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댐의 빛과 그림자] 10. 소양강댐 붕괴론의 서막, 1984년 대홍수(상)
집중폭우로 침수 피해 심각
열지도 닫지도 못하는 상황
준공 11년 만에 붕괴 위기
수도권 방어 최후의 보루로
소양강댐 직원 고립 밤샘 근무
“힘든 상황 악에 받쳐 일해…
유입량 감소 하늘이 도왔다”
동양 최대 규모의 사력댐은 준공 11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1984년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내린 중부지역의 집중호우는 소양강댐의 안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비가 내렸고, 상류부터 흘러온 물은 소양강댐의 계획홍수위 198m를 넘나들었다. 댐 만수위는 203m. 물이 댐을 넘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콘크리트 댐은 물이 넘치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사력댐은 얘기가 다르다. 모래와 자갈을 쌓아 만든 터라 댐이 터질 수도 있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소양강댐 사수에 나섰다. 이미 서울과 한강유역의 침수도 심각한 상태. 춘천권에선 “소양강댐이 무너질 수도 있다”며 술렁였다. 춘천시민들은 통제된 정보 속에 아무 것도 모른 채 며칠 밤을 새워야했다. 그 살벌했던 1984년 늦여름으로 돌아가본다.

■ 서울을 사수하라
소양강댐은 200년 빈도의 홍수에 맞춰져 설계됐다. 준공 당시만 해도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예측은 불과 11년 만에 여지없이 깨졌다. 그 전조는 준공 5년 후 발생했다. 소양강댐은 1978년 8월 28일 오후 4시 처음으로 수문을 열었다. 당시 늦은 장마로 댐 수위가 188.32m까지 오르자 댐 관리소에서 높이 100m, 길이 13m의 수문 5개를 열어 10분 동안 25만5000t의 물을 방류했다. 춘천학연구소가 펴낸 ‘춘천인 증언록 댐과 춘천’을 보면 ‘수문 밑 시멘트 바닥의 낙차 지점에서 30m 높이의 물기둥이 치솟았고 100m의 포물선이 그려지자 무지개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소양강댐의 본격적인 위기는 준공 11년만에 닥쳤다. 1984년 8월 말 이미 중부지역에는 며칠째 호우가 내린 상태였다. 여기에 태풍 ‘준’(1984년 8월28일~8월31일)이 덮치면서 빗줄기는 위협적으로 변했다. 시간 당 50㎜의 비를 뿌렸다. 당시 일 최다강수량을 보면 속초 314.2㎜, 부산 246.5㎜, 울산 233.2㎜, 홍천 215.9㎜, 강릉 204.5㎜에 달했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1984년 9월1일~3일까지 강원산간에 폭우가 집중됐다. 소양강댐으로는 설악산과 인제, 양구, 홍천 일대에서 물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춘천을 포함해 소양강댐 상류지역은 8월 말 일주일 동안 200㎜가 넘는 비가 끊이지 않고 내렸다.
운명의 9월1일, 인제 상류지역에 하루동안 275.8㎜, 춘천은 260.0㎜의 비가 내렸다. 2일에도 인제는 127.1㎜, 춘천은 103.1㎜의 비가 또 쏟아졌다. 이틀간 내린 폭우로 인해 소양강댐은 한계치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1904년 중앙기상대가 생긴 이후 최고 기록이고 1945년 해방 이후 세번째 대홍수였다. 1984년 대홍수로 재산 피해만 2000억원. 서울을 중심으로 주택 2만채가 침수됐고 9만명이 대피했다. 강원과 서울, 경기지역에서 19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서울 정도로 퍼붓는 비에 한국수자원공사 소양강댐지사는 며칠째 비상근무를 해야 했다. 당시 기능직 6급이었던 박명학(67)씨도 그 중 한 명 이었다. 박명학씨는 1980년 1월부터 2017년 6월30일까지 소양강댐에서 40여 년을 근무했다. 1984년 집중호우 때도 현장을 지켰다. 지난 11일 춘천 신북읍에서 만난 박명학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1980년대 당시만해도 제대로 된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다. 직원들이 현장에 나가서 수동으로 풍선을 나무에 묶어서 댐 수위를 예측하던 때였다.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댐 수위가 190m를 넘어서면 방류를 해 수위를 낮춰야 했다. 소양강댐이 문을 열면 서울을 비롯한 한강 하류 지역이 초토화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소양강댐 수문 개방 여부는 한국수자원공사 본사와 소양강댐 지사, 한강홍수통제소가 협의해 결정한다.
이미 서울도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소양강댐은 수도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다. 소양강댐 정상에는 이미 물이 차 넘실거렸지만 쉽게 수문 개방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소양강댐에서 최대한 막아보라”고 지시했다. 박명학씨는 “서울에 물이 차니까 ‘소양강댐에서 최대한 좀 막아보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 “발전소, 포기하겠습니다”
하지만 막을 수 있는 비가 아니었다. 이미 도로는 끊겼고 인제쪽 상류 댐 수위를 살피러 간 직원들은 길이 막혀 홍천에서 고립됐다. 더 큰 문제는 발전소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물이 들어오는 곳을 막아봤지만 몰아치는 물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댐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박명학씨는 “그때 댐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콘크리트 댐이야 물이 월류(越流)하는 정도지만 모래와 자갈을 쌓아 올린 사력댐인 소양강댐은 댐이 터질 수도 있었다. 소양강댐 저수량만 29억t. 소양강댐이 무너지면 63빌딩 63층 중 45층까지 물이 차고 춘천의 경우 봉의산 도청 꼭대기만 살아남는 정도라고 알려져있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소양강댐지사와 한강홍수통제소 간 고성이 오갔다. “책임질 수 있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한국수자원공사 본사와 전화했다. 소양강댐지사는 “발전소, 포기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상황을 파악한 간부진이 “다 열어라”라고 지시했다.
1984년 9월 1일 오전부터 화천, 춘천, 의암, 청평댐이 수문을 열었고 소양강댐도 방류를 시작했다. 당시 댐 수위는 198m. 소양강댐 만수위 203m를 불과 5m 남겨둔 시점이었다.
수문을 열어도 수위는 내려가지 않았다. 초당 5500t을 내보내지만 상류에서 들어오는 물은 1만2000t에 달했다. 나가는 양보다 들어오는 양이 더 많았다. 이미 며칠 째 고립됐던 소양강댐지사 직원들은 마지막을 준비했다. 비상로로 식량을 조달받기도 했지만 생라면을 부셔 먹으며 버텼다. 덮쳐오는 물을 막으려 변전소 밑에 있는 자갈을 쌀 포대에 담아 쌓았는데 급한 마음에 무거운 줄도 모르고 쌀 포대를 날랐다. 나중에 비가 그치고 나니 성인 남성 둘이서 들기 버거울 정도의 무게였다.
박명학씨는 “악에 받쳐 일을 하다 보니 무거운 줄도 몰랐다”며 “그때 허리를 다친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고 했다. 전기는 끊긴지 오래, 한전에서 긴급 조치를 한 뒤에야 겨우 전기를 쓸 수 있었다.
당시 박명학씨와 같이 일하던 부장은 직원들에게 “댐 수위가 200m를 넘기면 다 나가라. 나 혼자 지키겠다. 내가 죽으면 비석이나 세워달라”고 했다.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박명학씨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박 씨는 “이 때만 생각하면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며 “정말 너무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하늘이 도왔을까. 댐 수위는 198m에서 더이상 올라가지 않았고, 비가 멈췄다. 댐 유입량과 방류량도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1984년 9월 3일 일이다. 오세현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양강댐 준공 50주년을 맞아 ‘소양강댐의 빛과 그림자’를 연재하고 있는 강원도민일보는 1984년 대홍수를 포함, 소양강댐의 역사를 알고 계신 전직 공무원이나 관계자, 주민을 찾습니다. 소양강댐 수몰과 관련된 분들의 제보도 기다립니다.
△ 제보전화 : 강원도민일보 사회부(033-260-9240)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재명 부모 묘소 훼손…“후손들 모르게 사방에 구멍, 저주글 쓴 돌 묻어”
- 진중권 "이재명에 인간적으로 분노...양심의 가책 없이 검찰 탓만"
- 수상한 교통사고? 사망한 아내 외상이 없다…경찰, 강력범죄 가능성 의심 수사
- 73명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물 제작한 현역 장교…검찰 징역 20년 구형
- 문재인-윤석열 정부 상반된 판단 ‘산양’이 갈랐다
- 윤 정부 개국공신·중책 담당… ‘외가정권’ 신조어까지
- 강아지 엽기적 학대로 사망케 한 20대 여성에 징역 3년 구형
- [남궁창성의 ‘용산 리포트’] 2. 김건희 여사의 JUST BE YOURSELF
- [최동열의 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1. 아득한 옛날, 바다는 고속도로였다
- [천남수의 視線] '수박' 그리고 메카시 광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