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디자인계의 걸 크러쉬 아이콘, 아일린 그레이 #2
그 시절에 어떻게 저런 가구를 만들었을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강철관 소파와 테이블. 거기다 이 디자인 걸작을 탄생시킨 이들이 여성이었다고? 아일린 그레이와 샤를로트 페리앙. 혁명 같았던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20세기 디자인이 한눈에 잡힌다.
20세기 초반 디자인과 건축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두 명의 여성 선구자가 있었으니 바로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와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였지만 남성 중심의 풍토 속에서 꿋꿋한 행보로 빛나는 업적을 남긴 두 사람. 25년의 연령 차이가 나기에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려우나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교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태생적 환경과 성격 작업 방식 활동 당시의 평가 그리고 건축&디자인계 거물 르 코르뷔지에와의 인연(또는 악연). 많은 점에서 달랐으나 공통점 역시 확실했던 아일린 그레이와 샤를로트 페리앙의 인생을 소개한다.
아일린 그레이 불운했던 모더니즘의 대모
모더니즘 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아일린 그레이는 놀랍게도(!) 19세기 사람이다. 1878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혈통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1976년 1세기에서 딱 2년 모자란 98세에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
런던과 파리에서 예술 교육을 받았던 아일린 그레이는 옻칠 스크린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다가 가구 디자인과 건축으로 영역을 넓혔으며 주거 및 라이프스타일 개념 확장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옻칠 작업과 카펫 등에서는 전통적인 공예 기법을 고수했으나 항상 새로운 예술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야수파 큐비즘 데 스틸의 원칙을 자신의 아이디어에 접목시켰다. 강철관 알루미늄 셀룰로이드 코크 등의 신소재 도입에도 적극적. 출신 배경과 다르게 고전적 유산과 결별한 듯한 파격적인 인테리어 새로운 콘셉트의 모더니즘 가구를 선보였다. 그들만의 리그가 뚜렷한 남성들과 달리 독자적인 행보를 걸었기에 더욱 개성적이고 기발한 기획력과 창조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얻었다.
지금은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 로에 마르셀 브로이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20세기 초반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손꼽히지만 한창 커리어를 쌓아가던 시기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당시에는 여성 창작자의 입지가 제한적이었던 시기였고 세계대전이라는 파란도 두 차례나 겪었다. 한편으로는 르 코르뷔지에의 질투와 미움을 사서 업계에서 매장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는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했으나 실제로 지은 것은 두 채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연인이었던 건축 평론가 장 바도비치(Jean Badovici)의 조언을 받으며 완성한 ‘E-1027’이다(두 사람의 이니셜을 표현한 이름이기도 하다). 남프랑스 해변에 자리한 ‘E-1027’를 높이 평가한 르 코르뷔지에는 이곳을 자주 찾아왔는데 주인이 없는 사이에 순백색 벽에 프레스코화를 멋대로 그려놓았다(한두 점이 아니라 7~8점이나 되었다고!) 이에 그레이가 격노하자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권력을 휘둘러 ‘E-1027’이 그녀의 작품이 아니라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갔다고 한다. 시대적 한계도 한계였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었던 아일린 그레이의 이름은 서서히 소멸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실내 디자인을 맡았던 장 두셰의 아파트에 있는 물건들이 한 옥션을 통해 알려졌고 1968년 평론가 조셉 리크워트로부터 디자인 세계를 재조명받았다. 그 결과 영국의 아람Aram 디자인이 ‘비벤덤 Bibendum 체어’와 ‘E-1027’ 테이블을 재생산하기 시작했고 이후 아람을 인수한 독일의 클라시콘Classicon에서 지금도 제작 판매하고 있다. 비록 사후 3년이 지났으나 1979년에 ‘E-1027’ 역시 그녀의 설계임을 입증하는 논문이 발표되어 비로소 명예를 되찾았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훼손되었던 이곳은 2015년에 복원이 완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어 매년 1만 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이하는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이 전설의 빌라를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아일린 그레이: E-1027의 비밀(원제: Gray Matters)>도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아일린 그레이의 역작인 빌라와 같은 이름의 클래시콘 ‘E-1027’ 테이블. 크롬 관과 유리를 활용한 지극히 현대적인 디자인이 돋보인다. 고리에 연결된 핀을 이용해 높낮이 조절도 가능하다.
20세기 초반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비벤덤 체어’. 지극히 현대적인 금속 프레임과 미쉐린 타이어맨을 닮은 큼직한 본체가 비정형적 조화가 독특한 느낌을 준다.
EDITOR 정성진(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