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해군의 첫 잠수함 장보고함이 퇴역을 앞두고 뜻밖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폴란드에 무상 양도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멀리 동남아시아의 필리핀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죠.
33년간 한국 해군을 지켜온 노병이 국제 무대에서 새로운 드라마의 중심에 선 것입니다.
8조원대 잠수함 수출 계약을 노리는 한국 방산업체들의 절박함과, 자국 해군력 강화를 꿈꾸는 필리핀의 욕망이 이 낡은 잠수함을 둘러싸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장보고함 무상 양도 계획
복수의 군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올해 말 퇴역 예정인 장보고함을 폴란드에 무상으로 넘기기로 결정했습니다.
1988년 독일 HDW조선소에서 건조를 시작해 1991년 진수된 이 잠수함은 1,200톤급 디젤 잠수함으로, 1994년 작전 배치 이후 한국 해군의 수중 전력을 책임져 왔죠.

대통령실은 "장보고함은 퇴역 이후 방산 수출 및 협력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우방국 간 군사 협력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큰 계산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폴란드가 추진 중인 '오르카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잠수함 도입 사업이죠.
8조원짜리 오르카 프로젝트의 유혹
오르카 프로젝트는 폴란드가 3,000톤급 신형 잠수함 3척을 도입하는 사업으로, 기본 계약 규모만 약 3조4천억원에 달합니다.
여기에 유지·보수·운영(MRO) 비용까지 포함하면 최대 8조원 규모로 불어나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입니다.
한국 방산업체 입장에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던 것이죠.

이 프로젝트에는 한화오션을 비롯해 독일의 티센크루프마린시스템(TKMS), 이탈리아의 핀칸티에리, 스웨덴의 사브 등 글로벌 방산 기업들이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스웨덴의 사브의 A26이 선정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은 최근 폴란드에 K2 전차, K9 자주포, FA-50 경공격기 등을 대량 수출하며 양국 방산 협력을 크게 강화해 온 터라, 이번 잠수함 사업에서도 승기를 잡고 싶었을 것입니다.
장보고함 무상 양도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전략적 결정이었습니다.
33년 된 중고 잠수함이지만, 폴란드 해군에게는 실전 운용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귀중한 훈련 자산이 될 수 있죠.
한국 입장에서는 이를 미끼로 오르카 프로젝트 수주 가능성을 높이려는 '마지막 노력'이었던 셈입니다.
필리핀 방위산업 매체의 의문 제기
그런데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필리핀 방위산업 전문 매체인 맥스 디펜스가 SNS를 통해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국 정부가 장보고함을 폴란드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아마도 오르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한 마지막 노력인 것 같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미 스웨덴 사브 코쿰스가 프로젝트에 선정됐다고 발표했는데, 그렇다면 이 양도는 여전히 진행될 것인가?"

맥스 디펜스의 이런 반응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필리핀은 오랫동안 잠수함 전력이 전무한 국가였고, 최근 들어 중국과의 남중국해 분쟁이 격화되면서 수중 전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상황이죠.
필리핀 입장에서는 "왜 우리가 아니라 폴란드인가?"라는 아쉬움이 컸을 것입니다.
이미 승부는 났다, 사브가 오르카 프로젝트 수주
맥스 디펜스의 지적대로 실제로 폴란드는 이미 스웨덴 사브 코쿰스를 오르카 프로젝트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습니다.
한국 정부와 한화오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유럽 기업에게 프로젝트가 돌아간 것이죠.
사브 코쿰스는 A26급 잠수함으로 알려진 최신예 디젤 잠수함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스웨덴 해군에서 이미 검증된 기술력을 자랑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보고함의 폴란드 양도 계획은 다소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됐습니다.
대통령실은 "진행 중인 방산 수출 사업 관련 세부 사항에 대해선 국제 관계와 관련 업체 등에 대한 영향성을 고려해 확인해드리기 어렵다"는 신중한 입장을 밝혔죠.
오르카 프로젝트 수주라는 원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폴란드 방산 협력 차원에서 양도를 진행할지, 아니면 계획을 재검토할지 결정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필리핀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필리핀의 관심은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필리핀 해군은 동남아시아 주요국 중 유일하게 잠수함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입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주변국들이 모두 잠수함 전력을 갖추고 있는 상황에서 필리핀만 수중 작전 능력이 전무한 것이죠.

특히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공격적인 해양 활동을 이어가면서 필리핀은 자국 영해를 지킬 수단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필리핀의 국방 예산은 제한적이고, 신형 잠수함을 구매하기에는 부담이 큽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퇴역 잠수함을 무상으로 양도한다는 소식은 필리핀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맥스 디펜스가 이 이슈를 주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폴란드가 이미 스웨덴 잠수함을 선택한 상황에서 장보고함이 정말 폴란드로 가는 것이 확정됐다면, 필리핀으로서는 아쉬운 기회를 놓치는 것이죠.
반대로 한국이 계획을 재검토한다면, 필리핀이 새로운 수혜자가 될 가능성도 열려 있는 것입니다.
33년 된 잠수함의 마지막 항해
장보고함은 이제 33년을 현역으로 복무한 노병입니다.
독일 기술로 건조된 209급 잠수함으로, 한국 해군의 수중 작전 능력 구축에 중요한 역할을 했죠.
하지만 이제는 더 현대적이고 강력한 후속 잠수함들이 한국 해군에 배치되면서 퇴역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문제는 이 잠수함의 마지막 항해지가 어디가 될 것인가입니다.
폴란드의 발트해가 될지, 아니면 필리핀의 남중국해가 될지, 혹은 다른 제3국이 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는 방산 협력과 외교적 고려 사항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며 최종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폴란드와 필리핀, 두 나라 모두 나름의 이유로 이 잠수함을 원하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한국과의 방산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상징적 의미를, 필리핀은 절실한 수중 전력 확보라는 실질적 필요를 갖고 있죠.
33년 된 중고 잠수함 한 척을 둘러싼 이 조용한 경쟁은, 글로벌 방산 시장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