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연속 꼴찌 팀 맞아?” 페퍼저축은행, 조이·시마무라 앞세워 단독 2위 질주

4시즌 연속 꼴찌를 하던 팀이 단 1년 만에 이런 변신을 보여줄 수 있을까. 페퍼저축은행 AI페퍼스의 초반 질주는 이제 더 이상 ‘반짝 돌풍’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흥국생명을 다시 한 번 잡고 2위 자리를 탈환한 순간, 이 팀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다. 홈 4전 전승, 5승 2패, 승점 13점. ‘약체’라는 꼬리표는 이미 떼어낸 지 오래다. 지금 페퍼저축은행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구조적인 성장’과 ‘위기 관리 능력’에 가깝다.

흥국생명전 승리는 그런 변화가 집약된 한 경기였다. 페퍼저축은행은 13일 광주 페퍼스타디움에서 열린 흥국생명전에서 3대1로 이기며 다시 2위로 점프했다. 이전까지 네 시즌 내내 최하위에 머물던 팀이, 통합우승 경험이 있는 흥국생명을 상대로 시즌 두 번의 맞대결을 모두 가져갔다는 사실 자체가 상징적이다. 단순히 상대의 부진을 틈탄 결과가 아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오히려 페퍼가 ‘강팀의 승리 방식’을 보여줬다. 위기에서 무너지지 않고, 승부처에서 밀어붙여 경기를 가져오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소연 감독의 말처럼 이 팀의 가장 큰 변화는 “위기 극복”이다. 흥국생명전에서도 경기 자체는 쉬운 흐름이 아니었다. 세트마다 듀스 접전, 한두 점 차 싸움이 이어졌다. 3세트에서는 20-23으로 뒤지고 있었고, 4세트에서도 18-20으로 끌려가던 순간이 있었다. 예전 페퍼였다면 흔들리다 그대로 세트를 내줬을 장면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블로킹 한두 개, 조이와 시마무라의 연속 득점이 터지면서 분위기를 확 바꿔 버린다. 감독이 말한 “승부처에서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장면들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조이-시마무라로 이어지는 ‘쌍포 시스템’이다. 84cm 높이를 자랑하는 미국 출신 아포짓 조이는 이날만 33득점을 몰아치며 팀 공격의 절대적인 1옵션 역할을 했다. 공격 점유율 40%가 넘는 볼을 받아 안으면서도 성공률을 40% 중반 이상 유지한다는 건, 상대 블로킹이 자신에게 몰려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해내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일본 국가대표 출신 미들블로커 시마무라가 25득점, 공격 성공률 69%라는 비현실적인 수치를 찍었다. 득점만 놓고 보면 사실상 ‘원-투 펀치’가 아니라 더블 에이스에 가까운 비중이다.

흥미로운 건 시마무라의 활용 방식이다. 일반적인 센터 운용이라면 블로킹과 속공 비중이 높지만, 페퍼 시스템에서 시마무라는 ‘전략형 득점원’에 가깝다. 세터가 조금 불안하게 올려도, 시마무라는 자신의 보폭과 스윙 타이밍을 스스로 맞춰서 득점으로 연결한다. 본인이 말한 것처럼 “네트 위에만 공이 있으면 공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대로 코트에서 구현된다. 그래서인지 어떤 상황에서도 세터가 시마무라 쪽에 공을 던질 수 있고, 이 선택이 공격 패턴을 단조롭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상대 블로킹의 시선을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보법이 다른 센터’가 공격 전개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 준 셈이다.

올 시즌 페퍼저축은행의 변화는 외국인 선수 두 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눈에 띄게 넓어진 선수층과 상황에 맞춘 교체 카드 사용이 함께 작동하고 있다. 이날도 그 장면이 또렷했다. 세터 박사랑이 리듬을 잃자, 장소연 감독은 주저 없이 박수빈을 투입했다. 박사랑은 스피드가 빠르고 퀵템포에 강점이 있지만, 세트가 거칠어질 때가 있다. 반대로 박수빈은 “스피드는 조금 떨어지지만 공을 세워주고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교체 투입된 뒤 조이와 시마무라를 적절히 활용하며 공격 흐름을 안정시켰고, 결국 3·4세트 승리의 숨은 키가 됐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페퍼저축은행은 이제 ‘주전 몇 명이 잘하면 이기는 팀’이 아니다. 포지션별로 1·2옵션이 존재하고, 감독이 경기 흐름에 따라 전술과 인원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는 팀이 됐다. 신인 김서영이 짧은 시간이라도 투입돼 역할을 수행하고, 박은서·임주은 등 국내 선수들이 짧은 시간 안에 자기 몫을 채워주는 그림은 과거에는 보기 어려웠던 장면이다. 이런 구조적 기반이 있으니, 조이와 시마무라의 폭발력이 팀 성적으로 직결된다.

반대로 흥국생명의 어려움은 이 대비 속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연경 은퇴 이후 팀은 여전히 ‘새 기준점’을 찾지 못한 모습이다. 레베카, 김다은, 피치가 고르게 득점을 올리긴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범실과 조직력 문제에 발목을 잡혔다. 이다현의 부상 공백으로 가운데 높이가 흔들린 것도 치명적이었다. 요시하라 감독이 경기 전 “우리 선수들이 안정감을 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3세트와 4세트의 승부처에서는 오히려 페퍼 쪽이 더 침착했다. 페퍼가 예전 흥국생명의 역할을 하고 있고, 흥국생명은 올 시즌 페퍼의 과거를 닮아 가는 듯한 역전된 그림이다.

그렇다고 해서 페퍼저축은행이 모든 과제를 다 해결한 건 아니다. 장소연 감독도 “범실이 너무 많다”고 짚었다. 특히 서브 범실이 많아지면서 스스로 흐름을 끊는 장면이 적지 않다. 감히 강서브를 요구할 것인지, 안정적인 서브를 주문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다만 지금과 같은 공격·블로킹 효율을 유지하면서 서브 리스크를 조금만 줄인다면, 페퍼의 승률은 자연스럽게 더 올라갈 여지가 충분하다.

중요한 건 이 팀이 ‘운 좋게 이기는 팀’이 아니라는 점이다. 1라운드 4승 2패, 2라운드 첫 경기 승리, 홈 4전 전승, 강팀 상대로의 승부처 집중력. 여러 지표를 종합하면, 페퍼저축은행의 현재 위치는 우연이 아니다. 장기간 꼴찌를 겪으며 쌓인 조직의 피로감과 패배 문화에서 벗어나, “우리는 해낼 수 있다”는 집단 확신이 선수단 안에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조이와 시마무라가 팀의 얼굴이라면, 박수빈·박사랑·국내 선수들의 성장과 활용은 이 얼굴에 근육을 붙이는 작업이다.

이제 질문은 하나로 정리된다. “이 기세가 시즌 끝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길게 보면 부상·체력·분석당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페퍼저축은행은 그 위기를 ‘이겨내는 팀’에 더 가깝다. 4시즌 연속 꼴찌를 기록하던 팀이 승부처에서 강해진다는 건, 단순 전력이 아닌 팀 문화의 변화다. 그리고 이런 문화는 한 번 자리 잡으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광주 페퍼스타디움에서 이어지는 홈 4연승, 조이-시마무라 58점 합작, 세터 이원화 전술, 감독의 과감한 결단. 이 모든 요소들이 겹치며, 페퍼저축은행은 더 이상 “언더독의 반란”이 아니라 “상위권이 당연한 팀”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올해는 진짜 다르다’는 말이, 이제는 과장이 아닌 사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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