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㊴1994년 KS 1차전…김선진의 연장전 끝내기홈런 스토리

“나는 우리 선수들을 믿는다. 시즌 중 13승5패로 압도적인 우위를 보인 것이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있다.”
-LG 트윈스 이광환 감독
“우리는 플레이오프를 쉽게 통과했고 LG는 오랫동안 실전을 치르지 않아 경기감각에서 우리가 앞선다.”
-태평양 돌핀스 정동진 감독.
1994년 한국시리즈는 KBO 역사상 최초 ‘지하철 시리즈’로 불렸다. 서울의 LG 트윈스와 인천의 태평양 돌핀스가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했기 때문이다.
팬들은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역과 인천 도원역 사이를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응원을 할 수 있게 됐다.
혹자는 버스나 승용차로 경인고속도로를 오가면서 한국시리즈를 치르기 때문에 ‘경인선 시리즈’라고도 했다.
양 팀 사령탑은 야구계의 소문난 젠틀맨. 하지만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말펀치를 주고받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정동진 감독은 “우리는 선수들이 부담을 느낄까봐 합숙훈련도 안 했다. 저쪽(LG)은 합숙훈련을 했다는 걸 보니 오히려 부담감이 큰 것 같다”며 선제펀치를 날렸다.
이광환 감독은 “태평양은 선발투수 예고를 안 하는데 우리만 하는 것은 손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즌 때처럼 우리 나름대로의 야구로 최선을 다하겠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페넌트레이스와 다른 태평양의 마운드 운영법을 에둘러 꼬집었다. LG는 정공법으로 나가도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정동진 감독은 1946년생, 이광환 감독은 1948년생. 대구 출신으로 대구중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온화한 인품으로 선수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덕장들이었다.
둘 다 전년도 해임을 각오했던 상황에서 살아나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랐다는 공통점도 있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39화는 LG 트윈스의 가장 찬란했던 시대 1994년 한국시리즈 스토리다. 이번 편에서는 한국시리즈를 앞둔 분위기와 승부의 분수령이 된 1차전 이야기를 싣는다.

◆사상 최초 ‘지하철시리즈’ & ‘경인선시리즈’
태평양은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상대로 단 한 판도 내주지 않고 3승무패로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랐다. 페넌트레이스 2위 팀의 저력을 발휘했다.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로 이어진 굴곡진 인천야구사에서 프로야구 출범 13년만에 처음으로 받아 본 한국시리즈 초청장. ‘만년 꼴찌팀’이라는 조롱을 견뎌온 한 맺힌 인천 팬들에겐 그 자체만으로도 꿈만 같았다.
반면 LG는 1990년 우승 이후 4년 만에 다시 밟는 한국시리즈 무대였다. 시즌 전 전문가들은 LG를 두고 가을야구 진출이 어려운 5위권 전력으로 평가했지만 ‘신바람 야구’로 돌풍을 일으키며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했다. 4월 26일 선두로 나선 뒤 정규시즌을 마칠 때까지 153일간 단 하루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객관적인 전력은 분명 LG의 우위. 시즌 81승45패(승률 0.643)로 2위 태평양(68승55패, 승률 0.552)에 무려 11.5게임차나 앞섰다. 팀타율(0.282) 1위, 팀평균자책점(3.14) 1위 등 그해 투타 밸런스가 가장 완벽한 팀이었다. 더군다나 상대전적에서 13승5패로 태평양을 압도했다.

이런 전력과는 별개로 양 팀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대결 구도와 스토리가 풍부했다.
우선 태평양에는 LG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으로 활약하다 1991년 말 태평양으로 무상 트레이드된 '그라운드의 여우' 김재박이 은퇴 후 수석코치로 있었다.
LG 김명성 투수코치는 1986년 청보 시절부터 1988년 태평양 시절까지 인천에서 수석코치와 투수코치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여기에 1992년 시즌 도중 맞트레이드된 박준태와 윤덕규가 주전 외야수로서 친정팀을 겨냥한다는 점도 호사가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소재였다.
LG는 이상훈(18승)~김태원(16승)~정삼흠(15)에다 신인 인현배(10승)까지 구단 역사상 최초로 4명의 10승 투수를 배출했다. 그것도 KBO 역사상 최초로 4명이 선발승으로만 이룬 성과였다.
태평양 역시 최창호(12승)~김홍집(12승)~안병원(11승)에다 그해 신인 최다승이자 팀 내 최다승을 올린 최상덕(13승)까지 4명의 10승 투수를 보유했다.
마무리투수 대결도 흥미로웠다. LG 김용수는 1994년까지 KBO 역대 개인통산 최다 세이브(151세이브) 신기록을 이어가는 특급 소방수였고, 태평양 정명원은 그해 KBO 한 시즌 최다 세이브(40)와 세이브포인트(44) 신기록을 작성하면서 최고 클로저로 급부상했다.
안방마님은 이름도 비슷한 김동수(LG)와 김동기(태평양). 둘 다 공격력까지 갖춘 포수들이었다.
또한 LG 한대화와 태평양 김용국은 각각 해태와 삼성에서 트레이드로 영입된 베테랑 3루수였다. 한대화는 7번째, 김용국은 5번째 한국시리즈 무대로 큰 경기 경험이 많았다.
LG와 태평양이 그해 기대 이상의 돌풍을 일으킨 데에는 신인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LG에서는 류지현(당시 등록명 유지현) 서용빈 김재현 삼총사와 투수 인현배가 맹활약했다면, 태평양 역시 투수 최상덕과 좌타자 이숭용, ‘좌투수 킬러’ 하득인 등 신인들이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사상 최초 대통령의 KS 시구가 빚은 해프닝
1994년 10월 18일. 화요일이었다. 오후 6시 잠실구장에서 한국시리즈 1차전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국시리즈 시구자는 언제나 관심의 초점. 하지만 KBO 관계자는 며칠 전부터 1차전 한국시리즈 시구자에 대해 궁금해하는 기자들에게 “아무도 예상 못한 분이 나온다”고만 모호하게 답변했다. 그러더니 1차전 하루 전 “이민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시구를 할 예정”이라고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뿌렸다.
하지만 LG 구단 관계자들과 잠실구장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약 일주일 전부터 이상한 분위기를 조금씩 감지했다. 경기 당일 오전에는 경호원과 경호견들이 대거 나타나 잠실구장 안팎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문체부 장관의 시구치고는 삼엄한 경비였다.

“LG 선수단은 1994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광장동 워커힐호텔에서 합숙훈련을 하고 있었어요. 1차전 하는 날엔 식전 행사도 많아 선수단이 오후 1시반쯤 잠실야구장에 미리 도착했죠. 그때부터 경비가 삼엄하더라고요. 선수들이 평소와 달리 이런저런 가방 검사까지 다 받고 나서야 잠실구장에 들어가 몸을 풀 수 있었어요. 일부 선수는 검사를 받느라 훈련에 늦어지기도 했죠.”
민경삼 전 SSG 대표이사의 회상이다. 그는 1992년 LG 트윈스에서 현역선수 유니폼을 벗은 뒤 프런트 주무(매니저)로 변신해 선수단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리가 났어요. 홈팀 선수들은 훈련을 하고 보통 경기 1시간 반 전에 간단한 식사를 해야 하잖아요. 근데 식사를 실은 차량이 구장 앞에 도착했지만 구장 안으로 식사 반입이 안 된다는 거예요. 식당에는 미리 준비해 둔 바나나 등 과일과 우유 등 간단한 요깃거리밖에 없었거든요. 선수들이 바나나만 까먹고 한국시리즈 1차전 개막 행사에 참석하러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후 5시20분 염광여상 고적대의 퍼레이드와 한국에어로빅협회 회원 100명의 에어로빅 시범으로 화려한 식전행사의 막이 올랐다.
양 팀 선수단 소개와 애국가 제창이 이어진 뒤 대망의 1차전이 시작될 분위기. 선공을 펼치는 태평양 선수들은 3루쪽 덕아웃으로 철수하고, LG 선발 라인업에 든 선수들은 수비를 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로 달려나갔다.
이윽고 시구자가 나타났다. 50여 명의 경호원과 KBO 관계자들이 함께 등장했다.
시구 주인공은 바로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KBO 역사상 대통령이 프로야구 경기에서 시구를 하는 것은 1982년 원년 개막전 전두환 대통령에 이어 역대 두 번째. 한국시리즈 시구로는 사상 최초였다.
야구 명문 경남고 출신의 김영삼 대통령은 야구 매니아였다. 소싯적 추억을 되살리며 LG 포수 김동수의 미트를 향해 힘껏 공을 던졌다.
하지만 바깥쪽 높은 볼.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규석 주심은 현란하게 스트라이크 제스처를 취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1차전 LG 이상훈 선발 예고…태평양은 정민태? 김홍집?
LG 이광환 감독은 약속한 대로 1차전 하루 전에 “선발투수 이상훈”을 예고했다. ‘야생마’ 이상훈은 프로 데뷔 2년 만에 18승8패, 평균자책점 2.47을 기록해 해태 조계현과 공동 다승왕에 오르며 전성기를 열기 시작했다. LG 구단 역사상(MBC 청룡 포함) 최초의 다승왕이었다.
이상훈은 그해 태평양전 4경기에 등판해 2승2패, 평균자책점 3.42로 평범했지만, 이광환 감독은 에이스를 내세우며 정석대로 1차전을 맞이했다.
문제는 태평양 선발투수. 태평양 정동진 감독은 페넌트레이스에서는 선발투수를 예고하는 데 동참했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예상후보는 2명이었다. 우선 2년생 좌완투수 김홍집. 12승3패(승률 0.800), 평균자책점 3.20을 기록하면서 그해 승률왕에 올랐을 정도로 가장 안정적인 투수였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8이닝 3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한 3년생 우완 정민태도 계산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정민태는 정규시즌에서는 부상 등의 여파로 8승9패, 평균자책점 3.72에 머물렀지만 후반기부터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결국 1차전 라인업이 교환된 뒤 태평양 선발투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홍집이었다.
김홍집은 그해 LG전 2경기에 등판했지만 1승1패, 평균자책점 5.84(12.1이닝 8자책점)으로 부진했다. 하지만 정동진 감독은 LG에 좌타자가 많다는 점과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김홍집이 5.1이닝 1자책점으로 호투한 부분을 생각했다.
이로써 1994년 다승왕 이상훈과 승률왕 김홍집의 동기생 좌완 라이벌 선발 매치업이 성사됐다.
김홍집은 단국대 2학 시절부터 국가대표로 발탁될 정도로 고려대 이상훈보다 먼저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상훈은 대학 4학년 춘계대회 성균관대전에서 ‘14연속타자 탈삼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최대어 투수로 급부상했다.
그러자 김홍집은 후반기에 30이닝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며 이상훈과 자존심 싸움을 펼쳤다.
1993년 LG 1차지명을 받은 이상훈은 역대 최고 계약금인 1억8800만원을 받았고, 태평양 김홍집은 1억2000만원에 사인했다.
김홍집은 신인 첫해인 1993년 6월 20일 LG전에서 연장 13회 완투승을 올린 바 있다.
당시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마운드에서 LG 덕아웃을 보니 이상훈이 내가 던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어 끝까지 던져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고 털어놨다. 그만큼 ‘이상훈에게는 지지 않겠다’는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때까지 둘의 프로무대 선발 맞대결은 딱 한 차례. 1994년 6월 10일 잠실에서 맞붙어 김홍집(7.1이닝 3실점)이 이상훈(7.2이닝 5실점)을 이기며 승리를 따냈다.

◆1-1 일진일퇴…8회 1사만루 위기 김용수가 막았다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양 팀의 선발 라인업은 다음과 같았다.

LG는 페넌트레이스의 라인업에서 약간의 변화를 줬다.
보통 2번타순에 김재현, 3번타순에 서용빈이 포진했지만,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김재현을 3번으로 이동시키고, 2번에 최훈재(지명타자)를 넣은 것이 달라진 포인트였다. 연습경기에서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던 서용빈은 7번에 배치됐다.
선발투수 이상훈과 김홍집은 라이벌답게 초반부터 팽팽한 투수전을 펼쳤다. 그런데 7번타순으로 내려간 서용빈이 균형을 깨는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3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좌월 2루타를 날리면서 찬스를 만들었다.
김동수의 투수 앞 희생번트와 박준태의 볼넷으로 만들어진 1사 1·3루에서 유지현이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날려 LG가 선취점을 뽑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LG 타선은 김홍집의 역투에 막혀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이상훈은 6회까지 단 3안타만 내준 채 8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으며 1-0 리드를 지켜나갔다.
그러다 결국 7회초 1실점하며 동점이 됐다.
선두타자 김동기의 타구가 묘했다. 원바운드로 투수 키를 넘겨 2루를 향했다. 이때 2루수 박종호가 러닝스로를 하기 위해 백핸드캐치를 시도했지만 공이 글러브 밑으로 빠져나갔다. 그 사이 김동기는 2루까지 내달렸다. 공식기록으로는 중견수 앞 2루타.
이후 ‘좌투수 킬러’ 하득인이 이상훈을 상대로 좌전 적시타를 날리면서 1-1 동점이 되고 말았다.
마운드를 먼저 내려간 쪽은 이상훈이었다. 8회초 선두타자 김성갑을 볼넷으로 내보낸 뒤 김갑중의 희생번트, 윤덕규의 중전안타로 1사 1·3루가 됐다. 투구수는 127개.
불펜에서는 이미 소방수 김용수도 몸을 풀고 있었지만 이광환 감독은 일단 우완 셋업맨 차동철을 먼저 선택했다. 그런데 여기서 스트레이트 볼넷. 1사 만루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더군다나 타자는 앞 타석에서 동점 득점을 올린 5번타자 김동기였다.
이 감독은 결국 아껴둔 김용수를 호출했다. 김홍집의 컨디션을 볼 때 여기서 실점하면 사실상 패색이 짙어진다는 판단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떨렸어요. 남들은 제가 마운드에서 무표정하니까 긴장도 하지 않고 위기 상황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줄 알지만 사실 투수는 늘 긴장해요. 그땐 저도 더 떨리더라고요. 점수를 주면 거의 진다고 봤거든요.”
김용수의 회상이다. 1990년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고, KBO 최다 세이브 신기록 행진을 이어갈 정도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도 그 순간만큼은 평정심을 찾기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동점에 1사 만루라 무조건 막아야 했어요. 2스트라이크를 먼저 잡아놓고 굉장히 신중하게 던졌던 기억이 나요. 유인구를 연속 3개 던졌는데 김동기 선수가 안 속더라고요. 그 이후 연속 파울 2개가 나왔어요. 3볼-2스트라이크니까 여기서는 무조건 승부하는 수밖에 없었죠. 슬라이더를 던졌어요.”
8구째 승부구였다. 슬라이더가 바깥쪽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몸쪽에서 스트라이크존으로 휘어들어갔다.
김동기의 방망이가 매섭게 돌았다. 타구는 배트 중심에 맞았지만 3루수 한대화 정면 땅볼. 2루수 박종호~1루수 서용빈으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가 완성됐다,
위기의 8회가 순식간에 삭제됐다. 1-1 동점이 그대로 이어졌다.
어쩌면 이 장면은 1차전뿐만 아니라 1994년 한국시리즈 전체 판도를 좌우하는 결정적 모멘트가 됐는지 모른다.

◆연장 11회말 ‘개털’ 김선진의 KS 최초 끝내기 홈런
8회말 그리고 9회초, 9회말이 연속 삼자범퇴로 사라졌다.
8회 위기를 벗어난 김용수는 거침없는 투구를 이어갔고, 김홍집은 9회까지 홀로 123구를 던지며 3안타 1실점의 호투를 이어갔다.
한국시리즈가 첫 판부터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LG에서는 김용수가 계속 마운드에 올랐다. 그런데 태평양은 최고 소방수 정명원 카드가 남아 있었지만 김홍집으로 밀어붙였다.
김용수는 연장 10회초와 11회초에도 연속 삼자범퇴로 태평양 타선을 완벽하게 막았다.
연장 11회말. 선두타자 유지현이 1루수 땅볼로 물러났다.
팽팽한 공기가 잠실 밤하늘을 휘감았다. 1-1 살얼음판 승부가 언제 끝날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연장 15회 이닝제한까지 갈지도 모를 분위기였다.
타석에는 2번타자 김선진이 들어섰다. 6회말 최훈재 대주자로 나간 뒤 8회말 타석에서 유격수 땅볼에 그친 선수였다. 누구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여기서 김홍집의 초구 슬라이더가 우타자 김선진 몸쪽으로 휘어져 들어왔다.
“딱!”
경쾌한 타격음이 터졌다. 모두가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3만500명의 만원관중이 마른 침을 삼키며 타구의 궤적을 뒤쫓았다.
경기 전 식사가 야구장으로 반입되지 못하는 바람에 바나나만 먹고 때린 김선진의 타구는 바나나처럼 날렵한 포물선을 그리며 좌익수 뒤 외야 관중석을 향해 날아갔다.
“초구! 쳤습니다. 큽니다. 쭉~쭉 뻗습니다. 호옴~런! 홈런! 김선진! 굿바이!
경기 끝났습니다!”
KBS 표영준 캐스터의 흥분된 목소리. 2-1 승리를 확정하는 끝내기 홈런이었다.
김선진은 1루 근처에서 김용달 코치와 진하게 포옹을 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헬멧을 벗고 “김선진! 김선진!”을 연호하는 1루쪽 팬들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그라운드를 질주했다.
일제히 덕아웃을 박차고 나간 LG 선수들은 김선진이 홈플레이트를 밟자 서로 끌어안고 기뻐했다.
이는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초의 끝내기 홈런이었다. 그만큼 극적이었다.

김선진은 [엘팬알백] ㉝편에서 설명했듯이 1993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미숙한 주루플레이로 홈에서 아웃돼 역적(?)이 됐다. LG가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면서 시즌 후 ‘살생부’ 명단에 올라 방출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그해 겨울 LG 구단 홍보팀 여직원과 결혼이 예정돼 있었기에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만약 그때 김선진이 방출됐더라면? 1994년 한국시리즈의 향방은 어떻게 흘러갔을지 아무도 모른다. 순간의 선택이 LG 구단에 빛나는 역사를 만들었다.
“김홍집 투수는 당시 투구 습관이 있었어요. 글러브 모양 끝이 위로 올라가면 슬라이더를 던진다는 전력분석팀의 리포트가 있었습니다. 김홍집이 와인드업을 하고 던지려고 할 때 글러브 모양이 딱 제 눈에 들어왔어요.”
현재 동원대(경기도 광주시 소재)에서 타격코치를 하고 있는 김선진은 “아직도 당시 상황이 생생하다”며 그날밤의 추억을 떠올렸다.
“제가 홈런타자는 아니니까 정확히 맞히자는 생각으로 쳤는데 그게 홈런이 되더라고요. 사실 그날 김홍집 투수 볼이 워낙 좋았어요. 초반 구위라면 제가 슬라이더를 알고 쳤어도 홈런 타구가 나오지 않았을지 몰라요. 투구수가 많아지다 보니 공에 힘이 떨어졌고, 제가 그렇게 극적인 홈런을 칠 수 있었죠.”

김선진은 그해 페넌트레이스에서 홈런이 단 1개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 역사상 가장 찬란한 홈런을 터뜨렸다.
그의 별명은 ‘개털’. 룸메이트 박흥식 선배가 지어준 별명이다. 어느날 잠을 자다 김선진이 “난 개털이야”라며 잠꼬대를 했고, 그걸 들은 박흥식이 그때부터 “개털”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개털’ 김선진은 1994년 1차전에서 바나나만 먹고도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날렸다. 그러면서 '개털'이라는 별명도 ‘용털’로 바뀌었다.
그 홈런이 아니었다면 1994년 한국시리즈 이후 다시 방출 위기에 몰렸을지 모른다. LG의 우승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 한 방으로 김선진은 2000년까지 자신의 선수생명을 6년 더 연장시켰다.

LG 김용수는 3.2이닝 4탈삼진 무실점의 완벽한 투구로 승리투수가 됐다. 1990년 한국시리즈 1, 4차전 승리투수가 된 뒤 4년 만에 거둔 한국시리즈 3번째 승리였다.
김선진의 홈런이 아니었다면 김용수의 투구수는 더 늘어나 향후 등판 스케줄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한편 김홍집은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김선진에게 홈런을 맞은 공은 그날의 141번째 공. ‘투혼의 141구’는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태평양이 패하자 정동진 감독을 향해 “왜 정명원으로 바꿔주지 않았느냐”는 성토가 이어졌다. 정 감독은 “10회까지 김홍집 구위가 여전히 좋아서 밀어붙였다”는 답변을 한 채 자리를 떴다.
한국시리즈 2차전은 10월 19일 오후 6시 잠실구장에서 펼쳐지게 됐다. 1차전에서 기선을 제압한 LG는 2차전 선발투수로 ‘태평양 킬러’ 정삼흠을 예고했다.
[엘팬알백] ㊵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