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속의 신성, 북인도를 걷다] 4. 사르나트, 부처의 첫 설법이 시작된 곳

기호일보 2026. 5. 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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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깨달음으로 걷는 中道 붓다의 가르침에 고개 숙이다

바라나시에서 북동쪽으로 약 10㎞. 버스로 30분 남짓 달리면 갠지스강과 바루나강이 합류하는 지점 근처에, 녹야원(鹿野苑)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사르나트(Sarnath)가 있다.

스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불자들.
사르나트, 옛 이름 리쉬파타나(Rishipattana).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뒤 다섯 제자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한 자리, 초전법륜(初轉法輪)의 장소다. 룸비니(탄생, 네팔), 보드가야(득도), 사르나트(초전법륜), 쿠시나가르(열반)는 부처의 일생에 숭고한 서사를 이룬 장소로 불교의 사대 성지가 됐다.

사르나트 앞은 소란스럽고 혼잡했다. 구걸하는 아이들, 어린아이를 옆구리로 안고 동정심을 파는 여자들, 기념품을 팔아달라고 아우성치는 호객꾼, 끊임없이 울려대는 경적. 온갖 소리가 뒤엉켜 정신이 없었다.

사르나트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공간이 열리듯 유적지가 펼쳐졌다. 소리는 가라앉고 대신 오래된 시간이 땅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마음의 체온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걸음이 느린 나는 뒤처져 걸었다. 무너진 석조 기단 앞에 멈춰 서서 바랜 안내판의 글자를 읽고 있다 일행을 놓쳤다. 서둘러야 하나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곁눈질로 스쳐 지나가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는 빠름이 오히려 비효율이 됩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한 남자가 말을 건넸다. 한국말이었다. 그 남자의 말투에는 오래 생각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가 실려 있었다.

부처가 첫 설법을 했던 장소에 세워진 다메크 스투파.
"처음에는 우연히 왔어요.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요. 그런데 한 번 오고 나니까 또 오게 되더라고요.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묵은 때가 한 겹씩 벗겨져 가벼워져서 갑니다." 남자의 말은 반복된 시간의 층처럼 들렸다. 그는 마치 오래 알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듯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부처님이 처음 설한 것이,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중도(中道)로 가는 불교의 핵심 교리인 셈이지요." 그는 한 글자씩 짚듯 풀어주었다.

"중도(中道)는 저속한 쾌락에 빠지는 삶과 힘들고 무의미한 고행에 몰두하는 극단을 피하고 깨달음과 해탈로 가는 바른길인 중도를 걸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성제(四聖諦)에서 고(苦)는 삶은 고통이 있다는 사실, 집(集)은 그 고통의 원인, 멸(滅)은 고통은 사라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도(道)는 고통이 소멸에 이르는 길을 뜻합니다." 남자에게 불교 교리에 대해 심오하다 했더니 말과 달리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붓다는 이곳에서, 누구도 대신 끊어주지 않는 고리를 이야기했다. 강(江)도, 신(神)도 아닌 오직 자신의 깨달음으로만 끊어야 하는 길. 불을 통해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 벗어나는 길. 마니카르니카 가트에서의 불꽃이 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녹야원의 고요는 자신을 스스로 지워가는 길에 가까웠다.

사르나트 사원 유적지.
7세기 당나라 승려 현장은 불교의 참된 경전을 구하기 위해 사막과 산을 넘어 인도로 향했다. 「서유기」 속에서 만나는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이 현장법사다. 그는 요괴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시작된 가르침의 원본을 확인하기 위해 인도로 왔다. 현장은 사르나트를 방문한 소회에 1천500명의 승려가 수행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나는, 남자의 안내를 따라 유적지 몇 곳을 둘러보았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주황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과 흰옷을 정결하게 차려입은 불자들이 맨발로 순례하는 모습이 보였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는 가부좌한 스님이 낮은 목소리로 설법을 하고 그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고요히 설법을 듣고 있었다. 이곳은 지금도 '법이 말해지는 장소'로 엄숙했다.

유적지 뒤쪽에 있는 사슴 보호구역에서는 철망 너머로 사슴들이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그 풍경이 전승의 결을 이어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어느새 남자와 나는 다메크 스투파(Dhamek Stupa) 앞에 서 있었다. 높이 약 33m, 기단부의 지름이 약 28m에 이르는 거대한 원통형 탑은 5~6세기께 굽타 시대에 증축된 것이다. 이 탑의 기원은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재위 기원전 268~232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탑의 아래쪽에는 기하학 문양과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수 세기를 버텨온 돌의 표면은 닳아 있었다. 오래전, 이 자리에서 '법륜이 처음 굴러가기 시작했다'라는 부처의 첫 설법 장소를 기념해 세운 탑이다.

"기억해 둘 만한 장소입니다. 사진 찍어드릴게요." 그의 말에 나는 핸드폰을 건넸고 스투파 앞에 섰다. 불승의 경전 소리처럼 셔터 소리가 몇 번, 짧게 울렸다.

"찍어드릴까요?" 내가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여러 겹으로 담아놔서요."

우리는 길게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애초부터 각자의 길 위에 있던 사람들이라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앞쪽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가이드의 목소리를 따라 일행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맨발로 사르나트 유적지를 순례하는 스님과 신도들.
부처의 열반 이후 약 200년이 지난 기원전 3세기, 인도를 통치했던 정복 군주 아소카대왕은 칼링가 전투에서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는 참상을 목격한 뒤 깊은 회한 속에서 불교에 귀의했다. 이후 아소카왕은 사르나트를 비롯한 여러 불교사원과 성지를 정비하고 기념물을 세웠다. 이곳에서 발견된 아소카 석주에 초전법륜의 장소임이 명시돼 있어서 사르나트는 성역이 되었다. 부처가 명상에 잠기셨던 곳으로 거대한 사찰이 있었던 물라간다 쿠티와 한때는 승려들의 수행 공간으로 불심 가득했을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의 자리는 이제 낮은 기단과 터만 남았다.

12세기 말, 북인도로 밀려든 이슬람 세력인 고르왕조의 술탄 무함마드 고리와 그의 장군이자 훗날 델리 술탄국을 세운 쿠트브 웃딘 아이바크는 대대적으로 불교사원을 파괴했다. 사르나트를 비롯한 불교사원들은 엄청난 약탈과 파괴로 피폐해졌다. 또 많은 승려가 죽임을 당해 주변 국가로 피신을 가기도 해서 불교가 인도에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행과 합류해서 나오는데 독실한 불교 신자인 친구가 떠올랐다. 절에 가면 대웅전의 부처님 앞에서 묵묵히 백팔배를 올리던 친구다.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나도 한 번 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라기 보다 그저 한 번쯤은 온전히 내려놓은 몸의 기억을 따라가 보고 싶어서다.

사르나트를 벗어나자 다시 사바세계가 펼쳐졌다. 그 혼란 속을 걸어서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스리랑카 사원과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으로 가는 길이다.

<<strong>글·사진=신미송 굴포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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