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를 겨눈 증오는 어디서 왔는가
2024년 9월15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겨냥한 두 번째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공화당 전당대회를 불과 이틀 앞둔 7월13일 벌어진 첫 번째 암살 미수 사건과 달리 이번엔 유혈도 활극도 없었다. 그런데도 “극단적인 분열 속에 정치적 폭력이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폭력은 증오가 낳았다. 증오는 어디서 왔는가?
해리스 지지한 테일러 스위프트
“여러분처럼 저도 오늘 밤 토론을 봤습니다. 이젠 각 후보가 여러분한테 중요한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확인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유권자로서 저는 미국을 위한 각 후보의 정책과 계획을 최대한 확인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마치 제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처럼 꾸민 내용이 그의 선거캠프 누리집에 게시됐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AI에 대한 우려와 거짓 정보 확산의 위험성을 새삼 일깨워줬습니다. 그래서 유권자로서 이번 선거에 임하는 제 입장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거짓에 맞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진실이니까요.”
2억8400여만 명의 팔로dj를 거느린 세계적 인기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9월10일 밤 소셜미디어에 고양이를 안고 있는 사진과 함께 올린 글의 일부다. 격전지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국립헌법센터에서 에이비시(ABC) 방송 주최로 열린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가 끝난 직후였다. 그는 “2024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팀 월즈에게 표를 던질 것”이라고 공개 지지를 선언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특별히 이번에 처음 투표하는 유권자들께 말씀드립니다. 투표를 위해선 유권자 등록부터 해야 합니다. 또 조기 투표에 참여하는 게 투표날 실제 투표장을 찾는 것보다 훨씬 편합니다. 유권자 등록과 조기 투표 관련 정보를 링크해놓겠습니다. 사랑과 희망을 담아, 자식 없는 캣 레이디 테일러 스위프트 드림.”
‘자식 없는 캣 레이디’는 제이디 밴스 상원의원이 ‘생물학적 자녀’가 없는 해리스 부통령을 비난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다. 스위프트의 글이 올라온 뒤 불과 24시간 만에 40만 명이 넘는 누리꾼이 그가 링크를 건 유권자 단체(vote.org) 누리집을 방문했다. 해리스 부통령으로선 “예상을 뛰어넘는 선전”이란 토론회 평가보다 스위프트의 공개 지지 선언을 훨씬 큰 정치적 자산으로 여길 만하다. 그간 스위프트에게 지지를 ‘애걸’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은 며칠간 침묵을 지키다, 9월15일 오전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나는 스위프트를 증오한다”고 썼다. 토론회의 파장은 정작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화당 허위 주장에 스프링필드엔 폭탄테러 위협
마이크 드와인 오하이오 주지사가 9월17일 이틀 연속 스프링필드를 찾았다. 대선 토론회 이후 불과 1주일 남짓 만에 무려 30여 건의 폭탄테러 협박이 줄을 잇고 있는 탓이다. 절대다수 협박의 발신지는 미국이 아니라 외국이었고, 협박은 모두 거짓말로 확인됐다. 그럼에도 스프링필드에 있는 18개 각급 학교의 출석률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에이피(AP) 통신은 “재학생이 500명인 초등학교 한 곳에선 9월17일 200여 명이 결석했다”고 전했다. 드와인 주지사는 “주 방위군이 매일 아침 스프링필드의 모든 학교를 수색해 안전 여부를 확인하고, 낮 시간대에도 각 학교 교정에 배치돼 경계 근무를 할 것”이라며 “협박에 굴하지 않고 학교는 계속 문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프링필드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오하이오주가 지역구인 트럼프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인 제이디 밴스 상원의원은 9월9일 선거 유세에서 “아이티 출신 불법 이민자들이 스프링필드에서 반려동물을 식용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내놨다. 다음날인 9월10일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 같은 곳에서 그들이 개를 먹고 있다. 고양이도 먹고 있다. 그들이 그곳 주민의 반려동물을 먹어치우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인종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토론회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지만,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토론회 직후 스프링필드에선 폭탄테러 협박이 줄을 이었고, 각급 학교와 공공기관·병원 등에 대피령이 내려졌다. 9월16일엔 스프링필드에서 약 70㎞ 떨어진 주도 콜럼버스에 자리한 주의회 의사당까지 폭탄테러 협박의 대상이 되면서 주차장 등이 폐쇄되기도 했다. 상황이 갈수록 번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밴스 상원의원은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걸까?
스프링필드는 미국 제조업의 몰락을 상징하는 이른바 ‘러스트 벨트’에 속한다. 양질의 일자리가 차고 넘치던 시절 흥청거렸던 스프링필드도 여느 러스트 벨트 도시와 마찬가지로 제조업 국외 이전 등의 직격탄을 맞았다. 한때 8만 명을 넘어섰던 인구는 현재 약 5만8천 명까지 줄었다. 그나마 현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최근 4년여 인구가 꾸준히 늘었기 때문이다. 새로 유입된 인구 절대다수는 아이티계 이주민이다. 미국 공영방송 피비에스(PBS)는 9월17일 “스프링필드에 사는 아이티계 주민은 약 1만2천 명에서 1만5천 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미국 이민국적법(INA)은 무력 분쟁이나 자연재해, 기타 안전한 귀환을 보장할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을 겪고 있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을 추방하지 않고 일정 기간 합법적으로 거주하며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하도록 규정했다. 이른바 ‘일시 보호 신분’(TPS)이다. 최소 1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2010년 1월 아이티 대지진 때도 미국 정부는 아이티인들에게 TPS를 부여한 바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첫해인 2017년 자신의 임기 안에 아이티인 약 6만 명에 대한 TPS 효력을 중단하고 추방하겠다고 을러댄 바 있다. 하지만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집권 이후 아이티인에 대한 TPS 효력을 지속적으로 연장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아이티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치달은 탓이다.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약 80%를 무장 갱단이 장악하고 있을 정도로 폭력과 혼란이 그치질 않고 있는 터다.
지지율 답보에 ‘갈라치기’ 절실한 트럼프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때도 멕시코계 이민자를 ‘성폭행범’이라고 불렀다. 집권 이후엔 아이티를 “똥통 같은 나라”라고 비하하며, “그따위 나라 출신 이민자를 더 이상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을 한 달여 앞둔 2023년 12월20일 뉴햄프셔주 선거 유세에서 “아마도 1500만에서 1600만 명 정도 될 거다. 전세계의 정신병원과 교도소에서 몰려온 그들이 미국의 피를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의 문제를 외부자의 책임으로 돌리고, 소수자와 이주민을 악마화해 지지자를 결집시키려는 특유의 ‘갈라치기’다. 대선 토론회 이후에도 해리스 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전국 단위 여론조사에서도, 오하이오주를 포함한 6개 격전지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 격차는 여전히 오차범위를 넘어서지 않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선 갈라치기가 더욱 절실한 시점이란 뜻이다.
에이피(AP) 통신은 9월17일 스프링필드시 당국자의 말을 따 “트럼프 전 대통령과 밴스 상원의원이 주장한 내용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죽은 새를 들고 가다가 경찰의 수색을 받은 사람은 콜럼버스 주민이었고, 고양이를 먹어서 적발된 20대 여성은 (스프링필드에서 약 280㎞ 떨어진) 캔턴 주민이었다”고 전했다. 앞서 공화당 소속인 롭 루 스프링필드 시장은 9월10일 기자회견을 열어 “아이티계 이주민이 반려동물이나 (오리 등) 야생동물을 먹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그런 식의 주장을 들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심정이 어떨지 인간적으로 상상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스프링필드에 사는 아이티계 이주민이 주민의 반려동물을 납치해 잡아먹는다는 주장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래전부터 해온 ‘이민자가 마약을 판다’거나 ‘이민자가 범죄의 온상’이라는 식의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인터넷 매체 복스는 9월18일 이렇게 짚었다. 이어 “이웃이 사랑하는 존재를 잡아먹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특정 집단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비하하는 건 역사적으로 해당 집단에 대한 치명적 폭력으로 귀결됐다”고 경고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공공정책)도 엇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9월16일 영국 일간 가디언에 쓴 기고문에서 이렇게 짚었다. 대선까지 불과 한 달 보름여가 남았다.
“암살 미수 사건, 증오 정치의 산물”
“분명히 말한다. 어떤 형태든 폭력이나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은 민주주의 아래서 정당화할 수 없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은 분명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일이지만, 그와 밴스 상원의원이 부추기고 있는 증오 가득한 정치의 산물이기도 하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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