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개구리, 윤리적 각성으로 인간이 되다

한겨레 2024. 9. 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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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333333">[한겨레S]</font>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font color="#333333">아무도 없는 숲속에서</font>

20년 간격 두 사건의 이중 플롯
복수·고해 통해 인간 된 피해자들

‘원수의 어머니도 내 어머니’ 마음
무관심 세태, 연대와 회복 일깨워
넷플릭스 제공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이 무슨 선문답인가. 18세기 영국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말하면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되물었다. 존재와 지각에 관한 질문인데, 이를 논하자면 현상학을 넘어 양자론까지 논의가 넓어지지만, 범박하게 풀자면 ‘듣는 귀가 없다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도로 갈음할 수 있다. 왜 소리가 존재하지 않냐고? ‘공기의 진동’이야 존재하지만, 그것을 ‘소리’로 느낀다는 것은 귀가 있어야 가능하다. 심지어 ‘쿵’ 소리라고? 그것은 뇌의 존재를 전제한다. 인지적 주체, 언어화된 주체, 사건에 감응하는 주체 말이다.

일반적 스릴러와 다른 보법

넷플릭스 제공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넷플릭스)는 매회 저 선문답을 각 인물의 목소리로 들려주며 시작한다. 지금부터 ‘사건에 감응하는 주체’에 관해 이야기하겠노라는 선언이다. 타이틀 로고도 노골적이다. 제목의 글자가 감았던 눈을 뜨는 모습을 형상화해, ‘주체의 각성’을 상징한다. 요컨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에 ‘감응하는 주체’로 ‘감았던 눈(외면)을 뜨겠다(직면)’는 뜻 되시겠다. 영어 제목은 ‘The Frog’(더 프로그)다. 대사로 강조되듯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는 피해자를 상징한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이유도 모른 채 삶이 부서지는 개구리의 억울함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아니다. 오히려 개구리가 윤리적 각성을 통해 인간이 되는 드라마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김윤석, 윤계상, 고민시, 이정은 등 초호화 배역진과 ‘부부의 세계’의 모완일 감독 작품이다. 제이티비시(JTBC) 신인작가 공모전에서 뽑힌 손호영 작가의 극본은 독창적인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서사의 진행이 느리고, 상상을 통해 심리적 긴장을 끌어올리는 등 일반적인 스릴러와 보법이 다르다. 기존 장르에 길든 관객은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데, 모완일 감독은 미장센과 카메라 워크, 잘게 쪼갠 컷과 정교한 편집, 아름다운 풍광과 과장된 음악으로 이를 상쇄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플롯이다. 드라마는 약 20년을 사이에 둔 두 사건을 이중 플롯으로 겹쳐놓는다. 평행하게 흘러가던 두 사건이 6회에서 만난다. 친절한 드라마는 아니다. 과거 장면을 표시하는 자막이 없기에 눈썰미가 없는 관객은 시간의 간극을 알아채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유일한 인물인 경찰 윤보민(하윤경/이정은)의 2인1역이 이름 외에 연결점이 없다는 점도 관객의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이다.

이런 이유로 빈번한 교차편집에 피로감을 호소하며 도중하차하는 관객이 있다. 끝까지 보지 않으면, ‘숙박업계의 극단적인 진상 손님 두 사례 보고’인가 싶다. 아니, 이처럼 걸출한 배우들로 고작 ‘숙박업계 잔혹담’을 찍었단 말인가? 혹은 끝까지 보고 나서도, 두 사건의 연결점이 느슨하고 필연성이 부족하다며 비판한다. ‘왜 굳이 별 상관도 없는 20년 전 사건을 교차편집으로 오가며 정신없게 만드느냐?’ 이는 매우 참혹한 오해이고, 드라마 전체에 대한 몰이해에 해당하므로, 설명이 필요하다.

‘너도 나랑 같은 사람’ 가스라이팅

넷플릭스 제공

두 사건은 비슷하면서 대조적이고, 반면교사가 되는가 하면 변증법적으로 지양된다. 두 사건의 인물을 이어주는 것은 각성과 총이다. 한 피해자는 스스로 총을 만들어 복수하고, 또 한 피해자는 그 총 앞에서 진심으로 고해한다. 이를 통해 두 개구리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드라마는 1회에서 정확하게 두 사건을 대조적으로 포개 놓는다. 2001년 모텔, 살인자 지향철에 의해 피칠갑이 된 방과 몰려든 기자들로 떠들썩한 현장이 나온다. 그리고 곧바로 2022년 펜션의 락스로 청소된 욕실과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현장이 나온다. 그 장면에 이어 2001년 모텔이 쓸쓸히 문을 닫은 장면과, 2022년 펜션에서 친구와 함께 “펜션을 위하여~” 건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향철의 살인으로 망한 모텔의 비극을 알고 있는 펜션 주인이라면 살인 가능성이 떠올랐을 때, 일단 부인하고 싶었으리라. 더욱이 먼저 떠난 아내와의 소중한 추억이 남아 있는 공간을 살인으로 더럽히는 것을 상상하기조차 싫었으리라. 그래서 전영하(김윤석)는 살인이 의심되는 정황임에도 그냥 덮기로 한다. 그의 은폐는 죄의식으로 남았다.

넷플릭스 제공

6회 이전까지는 전영하에 상응하는 과거의 인물이 구상준(윤계상)인 양 착시를 일으켜서, 두 사건을 꿰뚫는 메시지가 모호해 보인다. 구상준은 아무것도 모른 채 돌에 맞은 개구리였다. 모든 일은 그가 ‘눈 감고’ 자는 동안에 일어났으며, 이후로도 영원히 그 시간에 갇혔다. 그는 윤리적 주체로 번민과 각성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6회에 이르러 전영하에 상응하는 과거의 인물이 구상준의 아들 구기호(찬열)임이 밝혀진다. 구기호는 보았다. 하지만 지향철이 자신의 모자를 씌워주며 ‘눈 감고 귀 막으라’라고 한 대로, 구기호는 침묵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자신의 비겁을 씻기 위해, 오랜 시간 복수를 준비한다. 셔틀짓을 위해 배낭을 메고 시간에 쫓겨 달리던 중학생 시절처럼, 총을 메고 분초를 재며 달려 마침내 지향철을 쏜다. 지향철이 씌워준 모자를 쓴 채, 지향철이 붙여준 ‘고스트’라는 별명으로 자기 존재를 상기시키며. 그의 각성과 복수를 지켜본 전영하가 그의 총을 들고 그의 모자를 쓰고, 살인자 유성아(고민시)와 직면하러 가는 장면은 완벽한 대극을 이룬다.

유성아는 나르시시스트로서 극단적인 자기중심성을 보여준다. 살인 현장을 말끔히 정돈한 유성아가 레코드판에 피를 묻힌 건 단순 실수일까. 전영하에게 살인을 암시하려고 일부러 남긴 건 아닐까. 신고하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시험한 것일지 모른다. 1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유성아는 살인 현장에 다시 나타나 애써 모른 척하는 전영하의 반응을 보고 확신한다. 전영하가 살인을 알았지만 은폐했음을. 이후 유성아는 전영하의 죄의식을 교묘하게 파고들며 ‘공범’ 운운한다. ‘너도 나랑 같은 사람’이라는 가스라이팅을 구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도덕적 결벽증에 빠지기 쉬운 순진한 약자들이 자신이 저지른 작은 실수를 먹잇감 삼아 달려드는 악당들의 피장파장 논리에 감겨 악행에 이용당하곤 한다. 텔레그램 성착취방이 한 예다.

혹자는 유성아가 왜 전영하에게 집착하는지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불평한다. 유성아는 전영하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특별한 공간인 펜션을 갖고 싶은 것이다. 펜션에서 한 살인이 완전범죄처럼 묻히자, 유성아는 추가 살인을 하는 등 공격욕이 폭주한다. 자기중심적인 유성아는 자기가 원하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이 있든 말든. 유성아는 전영하가 자신의 요구를 들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펜션을 둘러싼 영역 싸움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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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공익의 삶이 복되다’는 메시지

넷플릭스 제공

딸과 손주까지 잃을 뻔한 전영하는 “내 탓”이라며 오열한다. 시종 예리한 관찰자였던 윤보민은 “피해자로서 최선을 다하셨다. 자책하지 마시라”며 다독인다. 하지만 전영하는 개구리가 아닌 인간이 되고자 한다. 윤보민에게 시체의 존재를 알리고, 펜션으로 향한다. 유성아와 전남편 하재식의 혈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전영하는 왜 저벅저벅 들어갈까. 심지어 총을 든 하재식 앞에서, 아들 살해 공범으로 몰려 죽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전영하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변명 없이 “미안합니다”라고 말한다. “내 자식 아프고 다친 건 이렇게 괴로우면서 그 아이는 남의 아이니까….” 그는 살인을 은폐한 죄를 아이 아버지 앞에 털어놓고, 죽음을 각오한 듯 눈을 감는다. 전영하는 하재식이 쏜 총알을 맞고도, 총을 든 윤보민과 하재식 사이를 막아서며 쏘지 말라고 한다. 하재식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아버지로 역지사지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조연 한명 한명의 설정까지 신경 쓰며 주제를 전달하려 애쓴다. 용채 형님은 왜 그토록 아이와 물놀이에 진심이었을까. 나중에 보니 그만한 손자가 있었다. 자주 보지 못하는 손자 보듯 한 것이다. 구기호의 복수를 돕는 종두는 지향철과 싸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지향철 노모의 호흡기 줄이 빠지자 그걸 연결하느라 바쁘다. 원수의 어머니라도 내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세탁소 사장은 신고와 수색에 앞장서지만, 신고는 역효과가 나고 세탁소는 불타는 화를 입는다. 하지만 카페로 전업해 성공한다. 이웃에게 친절하고, 공익에도 무관심하지 않은 이가 복을 받는다는 강한 메시지의 발현이다. 드라마는 서두에 멧돼지 출몰 경고를 들려준다. 전영하의 펜션이 숲에 가장 깊숙이 있어 위험하지 않냐는 세탁소 사장의 질문에 전영하는 “멧돼지가 나타나면 우리 집만 위험하겠냐”고 답한다.

누구든 개구리가 될 수 있다. 다만 개구리에 머물 것인지, 개구리에서 인간이 될 것인지는 윤리의 영역이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는 시종 개구리에서 인간이 된 두 사람이 만나서 나눈 긴 이야기를 담담한 내레이션으로 깔고 있었다. “나만 아니면 돼” “알빠노”(알 바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하는 시대에, 연대와 회복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지를 일깨우는 윤리적 텍스트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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