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을 줄 모르고 타오르는…‘길 잃은 분노’[정우성의 일상과 호사]

기자 2024. 9. 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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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튜브 사태와 ‘캔슬 컬처’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곽튜브(본명 곽준빈)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달구고 있을 때 실은 좀 어리둥절한 심정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곽튜브가 논란이 될 사람은 아니지 않나…? 곽튜브는 그러니까 ‘연예인처럼’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의 유명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친근한 쪽. 하지만 동시에 200만을 상회하는 여행 유튜버이자 예능 부문 신인상 수상자였다. 그 독특한 콘트라스트가 곽튜브라는 사람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당하면 당했지 해를 가할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속 편하게 생각했지만 상황은 좀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개인과 권력, (좀 과장된) 해석과 분노의 방향, 무책임한 거짓말과 요즘의 시대정신까지 얽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해하자면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앞서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는 자신이 학교폭력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었다. 지난 7월19일 청룡시리즈어워즈에서 예능 부문 남자 신인상을 받을 땐 정말 그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성공 후 ‘학폭 피해’ 고백했던 곽튜브
최근 ‘왕따 가해’ 의혹 있는 이나은과
여행 콘텐츠 올렸다 ‘대리 용서’ 논란
구독·지지 철회, 행사 취소 등 후폭풍
2차례 사과에도 분노는 확대 재생산
공인 아닌 개인도 ‘나락’ 보내는 시대
우리, 쉬운 상대만 노리는 건 아닌지

“사실 방구석에서 시상식을 많이 봤는데 그때 사실 상 받는 상상을 했었어요, 옛날에. 받으면 뭘 할지 생각하다가, 괴롭힌 사람들 이름을 얘기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올라와 보니까 그런 애들 이름은 안 떠오르고 여기 올 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 감사한 분들밖에 생각이 안 나서….”

통쾌하고 감동적인 성공 신화의 현장이었다. 드라마였다면 너무 드라마 같아서 욕을 좀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논란은 느낌이 아주 달랐다. 논란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부산국제트래블페어는 9월28일에 예정돼 있었던 ‘여행 유튜버 토크콘서트’를 취소했다. 지난 17일에는 곽튜브가 출연한 교육부의 학교폭력 예방 캠페인 영상을 비공개 처리했다. 한때 211만명 정도였던 곽튜브의 유튜브 구독자 숫자는 23일 현재 209만명이 되었다. 곽튜브를 둘러싼 참 많은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취소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른바 ‘대리 용서’ 논란이었다. 과거 ‘왕따 가해’ 의혹이 있었던 걸그룹 ‘에이프릴’ 출신 이나은과의 이탈리아 로마 여행 영상이 올라온 직후였다. 지금 이 영상은 비공개 처리되어 더 이상 볼 수 없다. 대신 곽튜브는 두 번의 사과문을 올렸다. 오만이었고 자만이었다고 썼다. 하지만 누군가는 곽튜브의 토크콘서트 출연을 취소하라는 민원을 넣었다. 그가 출연하는 모든 방송에 모자이크 처리를 요구한 사람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대리 용서’라는 말은 일종의 프레임이 되었다. 왕따 가해 의혹이 있는 연예인을 학폭 피해자이자 200만 여행 유튜버가 영상에 출연시켜 사과했다는 것이다. 그로써 가해 의혹은 용서 혹은 이해를 받았고, 과거 학폭 피해를 호소함으로써 응원과 지지를 받았던 곽튜브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배신함과 동시에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했다는 논리였다. 곽튜브 채널의 최근 영상 댓글 창은 (당연히)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욕하는 사람과 두둔하는 사람, 서로를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끼리의 감정들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이럴 일인가 싶은 정도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곽튜브는 그냥 좀 많이 유명한 개인 아닌가. 개인이 자기 채널에서 누군가 속상할 만한 말을 했다면 깔끔하게 사과할 기회를 주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두 번이나 사과했지만…. 수많은 영상과 기사의 댓글 창마다 제각각 넘실거리는 그 분노를 도대체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또 누군가 나락에 가야 끝날 일인가.

7월에 모두의 축복을 받은 예능인, 유튜버, 여행가가 9월에는 ‘캔슬 컬처’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이제 네이버 검색창에 ‘곽튜브’를 치면 이나은, 나락, 사태 같은 단어들이 같이 보였다. 나락은 불교 용어로 ‘지옥’이라는 뜻. 캔슬 컬처는 말 그대로 ‘취소하다’라는 의미의 ‘Cancel’과 ‘문화’를 합쳐 만든 말이다. 구독을 취소하고, 섭외를 취소하고, 심정적인 지지를 철회하는 것이다. 누구나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시대의 살벌한 인민재판. 비난을 퍼부으며 등을 돌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소셜미디어 이전에는 정치인이나 직장 상사가 대상이었다. 술자리에서 비난하기 가장 좋은 사람은 부장이나 차장, 대통령 혹은 국회의원이었다. 한껏 욕하다가 토론으로 이어지는 것도 술자리의 지루한 수순이었다. 대부분은 한숨으로 끝났다. 그들은 권력자고 술자리는 무해하니까. 대리가 부장을 해고할 수 있나? 하물며 대통령? 열 좀 받는다고 뭘 취소할 도리가 없었다. 한국은 유례없이 평화로운 탄핵의 역사를 가진 나라지만, 그게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너무 어려워서. 심지어 그랬다가 험한 일을 당했던 독재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힘없는 개인들은 모여서 술을 마셨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현실이었다. 모든 게 그대로인 일상에서 어제의 술자리, 같이했던 사람들과의 ‘좀 짠한 연대감’으로 또 하루를 버티는 것이었다. 그렇게 퇴근하고 어느새 주말이 되면 ‘이번 한 주도 수고했다’는 마음으로 또 한 잔 나누는 것이었다. 힘들어도 같이 살아내고 있다는 감각 자체가 묘한 동력이 되었다.

지금은 다르다. 개인과 개인의 연대는 사라졌다. 각자도생이야말로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이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소멸한 것 같다. 개인이 또 다른 개인을 끌어내리는 시대의 개막. 분노나 혐오는 이제 술자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진위와 관계없이 바이럴을 타고 온라인 미디어를 넘어 권력을 획득한다. 확성기 역할만으로도 개인이 또 다른 개인을 더 깊은 나락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무수한 ‘사이버레커’ 채널들이 이런 시류 위에 오로지 바이럴과 조회 수를 기반으로 기생 중이다. 이번에도 곽튜브의 중학교 동창을 자처한 누군가 ‘곽튜브의 학교폭력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게시글을 올려 말잔치에 불을 질렀지만 다 거짓말이었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곽튜브가 싫어서 욕을 먹게 하고 싶었다. 제가 한 거짓말이 기사로 써지고 관심을 받게 되자 기분이 좋고 영화 속 유명 범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며 바로 자백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논란이 논란을 낳고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자극하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데 사과는 소용없고 원본은 사라졌다. 그 흔한 ‘짤방’으로 아무리 추측해 봐도 곽튜브가 누굴 용서할 처지는 아니라는 것만이 확실해진다. 그가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200만 유튜버이자 신인상 수상 예능인이어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좀 유명한 개인일 뿐, 국회의원처럼 나라의 녹을 먹는 공인도 아니다. 조회 수가 수백만이어도 개인은 개인이다. 아무것도 대리하거나 대표하지 않는다. ‘대리 용서’라는 프레임 자체가 좀 과하다는 뜻인데, 증오와 분노만이 알아서 증식하는 형국인 것이다. 시인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 이렇게 썼다.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노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어디서 싹튼 분노가 어디를 향하는 걸까. 유명한 개인과 공인을 언제까지 헷갈릴 건가.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약 절반이 장기적 울분 상태라고 한다. 세상은 내 맘 같지 않고 돌파구는 보이지 않으니, 방향을 잃은 분노들은 이제 저 위에 있는 개인을 겨눠 추락시킴으로써 겨우 의미를 찾는다. 온라인에서 넘실거리다 현실의 참 많은 것들을 취소해 버린다.

쉬운 분노는 쉬운 추락만을 노리는 걸까. 우리의 분노는 ‘저 왕궁 대신에’ 왜 이렇게 쉽고 만만한 대상만을 위해 타오르는가. 그게, 정말 그럴 일이었을까?

■정우성

유튜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파크’ 대표, 작가, 요가 수련자. 에세이집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단정한 실패> <산책처럼 가볍게>를 썼다.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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