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은 ‘라스푸티차’···북은 요새화, 남은 ‘쌍팔년식’ 경계작전[박성진의 국방 B컷](17)
‘라스푸티차’란 말이 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 북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계절적 요인으로 땅이 곤죽으로 변해 통행이 힘들어지는 것을 뜻하는 러시아어다. 한마디로 특정 지역이 라스푸티차가 되면 길이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북의 콘크리트 장벽
한반도에도 ‘라스푸티차’와 같은 역할을 하는 지역이 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휴전선 155마일 구간이다. 휴전선 비무장지대(DMZ)는 산악은 물론 평지도 나무와 같은 자연 장애물이 수두룩해 전술도로를 파괴하면 통행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한반도판 라스푸티차다.
지난 정부에서는 북한이 기습 남침해 휴전선을 지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시뮬레이션한 적이 있다. 자연환경 등 다양한 요인을 반영한 시뮬레이션 결과는 의외였다.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를 파괴하고 주요 축선에 화력을 집중시키면 북한군 병력이 DMZ를 통과하는 데 보름 이상 걸린다는 가상 결론이 나왔다.
북한은 지난 10월 15일 한반도 ‘데탕트(긴장완화) 시대’의 상징물인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 일부 구간을 폭파했다. 남북 연결도로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만나 정상회담을 열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한 2000년 이후 연결된 남북 경계선이다.
경의선과 동해선 남북 연결도로의 군사분계선(MDL) 이북 일부 구간이 폭파됐다. 경의선은 과거 개성공단 입주기업 관계자들이 남북을 오갈 때 활용한 도로다. 동해선을 통해선 금강산 관광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차량이 오갔다. 북한군은 이미 지난 8월 이 두 곳에서 불모지 작업과 지뢰 매설, 침목·레일과 가로등 철거, 열차 보관소 해체 등 차단 작업을 끝냈다.
북한은 MDL 북측 접경선을 따라 더 많은 물리적 장벽을 세우려 하고 있다. DMZ를 인위적인 라스푸티차로 조성하고 있다. 이번 연결도로 일부구간 폭파는 사전준비 작업으로 보인다. 앞서 조선인민군총참모부는 지난 10월 9일 보도문을 통해 “대한민국과 연결된 우리 쪽 지역의 도로와 철길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견고한 방어축성물들로 요새화하는 공사를 진행한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제반 정세하에서 우리 군대가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인 대한민국과 접한 남쪽 국경을 영구적으로 차단·봉쇄하는 것은 전쟁 억제와 공화국의 안전 수호를 위한 자위적 조치”라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요새를 만드는 이유는 상대방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공격용이 아니다. 과거 남북 교류 협력을 위한 도로와 철도를 조성할 때 국내 보수세력은 북한군의 남침용 기동로가 될 수 있다며 통로 개설을 반대했다. 합동참모본부도 이를 고려해 남북 연결도로 인근에 고차(고정전차)를 숨겨서 배치했다. 퇴역 전차를 땅에 고정해 언제든지 연결도로에 포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금은 북한이 그 통로를 파괴하고, 대량의 지뢰를 매설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나. 군사적으로 보면 북한군의 요새화는 한미연합군이 비무장지대를 넘어 진출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한미연합작계 5015’에서 전면전이 시작되고 한참 후인 반격작전 단계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한국군 수뇌부가 평시 저강도 군사 충돌을 주로 생각하는 것과 견줘보면 북한은 요새 구축 이후의 전면전 상황까지 고려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은 북한주민의 대량 탈북을 막으려는 조치로 본다.
■‘구닥다리’ 경계작전
임종득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0월 8일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6·25전쟁 이후 70여 년간 유지해온 경계작전 개념을 새롭게 변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한국군의 경계작전 개념이 6·25전쟁 때인 7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 점을 지적했다. 북한군의 침투전술과 위협이 바뀐 상황에서 병력자원도 부족한 한국군이 물량 투입식 경계작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임 의원은 군 장성 출신으로 국가안보실 제2차장을 지낸 군사 전문가다.
그는 ①GOP(일반 전초)나 해안선에서 적 침투를 차단하는 선(線) 개념에서, GP(최전방 감시초소)와 GOP, 철책선 후방에서 적 침투를 차단하는 벨트개념으로 변경 ②과학화 경계작전 체계에 AI, 드론을 통합 운영해 병력 절약 ③축선별로 경계전담 여단을 편성해 운영 ④상비사단을 축선 종심에 배치 등 4가지 방안을 고려한 경계작전 개념을 제시했다.
DMZ가 사실상 라스푸티차인 점을 감안하면 임 의원의 주장은 타당하다. 이는 필자가 만난 많은 전·현직 군 간부가 공통으로 인식하면서도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공론화를 꺼렸던 사안이다. 당장 유인 GP 무용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고, 전면적인 개편 이후 혹시라도 파생될 수 있는 책임 문제에 연루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지금의 선(線) 방어 개념의 작계를 따르면 GP·GOP 병력은 전면전이 터지면 시간을 벌기 위해 각 초소나 토치카에서 농성하다 옥쇄해야 한다. 그러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고 하더라도 주로 지상 시설인 한국군 GP가 북한군 포병의 집중 포격에 살아남아 적의 진격을 얼마나 저지할지 의문이다. 게다가 임 의원의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침투는 1998년 이후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상당수 한국군 장군들은 “이제는 쌍팔년도식 선형방어 교리에 따른 FEBA(전투지역전단) 주둔개념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 1950년대 북한군 포병의 타격과 살상 범위를 고려한 FEBA 분류가 장사정포는 물론 전술핵무기까지 등장한 현재 시점에 어떻게 타당하겠느냐는 것이다.
전방 지역 요새화가 이뤄지면 북한의 작전개념도 변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핵타격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지름 50㎝ 정도로 추정되는 북한의 전술핵탄두 ‘화산-31’은 남한 전역을 겨냥한 대부분의 신형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다. 최대 사거리가 110㎞인 근거리 전술유도탄(CRBM)에 화산-31을 탑재해 남측 전방 지역에 발사할 경우 군단 전력이 순식간에 몰살된다는 의미다.
신원식 국가안보실장과 김용현 국방부 장관은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잃을 것이 많아서 전쟁을 절대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로 군사적 대응을 하고 있다. 국지전이 벌어진다 해도 재래식 전력이 압도적인 한국군이 북한군을 괴멸시키고, 이는 김정은의 권위 상실과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뇌피셜’(자기만의 생각)에 기반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대신 국가 최고 지도자급 결심과 미군의 주도로 대응해야 하는 한반도 전구급(戰區級) 군사적 위기상황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군 수뇌부는 전작권을 가진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의 지시에 따르면 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즉·강·끝’(즉각·강력히·끝까지) 구호의 ‘끝’도 전작권을 가진 미군의 권리이지 한국군 수뇌부의 몫이 아니다.
미군은 한반도에서 조그마한 군사 충돌이라도 미국의 국익과 연결시켜왔다. 주한미군사령관을 겸임하는 유엔군사령관이 한국군과 북한군의 갈등을 오히려 부추기는 듯 침묵하다가도 때때로 정전협정 규정을 내세우며 한국군을 자제시키는 이유다.
박성진 ‘안보22’ 대표·전 경향신문 안보전문기자 anbo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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