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렁뚱땅 기업사] "조선소 없이 배부터 지어라" 맨땅에서 시작한 HD현대중공업, AI시대 핵심 기업이 되기까지

대한민국 조선업이 인공지능(AI)과 친환경 전환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를 맞이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HD현대중공업의 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소도 없이 선박을 수주’한 사건에서 시작한다. 다만 이 일화는 단순히 창업자의 신화라기보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창업자의 도전, 현장 인력 피땀어린 노력이 모두 맞물린 결과다.
1. 백사장과 500원짜리 지폐: "해봤어?" 정신이 쏘아 올린 신화
HD현대중공업의 시작은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 1947년 현대토건사(현 현대건설)를 세우며 성장하던 정주영 창업자는 일본 조선소 방문을 계기로 조선업 진출을 결심한다. 당시 일본은 선박을 거대한 블록 단위로 나누어 제작한 뒤 조립하는 공법을 쓰고 있었다. 정 회장은 이 공법을 보면 큰돈을 들여 조선소부터 완벽히 짓지 않더라도 땅 위에서 배를 동시에 만들 수 있겠다는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다.
이후 현대건설 기획실 직원들을 모아 조선사업부를 신설하고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전 세계를 분주히 뛰어다녔다. 미쓰비시중공업이나 캐나다 등에서는 거절당했고, 이스라엘의 한 선사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경영권을 요구하는 등 사기 냄새가 짙어 조항에 따라 소송 없이 계약을 파기하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결국 영국 금융권에서 차관을 받기 위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승인의 조건은 '수주 계약서'였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배를 주문받아야 보증을 해주겠다는 난제였다. 이때 영국의 컨설턴트 회사가 주선해 준 덕분에 대형 유조선 두 척을 수주하는 데 성공한다. 흔히 알려진 '500원짜리 지폐 뒷면의 거북선' 일화는 이 긴박한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과거부터 배를 잘 만들던 나라임을 피력한 순간의 에피소드였다.
계약 체결 이후 유례없는 대공정이 시작됐다. 조선소(도크)도 없고 배를 만들어본 경험도 없던 상황에서 2년 반이라는 납기 내에 두 척을 완성해야 했다. 현대는 24시간 공장을 돌리며 도크를 만드는 공사와 땅 위에서 배를 만드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대형 유조선을 만들어본 인력이 없었기에 조직도 내에 별도의 '훈련소' 파트를 두고 사람들을 교육해가며 배를 지었다. 결국 정주영 회장 특유의 "해봤어?" 정신으로 2년 반 만에 인도에 성공하며 1973년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의 서막을 열었다.
2. 오일쇼크의 파고와 글로벌 구조조정
첫 배를 인도하기도 전인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이 터지며 조선업계에 거대한 위기가 닥쳤다. 기름값이 폭등하자 유조선 주문이 급감했고 기존 계약마저 취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회사를 차렸고 인력을 놀릴 수 없었던 현대는 취소된 배를 그대로 계속 만들었다. 그리고 남는 배를 직접 운영하기 위해 '아세아상선'을 설립했다. 이 회사가 훗날 국내 대표 국적선사인 HMM의 모태가 된다.
이 위기는 전 세계 조선업의 지각변동을 불러왔다. 2차 석유파동을 지나며 방만하게 운영되던 일본과 유럽의 조선소들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일본에서는 42개 업체가 도산했고, 영국에서는 120개에 달하는 조선 및 관련 업체들이 국유화의 길을 걸었다.
반면 한국은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과 국산 대체화를 가속하며 경제개발 계획으로 조선업을 전폭 지원했다. 풍부하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력, 그리고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은 강력한 경쟁력이 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1977년 삼성, 1978년 대우조선공업(현 한화오션)이 합류하며 소위 '조선 빅3'가 정립되었다.
3. 선박 건조에서 파생된 거대한 산업 생태계
HD현대중공업이 세계 최고로 우뚝 선 비결은 선박을 짓는 과정에서 필요한 전문 분야들을 사내 사업부로 키운 뒤 독립시키는 다각화 전략에 있었다. 배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하나의 거대한 건물이자 플랜트였기에, 자체 조달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오늘날 잘나가는 핵심 계열사들이 탄생했다.
HD현대일렉트릭: 바다 위에서 수개월 동안 자체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고 제어해야 하는 선박의 특성상 배전반과 변압기 같은 중전기 설비는 필수적이었다. 현대는 1978년 사내 중전기 사업부를 '현대중전기'로 분사시켰으며, 이 기업이 성장을 거듭해 현재 AI 데이터센터 붐의 최대 수혜주인 HD현대일렉트릭으로 진화했다.
HD현대미포: 선박은 한번 만들면 오래 쓰기 때문에 수리 및 개조 시장의 사업성을 높게 평가했다. 이에 1975년 가와사키중공업과 합작해 '현대미포조선소'를 설립했다.
해양플랜트: 오일쇼크를 겪으며 선박은 글로벌 경기에 따른 변동성이 크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조선업의 주기적인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사업의 의존도를 줄여 지속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로 한다. 선박 건조시 수많은 철공 기술이 투입된다. 이러한 철구조물을 만드는 철공 기술은 수많은 플랜트 사업에 투입될 수 있다. 따라서 이미 세계 유수의 조선소들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불황의 타개책으로 철구사업을 육성하고 있었다. 현대중공업은 울산철공을 출범시키고, 현대건설의 철구제작소를 흡수해 철구사업부를 신설한다. 이 사업부는 커져 플랜트 사업부가 되었으며, 1970년대 중동 붐 당시 현대건설과 함께 해양 구조물 및 플랜트 수주를 따내며 오일쇼크를 극복하는 축이 되었다.
4. 로열티 지출에서 기술 자립으로: '힘센(HIMSEN) 엔진'
특히 엔진은 HD현대중공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2001년 자체 설계 엔진인 ‘힘센엔진’이 등장하면서 로열티 의존도를 낮추고 기술 자립의 상징을 확보했다. 힘센엔진은 선박뿐 아니라 발전 설비에도 적용되며 해외 시장으로 확산됐다. 쿠바 전력 사업에 현대중공업의 이동식 발전 설비가 들어간 사례는 선박 엔진 기술이 에너지 인프라 산업으로 확장된 대표적 장면이다.
5. 위기와 재도약, 그리고 미래
물론 성장의 길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10년대 중반 해양플랜트 부실과 저가 수주, 중국 조선업의 추격은 현대중공업을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2014년 이후 대규모 적자가 발생했고, 조선업 전체가 구조조정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현대중공업은 비상경영, 원가 절감, 저가 수주 중단, 자산 매각 등을 통해 체질 개선에 나섰다. 다른 조선사보다 빠르게 구조조정에 돌입한 점, 축적된 기술력과 비교적 단순했던 지배구조는 위기 탈출의 기반이 됐다.
방산도 중요한 축으로 부상했다. 현대중공업은 한국 최초 호위함 건조 경험을 바탕으로 이지스 구축함까지 건조하며 함정 분야 역량을 축적했다. 2008년 세종대왕함 인도는 한국이 이지스함을 자체 건조할 수 있는 국가로 올라섰다는 의미를 가졌다. 이 기술 축적은 오늘날 미국과의 조선·방산 협력 논의, 이른바 ‘마스가’ 흐름과도 연결된다.
현재 HD현대중공업은 다시 호황의 문턱에 서 있다. 조선 사이클 회복, 친환경 선박 수요, LNG선과 암모니아 엔진, 방산 선박, 엔진 기반 발전 수요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전력난 속에서 선박 엔진과 발전기 기술이 재조명되는 것도 과거 조선업에서 출발한 기술 축적이 새로운 시장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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