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물질·우주의 기원 밝힌다
지난달 7일 첫번째 빔 인출 성공, 2024년부터 이용자에게 빔 제공
"첫 걸음을 뗀 아기, 잘 하고, 성숙되고, 세계 최고 되는 과정 남아 있다"
기온이 확 내려가서 초겨울 기분이 났던 지난 15일 대전시 유성구 국제과학로에 있는 중이온가속기연구소를 방문했습니다. 첫 번째 빔 인출 성공을 계기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기초과학연구원(IBS)이 과학담당기자들을 초청했거든요.
직접 찾아가 보니 중이온가속기 시설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습니다. 부지면적이 95만 2066제곱미터라고 하는데 축구장 137개를 한꺼번에 모은 것과 같습니다. 모두 11개동인 건물의 연면적이 11만 6298제곱미터니까 이것도 대략 축구장 17개 크기입니다. 중이온가속기 시설 건설에 투입된 연인원은 대전시 인구의 약 절반인 67만 2743명이고, 사용된 철근의 길이는 2만 5532킬로미터로 서울과 부산을 32차례 왕복할 수 있다고 하네요.
중이온가속기 시설 중 핵심은 중이온가속기가 들어선 가속기동이겠죠. 길게 이어진 단일건물인 가속기동은 길이 550미터입니다. 30평 짜리 아파트 기준 4414세대를 지을 수 있는 레미콘과 에펠탑 3개 분량의 철근이 투입돼 건설됐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대형 시설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를 알려면 먼저 중이온가속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중이온가속기란 헬륨 이상의 무게를 갖는 무거운 이온(heavy ion)을 전기장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가속한 뒤 표적물질에 충돌시켜 다양한 희귀동위원소를 생성하고 그 성질을 연구하는 시설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를 연구하는 도구라고 보면 됩니다.
희귀동위원소는 또 뭐냐구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또는 자연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는 수명이 짧고 희귀한 동위원소를 말합니다. 수소를 예로 들어보죠. 자연상태의 수소 원소는 양성자와 전자가 각각 1개이고 중성자는 0입니다. 여기에 중성자 1개가 더해지면 중수소, 2개가 더해지면 삼중수소가 됩니다. 양성자의 수가 같기 때문에 원자번호가 동일하고 화학적 성질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물리적 성질은 다르지만요.
중수소와 삼중수소는 자연에 존재합니다. 여기까지는 동위원소라고 합니다. 이를 넘어서면 희귀동위원소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사중수소, 오중수소가 되겠죠. 그리고 위에 설명한 방법으로 희귀동위원소를 만드는 시설이 바로 중이온가속기입니다.
과학은 지금까지 발견된 동위원소가 약 3천 개인 반면 발견될 것으로 기대하는 미발견 동위원소는 7천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동위원소보다 희귀동위원소가 더 많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국형 중이온가속기(RAON)가 등장합니다. 세계에서 중이온가속기를 보유한 나라는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 독일, 중국, 일본 등 극소수입니다. 여기에 한국도 당당히 명함을 내밀 수 있게 된 것이죠. 게다가 IBS는 우리 기술로 설계·제작한 RAON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중이온가속기는 크게 ISOL과 IF 방식으로 나뉩니다. 프랑스와 캐나다가 채택한 ISOL방식은 가벼운 이온을 무거운 표적원소에 충돌시키는 것이고, 미국과 중국, 독일, 일본이 사용하는 IF 방식은 무거운 이온을 가벼운 표적에 충돌시키는 것입니다. 각각 장단점이 있는데 RAON은 유일하게 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해 더욱 희귀한 동위원소를 생성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시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중이온가속기 사업이 시작된 것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과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2011년부터입니다. 그동안 1조 5천억 원의 예산이 들어갔으나 기본계획이 네 차례나 변경되면서 예상보다 사업기간이 연장됐고 때문에 "꼭 필요한 사업이냐", "되기는 되는 것이냐" 등등 의심과 비판이 적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입사기와 저에너지가속장치, 극저온시스템, ISOL시스템, 사이클로트론 등의 구축을 마쳤고 IF시스템은 올해 말까지 설치한다는 계획입니다. 2단계 사업에서는 고에너지가속장치를 구축한다는 계획이고요.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RAON은 지난달 7일 저에너지 구간에서 첫 번째 빔을 인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RAON의 저에너지 가속장치를 액체헬륨을 이용해 영하 268도로 냉각하고, 81.25메가헤르츠(MHz)의 전력을 공급한 뒤 입사기에서 공급한 아르곤 빔을 가속해 첫 번째 빔을 인출한 것입니다. 11년에 걸친 대장정이 첫 결실을 맺은 셈입니다.
IBS는 내년 3월까지 저에너지 전체 구간의 빔 시운전을 마치고 2024년부터 이용자에게 빔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국내 연구자들의 연구나 외국 연구진과의 공동연구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르면 내후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존재가 확인되는 희귀동위원소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희귀동위원소를 왜 찾는지 궁금하다고요? 과학은 희귀동위원소를 통해 물질의 기원과 본질, 우주의 생성 과정 등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 들으면 중이온가속기가 기초과학 중의 기초과학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죠. 다만 여기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고 보다 넓게 보면 신소재 개발이나 청정에너지 확보, 암 치료 기술 등에 희귀동위원소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하네요.
중이온가속기연구소 홍승우 소장은 지난 11년을 돌아보면서 "중이온가속기를 처음 시작할 때 아무 반응도 없었고 땅도 조직도 인력도 없었다"며 "과학자들의 꿈만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맨 땅에서 시작했다는 뜻이겠죠. 그러면서 첫 번째 빔 인출 성공에 대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 첫 걸음을 뗀 아기라고 본다"며 "잘 하고, 성숙되고, 세계 최고가 되는 과정이 남아 있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정말 세계 최고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한 관계자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중이온가속기 건설이나 희귀동위원소 연구는 잘 사는 나라, 부자나라만 할 수 있다" 그렇겠죠. 당장 내일 먹고 살 길이 막막하면 아무리 미래가 중요해도 기초과학 연구는 우선순위에서 밀릴테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선진국 맞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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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조근호 기자 chokeunho21@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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