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자동차 산업의 화두는 '얼마나 빠르게 전기차로 전환하느냐'였다. 완성차 브랜드들은 앞다퉈 내연기관 종말을 선언했고, 순수 전기차만이 미래라는 메시지를 반복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흐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전동화 방향성은 유지하지만 속도와 방식에 대해 다시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는 고객들의 성향·브랜드 정체성·제품 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로 해석된다.
고성능·럭셔리 브랜드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뚜렷하게 보인다. 전동화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며, 브랜드 철학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받아들여진다. 일방적 전동화 추진보다는 시장 수요와 브랜드 정체성에 맞춰 '전동화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고 있다. EV 단일 해법이 아니라 '하이브리드 중심의 다단계 전동화'로 전략을 수정하는 것이다.

로터스 엘레트라예를 들어 로터스는 전기차 전환을 누구보다 빠르게 밀어붙였지만 시장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서 올해 하이브리드 모델 출시를 예고했다.
엔진이 직접 바퀴를 굴리기보다는 배터리를 충전하는 발전기 역할에 집중하는 구조가 핵심이다. 여기에 900V 고전압 시스템을 결합해 총 주행거리 1000km 이상을 목표로 설정하고 전기차의 가장 큰 약점인 충전 불안을 구조적으로 해소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래도 본질은 그대로다. 로터스는 전동화 시대에도 '가벼운 차가 더 빠르고 즐겁다'라는 철학을 잃지 않는다. 경량화 DNA를 바탕으로 전기 주행의 정숙함, 즉각적인 토크,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주행의 연속성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계획이다. 차세대 플랫폼은 무게 증가를 최소화하면서도 고출력 시스템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페라리 일레트리카페라리는 전동화를 가장 명확하게 '비율'로 설명하는 브랜드다. 2030년까지 제품 라인업을 내연기관 40%, 하이브리드 40%, 순수 전기차(EV) 20%로 구성하는 전략을 발표했으며 이는 기존의 전기차 확대 목표에서 조정된 계획이다.
이 전략은 페라리의 '멀티 에너지 전략'의 일환으로 내연기관, 하이브리드, 순수 전기차를 모두 아우르고 브랜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전동화를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첫 전기차 '일레트리카'는 올해 출시 예정이며, 1000마력 이상의 성능을 목표로 한다.

포르쉐 카이엔 EV포르쉐는 한때 2030년까지 판매의 80%를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최근 이를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목표'로 수정했다. 내연기관 또는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 병행 가능성을 열어 두며 전략을 유연하게 조정했다. 기술적 한계 때문이라기보다는 스포츠카 오너의 실제 사용 패턴과 시장 반응을 반영한 결과로 해석된다.
아울러 EV 전용으로 계획했던 대형 SUV 신모델 출시 일정을 늦추고, 초기에는 내연기관·PHEV 옵션 우선으로 운영할 전망이다. 포르쉐는 단순히 EV로 전환하는 게 아니라 '브랜드 아이덴티티·수익성·수요 안정성'을 고려한 혼합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람보르기니 란자도르 콘셉트카람보르기니는 현재 전 라인업의 하이브리드 전환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첫 순수 전기차 모델 '란자도르' 출시 시점도 원래 2028년에서 2029년 이후로 연기했다. 람보르기니는 전기 럭셔리 스포츠카 시장이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으며, 고객들이 순수 전기 슈퍼카를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됐다고 판단했다.
EV 파워트레인이 람보르기니 고유의 강력한 성능, 즉각적인 응답성, 감성적인 주행 경험, 서킷 주행시 요구되는 지속적인 고출력을 완벽하게 충족시키기에는 아직 기술적으로 부족함이 있다는 판단으로 보인다.

벤틀리 Beyond 100벤틀리는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전동화를 선언했다. 2020년 발표한 '비욘드(Beyond) 100' 전략에서 2030년까지 전 라인업을 순수 전기차로 전환하겠다고 밝히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2030년 완전 EV 브랜드' 목표를 공식적으로 유연화하고, 내연기관과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를 2030년대 중반까지 병행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재정렬했다.
벤틀리는 이미 컨티넨탈 GT, 플라잉 스퍼, 벤테이가 등 전 라인업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핵심 축으로 배치하고 있으며 여전히 첫 순수 전기차 출시 계획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이 새로운 전기차는 벤틀리의 기존 모델들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럭셔리 EV 포지션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피코리아 경창환 기자 kikizenith@gpkorea.com, 사진=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