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영의 생생 디자인] 월킨백과 다이소 컬러밤 그리고 스타스커피
한 때 명품시계에 대한 동경(또는 욕심)이 있었다. 어린 시절 IWC나 몽블랑 시계 등에 대한 소유욕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지만 주머니가 넉넉지 못해 잡지의 광고나 온라인의 멋진 이미지만 보며 군침을 흘렸었다.
친한 선배가 중국 출장을 다녀올 일이 있었고, 그는 감사하게도 갖고 싶어 하던 명품 브랜드 시계를 하나 사다 줬다. 물론 짝퉁이었다. 하지만 설레었다.
그 시계는 멋진 크로노그래프(스톱워치 기능이 탑재된 시계) 기능까지 있었다. “우와 형 고마워요. 대단한데, 크로노그래프까지 있네요.” 한껏 들뜬 나는 시계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역시 이쁘다”라고 감탄했다. 그리고 놀랐다. 이런!
가까이 보니 크로노그래프는 기능이 없는 그냥 그림이었다. 인쇄 자국도 살짝 밀려서 잉크가 보기 싫게 번져 있었다. 하지만 연신 선배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며칠을 자랑스럽게 손에 차고 다니며 동료들에게 자랑했었다.
삼일째 되는 날 나의 멋진 짝퉁 시계는 사망하고 말았다. 그냥 멈춘 게 아니고 시계의 분침, 초침이 사정없이 튀어나와 시계 유리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조용히 갖다 버렸다. 이후 명품 시계에 대한 미련은 없어졌다. 나에게는 그저 튼튼하고 실용적인 카시오 전자시계가 최고였다.
최근 예전 나의 짝퉁 경험담을 떠올리게 하는 재미난 소식들을 많이 접한다.
월마트의 버킨백 소식이다. 일명 '월킨백'이라고 불리는 월마트의 78달러 가방 소식이다.
남의 나라 마트에서 가방 만든 게 무슨 그리 대수냐 싶겠냐만 내용을 알고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월킨백'은 돈이 있어도 구매하지 못한다는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버킨백' 디자인을 그대로 따라 했기 때문이다.
에르메스는 명품 중에 명품으로 나에겐 매장에 들어설 엄두도 나지 않는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이다. 이 브랜드 가방 중 최소 1500만 원 정도 하는 버킨백은 70년대 프랑스의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배우·모델·싱어송라이터인 '제인 버킨'(Jane Birkin)을 위해 장 루이 뒤마가 디자인한 에르메스의 대표적인 가방이다.
보통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몇 천만 원짜리 명품 백을 단돈 십여 만 원에 구매할 수 있으니 세간의 인기와 관심은 어마어마했다. 단지 가격이 싼 게 아니라 나의 예전 시계처럼 출처도 모르는 짝퉁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월마트에서 대놓고 출시를 한 제품이니…
이런 제품을 '듀프'(DUPE)라 부른다.
요즘 이른바 DUPE(듀프)가 열풍이다. 물론 DUPE(듀프)라는 단어는 핫한 키워드다.
원래 DUPE는 ‘복제'(Duplicate)의 약자로, 기존 명품이나 고가 제품을 모방한 저렴한 대체품을 의미하는데, 특히 뷰티·패션·일부 생활용품 시장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원래의 브랜드와 디자인은 비슷하지만, 재료나 기능을 저렴하게 만들어 원 브랜드가 지니고 있던 감성을 느낄수 있도록 해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저렴한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다이소에서 샤넬의 립밤과 성능이 비슷한 컬러 밤을 출시해 품절 현상까지 벌어졌다.
샤넬의 립 밤의 가격은 6만3000원, 다이소의 컬러 밤(손앤박 아티스 프레드 컬러 밤)은 단돈 3000원, 그리고 기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2025년 3월 16일 현재 다이소의 컬러 밤에 대한 리뷰는 937개로 칭찬 일색이다.
수많은 듀프들이 생겨나고 있는 요즘, 심지어 듀프만을 전문적으로 찾아주는 사이트도 있다.
인터넷 사이트 'dupe.com'은 내가 원하는 듀프 제품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이트로 원하는 제품의 URL이나 이미지를 업로드하면 유사한 제품을 찾아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DUPE 트렌드, 왜 뜨는 걸까?
대중은 대체로 DUPE를 대해 반기는 모습이다. 특히 짝퉁 소비를 하면서도 짝퉁이라는 진실은 감추고 싶어하는 기존 세대와 달리 MZ세대는 듀프 소비에 대해 적극적이며 주변 친구들에게 스스럼 없이 자랑한다.
MZ세대는 심지어 '듀프 = 스마트한 소비'로 여긴다. 대중은 왜 듀프에 열광 할까? 먼저 듀프는 짝퉁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짝퉁은 브랜드 자체를 교묘히(때로는 대놓고) 카피한다. 물론 그 품질은 당연히 떨어진다. 그로 인해 원래의 브랜드가 쌓아놓은 명성을 훼손하고 매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흔히들 언급하는 A급 짝퉁은 전문가들도 구분이 어려워 시장을 직접적으로 교란한다.
반면, 듀프는 브랜드 자체의 로고, 디자인까지 몰래 카피한 짝퉁과는 다르게 브랜드가 아닌 디자인, 감성, 전체적인 분위기를 저렴한 가격에 경험 할 수 있게 해준다. 때문에 대중들, 특히 MZ세대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구글 트랜드를 통해 살펴본 'Dupe' 검색량은 2020년도부터 지속적으로 우상향하고 있다.
듀프가 유행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연유일 것이다.
첫째: 경제적인 대체 경험(경제적 합리성)
듀프의 모델이 되는 브랜드는 대부분 명품이거나 같은 카테고리 중 고가의 제품이다. 듀프는 적게는 몇분의 일, 많게는 몇 백분의 일의 해당하는 가격을 지불하고 원래 브랜드가 지닌 감성과 디자인을 경험 할 수 있다.
때문에 극심한 경제불황을 겪고 있는 최근 듀프는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비용이 넉넉치 않은 젊은 MZ세대에게 브랜드의 명성보다는보다 가성비와 기능 중심의 소비 패턴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새로운 가치관)
과거 짝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친구가 짝퉁인걸 알면 어쩌지~'하는 걱정과 불안이였다. 뽐내며 차고 다닌 시계가 가짜인 걸 남들이 알게 된다면 망신과 비난이 따랐다. 당시 우리는 '나의 온전한 경험과 만족'보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하지만 요즘은 듀프 제품을 구매했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망신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듀프를 뽐내고, 자랑하며 스스럼 없이 이런 분위기를 받아들인다. 특히나 이런 태도의 변화는 소셜 미디어의 영향이 지대하다.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등에는 듀프를 자랑하거나 소개하는 콘텐츠들이 즐비하다. 마치 게임하듯이 듀프를 구매하고 뽐내는데, 이제는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았다고 여겨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은 왜 듀프에 열광할까?
기업이 듀프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다양하다. 듀프를 소비하는 이유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다.
첫째 - 성공 모델을 쉽게 따라갈 수 있다.
듀프의 대상체들은 명품이거나 이미 시장에서 성공한 브랜드 또는 제품이다. 대중들에게 이미 익히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갖고 싶거나 사고 싶은 것들이기 때문에 기업은 이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다. 이미 대중들 머릿속에 각인된 TOM(Top of mine = 최초 상기도) 브랜드의 이미지를 손쉽게 내 것으로 가져 올 수 있다.
좋게 표현하자면 영민한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고민 덜 하고 남의 자산을 뺏아아 오는 것이다. 손 안대고 코를 푸는 식이다.
둘째 - 실패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첫번째 이유랑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성공한 모델이기 때문에 신제품을 개발할 후발주자는 새로운 시안을 수백개씩 만들 필요도 없고, 막대한 개발비를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
미국의 엘프 뷰티(ELF)는 듀프 제품을 생산하는 화장품 회사로 포지셔닝했다. 그들은 프랑스 클리니크(Clinique)의 20달러짜리 립스틱을 5달러짜리 듀프 제품으로 내놓고, 그들의 향수 브랜드 도시어(Dossier)의 상품상세 설명서에 "조말론에서 영감을 받았음"이라고 표기했다. 엘프는 당연히 가격 때문에 클리니크나 조말론 제품을 지닐 수 없는 10대 MZ들의 화장품 가방을 점령했다. 그 덕분에 엘프의 주가는 최근 5년간 700%나 상승했다.
듀프를 생산해 내는 그들은 좋은 예술가인가? 위대한 예술가인가?
듀프에 대한 법적 규제는 모호하며 아직 인상적인 소송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에르메스 역시 월킨백에 대한 법적 대응을 아직 하지 않고 있다. 항간에 월킨백 소비자와 버킨백 소비자는 원래부터 소비 계층이 달라 에르메스 매출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젊은 MZ들이 월킨백의 소비경험을 한 후 구매력 있는 연령이 되었을 때, 월킨백 사용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버킨백을 구매할 수 있다는 기대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건수만 생기면 소송하는 천하의 에르메스가 소송을 아직까지 하고 있지 않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지금 필자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법적 모호성에서 듀프는 자유롭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디자이너로서 디자인 창작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듀프들의 디자인도 원래의 창작자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른바 가품(짝퉁)에 대해선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이는 사회적 규범보다 더 엄격한 저자권이라는 법적 권리를 통해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듀프는 아직 법적 규제를 통해 오리지널리티를 보호하기는 커녕 오히려 소비를 부추키는 새로운 문화 트랜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현상을 바라볼 때 이중적 관점을 보이고 있지 않은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듀프의 대상이 된 명품이나 그에 준하는 제품들 역시 아마도 기존의 어떤 대상을 벤치마킹하고 영감을 얻어 냈을 것이다. 하지만 듀프는 브랜드의 디자인이나 핵심이 되는 속성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닌가?
브랜드의 직접적인 상표나 디자인을 교묘히 몰래 베끼고, 그리고 아주 엉망인 품질로 만들어낸 것이 짝퉁이라면 듀프도 디자인을 내놓고 누구나 알수 있도록 베낀 게 아닌가? 비록 품질이 짝퉁처럼 엉망은 아니지만 말이다.
더구나 듀프를 만들어낼 때 원래의 창작자에게 허락을 받거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는다. 앞선 창작자의 숱한 고민의 시간과 인내의 시간에 대해 보상 없이 속된 말로 '날로 먹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저렴한 가격으로 비싼 명품을 대체하여 경험할 수 있으니 이는 불법이 아니다라고 우리가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닐까?
전쟁으로 스타벅스 커피가 철수한 모스크바에 생긴 스타스 커피 - 짝퉁이라고 비웃지만 과연 듀프는 자유로운가?
좋은 예술가는 따라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
- 파블로 피카소 -
이 의미는 예술품(또는 제품, 서비스 등)을 만들기 위해서 단순한 모방을 통해 따라하지 말고, 기존 것을 충분히 벤치마킹하고 소화해,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 시키는 것이 진정 위대한 예술가(또는 디자이너)라는 것이다.
만일 피카소가 지금의 듀프 현상을 바라본다면 참 애석해 할 것만 같다. 위대한 예술가는 드물고 좋은 예술가만 많은 지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