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회 베를린 마라톤 완주기] 마라톤은 인생과 닮았다

베를린=허문명 기자 2024. 10. 2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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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초보 러너’ 기자가 뛰며 느낀 건…

● 동아일보 기자가 베를린 마라톤 참가한 이유
● “몸이 가장 정직하다”는 말의 울림
● 35km 지점에서 흘린 눈물… 비워내야 할 것들
● 첫 풀코스에 5시간 52분 35초 기록 남겨
● ‘마라톤은 명상’이라는 것 체험
● 일단 뛰면 생각과 몸 달라지고, 삶도 달라진다

9월 2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50회 베를린 마라톤’에 참가한 필자의 모습. [베를린=허문명 기자]
베를린 마라톤은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다. 사진은 이를 기념해 만들어진 로고. [베를린 마라톤 운영위 홈페이지]
9월 말, 독일 베를린의 가을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전날까지 비가 오락가락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베를린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고 이곳으로 이민 온 친구가 말해 줬다. 맑은가 하면 이내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가랑비가 흩날린다는 거다. 친구는 "추우니까 얇은 패딩을 꼭 챙겨 오라"고 했지만 추석이 지나고도 가시지 않은 무더위로 덥고 습했던 서울 날씨에 겨울옷을 챙기기가 주저됐다.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친구 말을 흘려들었던 걸 후회했다.

여름휴가를 내고 베를린에 간 것은 몇 가지 이유가 겹쳐서였다. 그리운 친구를 만나는 것 이외 팔자에도 없는(?) 마라톤 참가라는 일생일대 이벤트도 있었다. 국내에서 마라톤 완주를 다섯 번이나 한 또 다른 친구가 "올해가 베를린 마라톤 50주년인데 동아일보 기자로서 손기정 선수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라도 베를린 마라톤을 경험해 보고 싶지 않으냐"는 제안을 했고, 꽤 솔깃했다. 그렇지 않아도 러닝에 재미를 붙여 국내에서 열린 10㎞ 달리기 대회도 서너번 나간 터였다.

몸에 집중하기 위해 러닝 시작

세계 6대 마라톤으로 꼽히는 베를린 마라톤은 세계 각국에서 온 마라토너들로 북적였다. 초보 러너인 필자(가운데 모자 쓴 사람)만 긴 레깅스를 입고 있다. [베를린=허문명 기자]
개인적으로 러닝에 입문한 것은 1년 반 전쯤이었다. 50대 후반 나이에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해 성공한 직장 동료의 권유로 매주 목요일 아침 6시에 만나 남산 산책로를 뛰었다. 운동을 별로 하지 않았던 직장 동료는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고 매일 아침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그런 그에게 "왜 그렇게 운동에 진심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에게서 나온 답은 "몸이 가장 정직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순간 머리를 쾅 때리는 울림이 있었다. 몸보다는 머리를 주로 써온 나는 날이 갈수록 글과 말의 무력감과 회의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나 스스로는 물론이요, 알 만큼 알 만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간극을 보고 있자니 세상을 보는 눈이 점점 냉소적으로 변하는 시기였다. 그즈음 그가 말한 '몸'과 '정직'이란 말에 꽂혔다. '나도 말이나 언어가 아닌 몸과 행동에 집중해 보자'는 마음이 살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립극장을 뒤로하고 시작되는 남산 조깅 코스는 업다운이 반복돼 초보자에게는 힘든 코스다. 나 역시 처음에는 뛰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다가 차츰 속도를 내기 시작해 1시간 동안 6㎞ 정도를 천천히 뛰었다. 그러자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고, 올해 들어 국내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규모의 대회에 참석해 10㎞ 코스를 뛰었다. 경험이 있는 러너라면 1시간 안에 들어올 거리지만 '천천히 오래달리기로 절대 무리하지 말자'는 원칙을 지키려다 보니 1시간 20분대, 폭염이 기승을 부린 8월 대회에서는 1시간 40분대까지 늘어졌다.

그런데 베를린 마라톤을 같이 뛰어보자는 말을 듣고는 '그곳에서라면 20㎞ 정도는 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겼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회에 참석해 이국적인 사람들과 풍경에 취해 달리다 보면 없던 힘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도 포기부터 생각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베를린 마라톤 참가자들 출발 광경. [베를린 마라톤 운영위 홈페이지]
일요일이던 9월 29일(현지 시간)에 열린 베를린 마라톤은 전날 엑스포장으로 가서 출전 손목 띠와 번호를 받는 것으로 시작했다. 엑스포장은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마련됐는데 광활한 규모에 우선 놀랐다. 유럽 최초의 공항이자 히틀러가 베를린을 세계적 수도로 만들기 위한 일환으로 건설한 공항이라는 게 실감 났다. 현재는 폐쇄돼 시민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엑스포장에 도착했을 때 출렁이는 인파에 놀랐다. 줄을 서서 30분은 넘게 기다려야 배번을 받을 수 있었다. 마라톤 코스를 그린 지도와 가벼운 가방을 받아 나오면 바로 러닝 전문 상품으로 가득한 쇼핑몰이 등장한다.

기념 바람막이용 점퍼와 텀블러, 허리에 차는 벨트백 등 기념품의 숫자와 종류도 다양했다. 상업적 마케팅 전략도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셔츠나 러닝은 아시아인들에게 맞는 작은 사이즈가 일찌감치 동이 나서 구하지 못한 사람도 많아 보였다.

대회 전날 저녁, 한국에서 같이 온 일행이 호텔에 모였다. 나는 서울에서 해외 마라톤 참석 수속을 대행해 주는 회사를 통해 여행 상품을 사서 왔다. 이렇게 모인 30여 명가량이 같은 숙소에 머물며 인사를 나눴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날아온 사람들이었다.

아마추어들이라고 하지만 첫눈에 봐도 다들 마르고 단단한 체격에서 엘리트 선수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나 같은 초보 러너는 한 명도 없었다. 몇몇 분에게 "완주를 몇 번 해봤냐" 물었더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말이냐"는 표정이어서 주눅이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의 목표는 완주가 아니라 기록 단축이었다.

왜 마라톤에 입문했고 그동안 어떻게 훈련했는지, 마라톤을 통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질문을 퍼붓고 싶었지만 첫 대면부터 마음을 여는 대화를 하기란 쉽지 않았다.

드디어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전날까지만 해도 '20㎞ 정도 뛰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고 절대 무리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던 나는 베를린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내가 어느 지점에서 중도 포기할 줄 모르니 오후 시간을 비워놓고 SOS를 치면 데리러 오라'고 말해 놨다.

그런데 호텔에서 한국에서 온 참가자들과 아침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이 점점 바뀌었다. 나더러 "기록이 얼마냐" "완주는 몇 번 해봤느냐"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10㎞ 대회 몇 번 나간 게 전부고, 20㎞도 뛰어보지 못했다. 이번 대회에서는 20㎞만 뛰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왔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더니 다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오로지 이날만을 기다리며 훈련해 온 사람들은 '아니, 고작 20㎞를 뛰기 위해 이곳 베를린까지 왔다고?' 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서울에서 함께 온 친구가 "중도 포기할 생각 말고 끝까지 함께 뛰어라. 너의 체력과 지구력을 알고 있는데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해 줬다. 그 말을 곁에서 들은 여행사 직원도 지난해 나처럼 친구 따라 출전하며 20㎞만 뛰겠다고 한 사람이 끝까지 완주해 대회 제한 시간인 6시간 내인 5시간 30분 만에 들어왔다면서 나더러도 "걷는 한이 있더라도 완주를 해보시라"고 권했다.

점점 오기가 생기고 도전 의식이 생겼다. '그래, 20㎞는 무조건 뛰고 이후 상태를 보고 완주를 한번 도전해 보자'는 결심이 섰다.

출발 시간은 오전 10시였지만 8시 반에 행사장에 도착했다. 참가 인원만 5만8000여 명. 거대한 인파로 티어가르텐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베를린 마라톤 코스는 한국으로 치면 광화문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출발점 브란덴브루크문에서 시작해 시내를 돌아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순환 코스다.

나를 뛰게 하는 힘

마라톤 운영국은 순조로운 대회 진행을 위해 참가자들의 기록에 따라 색깔별로 그룹을 나눠 출발 시각을 달리했다. [베를린=허문명 기자]
베를린 마라톤은 최정상급 마라토너들에게 '기록의 산실'로 꼽힌다. 코스 자체가 평탄하기 때문이다. 첫 시작점 해발고도는 34m, 결승점 해발고도는 27m다. 최고 고도는 해발 79m, 최저 고도는 25m다. 경기 내내 급격한 오르막은 4차례 정도밖에 안 된다. 28㎞ 이후부터는 대부분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명문 마라톤 대회라고 할 수 있는 보스턴이나 런던은 급격한 내리막이나 오르막이 있어 선수들로서는 기록을 내기 힘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 같은 초보에게는 평탄한 코스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 요소였다. 더불어 '의미'를 중시하는 나로서는 장시간 차량이 통과하지 않는 베를린이라는 도시 자체를 천천히 내 발로 훑을 수 있다는 점도 크게 다가왔다.

베를린은 도시 전체가 분단과 상처를 기억하는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 추모 공원 가까운 곳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은 1700년대 건축된 이후 300년을 넘게 독일 근현대 역사와 세월을 같이한 역사적 건축물이다. 1989년 11월 9일, 10만여 명의 인파가 이 문 앞에 모인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전 세계는 서독과 동독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었다가 다시 평화의 상징이 된 문 앞에서 마라톤의 처음과 끝이 있다는 게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이 문을 지났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더군다나 내가 앞으로 뛸 코스의 일부를 88년 전, 손기정 선수도 뛰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설렜다.

출발선에 빼곡하게 모인 이국의 러너들 표정에는 흥분과 긴장이 오갔다. 아침부터 모여 노래를 부르고 환호를 외쳤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무려 6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달려도 코스에서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기록에 따라 A, B, C, D, E, F, G, H, K그룹으로 나눠 시간차를 두고 출발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참가자들이 그룹별로 출발하니 출발 지점에서 혼잡과 뒤엉킴이 없었다. 기록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달리기 때문에 서로 뒤엉키지 않고 물 흐르듯 달릴 수 있었다. 첫 참석으로 후반 그룹인 G그룹에 속해 있던 나는 10시 20분에 출발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응원해 준 고마운 시민들

베를린 시내에는 마라톤에 참여한 사람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베를린=허문명 기자]
드디어 출발 신호가 울리고 모두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처음 보는 베를린 시내 풍경에 취해 거리를 의식하지 않고 뛰었다. 50여 분 만에 첫 10㎞ 지점을 통과했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빠른 기록이었지만(?) '나만 너무 천천히 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니 정말 많은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서울 대회에서 뛸 때는 5㎞ 지점마다 거리 표시가 돼 있었는데 이곳은 1㎞ 지점마다 표시가 나왔다. 한발 한발 성취감을 더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물을 제공하는 급수대도 좌우로 배치됐고, 10㎞ 지점부터는 사과 조각과 바나나 토막이 제공됐다. 15㎞ 이후부터는 소방차가 소방 호스로 물을 가늘게 뿌려주기도 했는데 이날은 그리 덥지 않아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날이 더웠다면 정말 도움이 되는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20㎞ 이후부터는 급수대에 따뜻한 홍차도 있었는데 어찌나 맛있었는지 두 컵이나 먹었다. 마침내 절반을 통과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여기서 돌아나가야 하는데 내 몸은 '아직 더 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여행의 미덕을 말할 때, 시간과 공간을 데이터라는 관점에서 보면 뇌 속에 다른 데이터를 자주 입력해 줘야 환기가 되고 뇌 활동도 유연해진다고 믿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다른 시공간이 주는 데이터가 뇌 속에 입력돼서 그런지 서울에서 달릴 때와는 다른 힘이 생겼다. 상점가도 지나고 주택가도 지나면서 베를린 사람들의 일상이 몸으로 느껴졌다. 30㎞ 지점에서는 이대로라면 제한 시간인 6시간 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엇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응원이 큰 에너지를 주고 있었다. 마라톤의 장점은 천천히 땅을 느낄 수 있다는 거다. 코스가 시 외곽이 아니라 시내를 관통하다 보니 뛰는 내내 응원하는 관중을 만나게 된다. 베를린 마라톤은 말 그대로 축제였다. 결승선까지 이어지는 도로에 시민들이 양쪽 길에 서서 끊이지 않고 러너들을 응원해 줬다.

곳곳에서 관현악과 재즈 공연이 펼쳐졌고 DJ들이 나와 길거리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해 놓고 테크노 음악을 틀어줬다. 바이올린 연주도 하고 나팔도 불고 드럼도 쳐줬다. 유모차에 아기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에서부터 혼자 나온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러너들에게 "고 고(go go)"를 외쳐줬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일부러 손과 눈을 맞추며 파이팅을 외쳤다.

42.195㎞를 가는 내내 도로에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보며 내가 언제 이렇게 누군가로부터 격려와 응원을 받은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연극의 3요소가 무대, 관객, 배우라고 하지 않는가. 관객이 없다면 연극은 성립하지 않는다. 베를린 마라톤이 그랬다. 마라토너도 주인공이지만 그 주인공들을 응원하는 시민들 역시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힘들게 자신과 싸우고 있는 러너들에게 '정말 당신은 잘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에게 나도 끝까지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힘을 주는 사람들은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었다. 국적도 나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힘겹게 똑같이 달리는 모습을 보며 '저들은 왜, 또 나는 왜 뛰고 있을까'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길을 자청하고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도 쉬지 않고 뛰어가는 앞뒤 러너들과 동행하며 힘을 받았다.

30㎞ 지점부터 시작된 정신력 싸움

30㎞ 지점까지 잘 버텨주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리 근육이 뭉쳐 몸이 천근만근으로 느껴졌고, 발바닥은 불이 붙은 듯 뜨거웠다. 1㎞씩 가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는 몸이 아니라 정신력 싸움이었다.

33㎞ 지점에서 약간 걷기 시작했다. 잠시 걷다가 다시 뛰려니 다리가 더 말을 듣지 않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힘들어도 걷지 말자'고 다짐했다. 시계를 보며 계속 페이스 체크를 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6시간 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다시 힘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뛰기 시작했다. 어디서 힘이 나는지 내 몸은 이제 기계가 된 듯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2㎞가 남았다는 거리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제 끝나가는구나.' 연도에 들어선 시민들이 "우~" 하고 소리를 지르며 응원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어왔다. 도화지에 "You are Hero" "You are Superstar"라고 크게 적은 팻말들도 더 크게 보였다.

아…. 그런데 남은 2㎞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마지막 코스가 구불구불해 결승선이 바로 앞인 것 같은데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6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마침내 피니시 라인. 기록은 5시간 52분 35초.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결승선을 지난 후 자원봉사자가 걸어주는 메달을 목에 거니 '내가 정말 완주를 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베를린 마라톤은 세계적 대회답게 운영도 깔끔했다. 무엇보다 완주가 끝나자마자 바로 휴대전화에 코스마다 페이스 기록이 메시지로 날아왔다. 사전에 앱을 내려받으면 내가 어디에서 어떤 속도로 달리고 있는지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국내 대회에서는 결승선을 지나면 기록증과 물품을 받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녀야 했는데 베를린 마라톤 운영국은 완주자들이 메달, 완주 기념 판초, 기록증 인쇄, 대회 기념품 등을 빠지지 않고 한 번에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독일의 대표적 언론사 슈피겔지는 특별판을 내고 모든 완주자의 영문 이름과 기록을 인쇄한 신문을 판다. 신문 배달 서비스를 신청하면 열흘 정도 뒤에 배달된다고 한다.

대회 당일에는 완주 메달만 보여주면 지하철이 공짜다. TV에서도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TV로 생중계를 한다. 엘리트 선수들 완주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마라톤 전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내게 독일인 의사가 다가와 "아 유 오케이(Are you OK?)"라고 물으며 내 손을 잡아줬는데 너무 고마워서 나도 그의 손을 힘껏 잡아줬다. '이 사람이야말로 지금 내 심정을 제일 잘 알아주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승선에 다다른 마라톤 완주자들의 심정이 어떤 것일까 상상해 보곤 했는데 내가 그걸 해내다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서울에서 같이 온 친구는 4시간대로 완주했는데 '중도 포기' 운운했던 나의 완주 소식에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라톤 완주를 한번 해보면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그까이꺼' 하는 생각이 든다. 완주 이후 삶은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로 나뉜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포기하지 말라' '힘내라' '긍정적으로 살아라' 같은 말들이 머리가 아닌 몸속 세포에 새겨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라톤 완주 후 메달을 목에 건 필자의 모습. [베를린=허문명 기자]

왜 달리는가

거의 여섯 시간을 달리며 나는 마라톤이 명상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몸은 달리지만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파도처럼 일었다가 사라졌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러다 보면 정신이 텅 비는 경험을 한다"고 했지만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며 '생각의 닻을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내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의식하지 않고 내버려둔 내 무의식에 잠재된 기억과 논리가 완강하게 떠오르고 사라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몸 안에서 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35㎞를 달릴 즈음에는 전혀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흐르는 경험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비워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도 지나갔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자연스레 걷히면서 '본질'과 맞닿는 경험이었다.

함께 뛴 한국인들에게 "왜 달리느냐"고 물었다. 각자 이유는 조금씩 달랐다. 어떤 사람은 그저 즐거워서, 어떤 사람은 건강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출발선에 설 때마다 가슴이 뛰는 것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에게 "당신의 인생에 마라톤은 어떤 것인가"하고 물으면 대동소이한 답변들이 나왔다.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삶의 활력과 자신감이 생겨 행복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들의 말을 가감 없이 옮겨본다.


"오랜 기간 아내와 며느리 엄마의 역할로만 살다가 우울하고 힘들었다.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는데 어느덧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좌절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러다 허리디스크가 터졌다. 의사는 수술할 단계는 아니라고 했지만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병원 쇼핑을 시작했다. 더 강한 진통제를 놓아주는 병원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한 의사가 '운동을 하라'고 했다. 하루에 20분이라도 걷거나 가볍게 뛰라고 했다. 운동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하자 허리를 고치려면 그렇게 하라는 말에 다음 날부터 밖으로 나갔다. 남편이 조기 축구할 때 입던 반바지를 입고 집에서 굴러다니는 낡은 운동화로 무조건 집 밖으로 나선 게 러닝의 시작이었다.

한두 달 걷고 뛰기 시작하니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몸이 가벼워진다는 느낌은 물론 무엇보다 허리 통증이 차츰 사라졌다. 본격적인 마라톤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뛰기'에 미쳤다. 춘천 마라톤 대회에 처음으로 혼자 풀코스를 신청했다. 부산에서 올라와 춘천 찜질방에서 하루 자고 네 시간대 주파에 성공했다. 피니시 라인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 나도 할 수 있는 게 있구나. 나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구나.

자연스럽게 해외 마라톤 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보스턴, 뉴욕, 런던, 시카고, 베를린, 도쿄가 6대 메이저 마라톤대회라는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보스턴 마라톤 참가였다. 이전까지 나는 꿈이 없었다. 여행 경비도 참가비도 만만치 않아 선뜻 나설 형편은 아니었지만 '반드시 간다'는 확신을 가졌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변 아줌마들은 '무슨 미친 짓이냐'고 했다.

꿈은 이뤄진다고 했던가. 돈이 모아졌고 참가해서 네 시간대 완주에 성공했다. 나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 이전과 이후가 달라졌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졌고 그때부터 일을 찾아 나섰다.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요식업을 생각했고, 마침 코로나로 임대 물건들이 싸게 나와서 계약을 했고 식당을 열었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휴일도 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이었다. 울면서 일했는데 마라톤을 쉬지 않았다. 이제 가게도 안정을 찾아 2호점을 알아볼 정도다.

마라톤을 하면서 원래 예민하던 성격도 원만해졌다. 뛰고 나면 몸에 감사한다. 내 다리에, 심장에 수고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엄마를 자랑스러워한다. 직장에 들어갈 때 자기소개에 엄마를 마라토너라고 소개한다."
- 50대 후반 여성


"심장부정맥으로 늘 조마조마한 인생을 살았다. 남편이 마라톤을 먼저 시작했다. 행사장에 차로 데려다주다가 어느 틈에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 때 동아마라톤 대회 열기에 감동해 시작했다. '몸도 약한 내가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지금은 약도 끊었다. 세계 6대 대회 마라톤 완주를 향해 남편과 연습을 시작했고, 지난해 베를린 마라톤을 끝으로 꿈을 이루는가 싶었다. 그런데 부상으로 못 뛰었다가 이번에 다시 나와 성공했다. 마라톤으로 이룬 성취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인간 몸에 한계는 없다는 것을 나는 내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앞날에 대한 불안과 걱정, 두려움도 사라졌다. 최근에 제주에서 열린 4일 연속 매일 풀코스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다시 확인했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 60대 중반 여성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어느 날 심하게 오십견이 와서 운동을 시작했다. 혼자서 100대 명산 완주와 러닝을 시작했다. 이번에 베를린 마라톤 완주로 6대 대회를 모두 거쳤다. 보스턴 마라톤에 참석했을 때가 기억이 난다. 두 발 없는 장애인들이 의족을 신고 뛰는 모습, 키가 기형적으로 작은 난쟁이 마라토너도 즐겁게 뛰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뛰는 것처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그때 이후로 내 입에서는 '감사'가 절로 나왔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가졌는데 감사함을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라톤 이후 나는 내 몸에 내 정신에 '감사, 감사'를 되뇌며 산다. 그러니 일도 잘 풀리고 인간관계도 좋아졌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대단하다고 하니까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은퇴 우울증이란 것도 없다. 매일 뛸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나는 매일 눈뜨면 집 밖으로 나가 뛰고 걷는다. 행복하다." 
‌- 60대 초반 여성


"이제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인간관계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뛰었다. 뛰기 전에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도 뛰고 나면 다 이해가 됐다. 내 마음속에 죽였다 살렸다를 반복하면서 한두 시간 뛰고 오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미워하는 마음도 사라졌다. 환갑 기념으로 이번에 베를린 마라톤에 왔다. 매년 한 차례 해외 마라톤에 참가하면서 머릿속에 있는 잡념이나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 
‌- 60대 초반 남성

마라톤은 인생과 닮았다

이번에 한국에서 온 사람 가운데 60대 이상 시니어가 많았다. 왜 시니어들이 마라톤에 집중할까. 나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인내심'이었다. 오랜 시간 산전수전을 겪어오며 견디는 힘이 늘어난 것 아닐까.

흔히 마라톤을 옛날 인류의 사냥 본능에서 찾곤 하는데 실제로 버몬트 주립대학교 생물학과 베른트 하인리히 교수도 그 옛날 원시인들의 사냥 전략은 속도가 아니라 인내심이라고 했다. 하인리히 교수는 인간이 전체 동물 무리에서 한 마리만 표적으로 삼아 그 동물을 여러 시간 혹은 여러 날 집중적으로 추적함으로써 인지 능력이 발달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마라톤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뛰기 시작하면 달라진다. 생각과 몸이 달라지고 그리하여 삶이 달라진다. 마라톤은 한계를 넘을 수 있다는 성취감도 안겨주지만, 마땅히 다다를 곳에 온다는 삶의 진리도 깨닫게 해준다. 여러모로 인생과 닮았다. 어떻든 나는 이제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설레는 일이다.

베를린=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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