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수발 뒤엔 손주 돌봄… 조부모 절반 이상이 "거절 못 해 어쩔 수 없이"
여성 노인의 돌봄 부담 비율 높아
47% "돌봄 그만하고 싶다 생각"

60대 중반인 박정숙(가명)씨는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손자를 5년째 키우고 있다. 돌봄을 시작한 건 계획된 일은 아니었다. 육아휴직을 마친 딸이 "아이를 남한테 맡기면서까지 직장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이를 말리며 "엄마가 일을 그만둘 테니 너는 계속하라"며 돌봄을 시작했다. 딸의 경력이 끊기길 바라지 않은 데다 금쪽같은 손자를 남의 손에 맡기는 게 불안했기 때문이다.
육아는 생각보다 더 고됐다. 박씨와 남편이 사는 집은 지방 도시에 있었는데, 딸과 사위는 서울에 살았다. 딸 집에 머물며 손자를 보다가 보름에 한 번씩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내려가 장을 봐 남편이 먹을 것을 마련해놓고 다시 상경하는 일을 반복했다. 60대 고령이 버티기엔 가혹한 일상이었다. 그러다 암에 걸렸다. 지금은 완치됐지만 도저히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일을 못 하겠다 싶어 지금은 남편도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함께 살고 있다.
박씨처럼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 중 절반가량은 돌봄노동을 원치 않은데 거절하지 못해 손자녀를 도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 노인 위주로 돌봄 부담을 크게 느꼈다. 조부모에게 돌봄 책임이 전가되지 않도록 사회 구조가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가족 내 손자녀 돌봄 현황과 정책방안 연구' 일환으로 실시한 '노인의 손자녀 돌봄 실태조사' 주요 결과를 8일 발표했다. 조사는 6개월간 주 15시간 이상 10세 미만 손자녀를 돌보는 55~74세 조부모 1,063명을 대상으로 했다.
여성 노인 "그만하고 싶다" 비율 높아
조사 결과, 조부모들은 평일 동안 평균 4.6일을, 하루 평균 6.04시간씩 손주를 돌봤다. 주당 평균 돌봄시간은 26.83시간에 달했다.
이들 대부분이 비자발적 돌봄을 하고 있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53.3%)은 "손자녀 돌봄을 원하지 않지만 자녀의 사정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주로 경제적 필요 때문에 출산 후 취업하거나 복직한 자녀나 사위, 며느리를 돕기 위해 돌봄을 시작한 사례가 많았다. 성별에 따른 응답률은 여성 57.5%, 남성 44.6%로 12.9%포인트 차이를 보여 여성 노인의 비자발적 부담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손자녀 돌봄은 조부모와의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응답자의 81.9%는 손자녀와의 관계가, 68.8%는 자녀와의 관계가 손자녀를 돌봄으로써 좋아졌다고 응답했다. 이런 긍정적인 효과는 남성(73.6%)이 여성(66.5%)보다 더 높게 체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동시에 손자녀 돌봄은 조부모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손자녀 돌봄 이후 육체적 피로감이 증가했다는 응답은 73.7%, 정신적 부담이나 스트레스가 증가했다는 응답은 60.4%로 나타났다. 기존에 있던 질환이나 통증이 늘었다는 응답도 47.8%에 달했다. 특히 부정적 영향은 돌봄 부담을 더 극심하게 느끼는 여성 노인에게 두드러졌다.
문제는 돌봄 노동의 굴레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큰딸이 낳은 두 손녀를 수년간 돌봤던 70대 고은희(가명)씨는 "다 키우고 나니 작은딸이 아이를 낳아서 지금은 그 손녀를 돌보고 있다"고 말했다. 고씨는 결혼 후 시어머니를 40년간 모시며 병수발을 했고, 뇌종양·심장 수술을 한 남편의 병간호도 했다.
"일과 육아 병행 가능한 구조가 돼야"

조부모가 큰 부담 속에 손자녀 돌봄을 떠안는 구조가 지속돼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사를 진행한 마경희 선임연구위원은 "조부모 돌봄은 부모의 늦은 퇴근 시간 대응 등 돌봄 공백을 보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서도 "노년기 조부모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조부모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육아가 가능하도록 노동 시장이 개선돼야 한단 제언도 이어졌다. 마 연구위원은 "부모가 일하면서도 직접 자녀를 돌볼 수 있도록 노동시간 구조와 관행이 바뀌어야 하고, 공적 돌봄의 질과 접근성도 더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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