니다. 재판 과정에서도 남로당 노일환 의원한테 그런 질문을 합니다만 너가 남로당의 입당했다라고 하지 않았냐라고 한 것에 대해서 노일환 의원은 아니다 그건 고문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했다라고 하는데 판사는 그거에 대해서 묵살하고 신경을 안 씁니다. 이런 과정들을 거치는 거 보면 시작은 경찰이고 검찰이나 판사들도 일정 정도 같이 공조를 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진행자 > 반민특위가 해체가 되면서 친일청산이 미완으로 그치다 보니까 살아남았던 세력이 이후에 이른바 반민주 독재 세력의 주축이 되는 것이고 여기서 살아남았던 일제에 부역했던 경찰이나 검사 이런 사람들이 그걸 뒷받침하는 공안 사건의 주역들이 되는 것이고 이런 계보를 형성해 왔던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워낙 제한된 시간에 짚으려고 하다 보니까 너무 한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위원님.

◎ 이강수 > 고맙습니다.

◎ 진행자 > 이강수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함께했습니다.

[내용 인용 시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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