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해 가는 한국 화학공업을 부활시키겠다는 20대 창업가의 아이디어

AI 플랜트 설계 설루션 '오토플로우' 개발한 스냅스케일 김상윤 대표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창업에 뛰어들며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AI 플랜트 설계 설루션 ‘오토플로우’ 개발한 스냅스케일 김상윤 대표. /더비비드

액션 영화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어두운 밤, 어느 공장을 배경으로 주인공과 악의 무리가 치열한 격투를 벌이다가 몇 발의 총성 소리가 들리고, 총에 맞은 파이프에서 기체가 새어 나오더니 이내 ‘펑!’하고 터져버린다.

여기에 등장하는 공장이 바로 ‘화공 플랜트’다. 화공 플랜트는 화학 공정을 통해 원료를 원하는 물질로 대량 생산하는 산업이나 설비를 말한다. 미세한 틈만 생겨도 큰 폭발로 이어질 수 있어 설계 단계에서 충분한 안전성 검토를 요한다.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화공 플랜트 설계도 하나를 완성하는 데 평균 2년이 걸린다. 이 시간을 최소 50% 줄이는 방법을 제시한 국내 스타트업이 있다. 스냅스케일은 노동집약적인 플랜트 설계 업무를 AI로 자동화했다. 스냅스케일 김상윤(25) 대표를 만나 설계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들었다.

◇허무주의 끝에서 발견한 ‘삶의 유일성’

김 대표가 개발한 게임 화면 예시. /김상윤 대표 제공

1인 게임 기업을 설립해 수천만원의 매출을 올린 독특한 이력이 있다. “반짝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때부터 알 수 없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군 복무 시절 정신적 위기를 겪으면서 고민은 더 깊어졌어요. 니체의 책을 읽으며 ‘허무주의 철학’을 접했습니다. 정량적인 지표보다 비교 불가능한 ‘삶의 유일성’을 제1의 가치로 삼게 됐습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열망은 자연스럽게 기후 위기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기술의 상용화 속도에 주목했습니다.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신재생 에너지 같은 핵심 기술은 이미 나와 있지만 이를 상용화하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리더군요. 특히 주요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한 공장을 짓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모된다는 점이 큰 장애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공장 건설의 첫 단추인 설계 단계를 먼저 해결해 보기로 했어요. 노동집약적 설계 작업을 AI로 해결하면 기후 테크의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정유 공장의 한 부분. 한 눈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파이프가 얼기설기 얽혀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첫 타깃으로 ‘화공 플랜트’를 택했다. “한국의 국가적 강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어요. 우리나라는 화공 플랜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도메인(플랜트 설계·운영에 쓰이는 현장의 문제와 전문 기술, 실무적 맥락을 총칭하는 개념) 지식과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플랜트 지식을 AI로 증강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선점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습니다.”

◇국내외 엔지니어 75명에게 들은 고충에 집중

김 대표는 화공 플랜트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을 집을 짓는 과정에 비유하며 설명했다. /더비비드

화공 플랜트 설계도를 그리는 작업은 집을 짓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방을 하나씩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초 토목 공사를 한 다음 기둥을 세우고 필요한 자재를 하나씩 얹어나가죠. 공장 설계도를 그릴 때도 처음엔 간단한 선으로 시작합니다. 설계도 속 선은 대부분 파이프(라인)입니다. 각 파이프의 길이, 반지름, 온도·압력을 버티는 정도, 두께 등 정보가 모두 필요합니다. 이를 정리한 목록을 ‘라인 리스트’라고 하죠.”

제조업 인력 공급이 부족해 젊은 엔지니어의 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8~9년차 엔지니어가 막내인 경우도 있다. “라인 리스트의 초안을 잡는 데 평균 일주일 정도 걸려요. 혹자는 ‘설계도에 다 나와 있는 정보를 옮겨쓰기만 하면 되지 않냐’고 묻기도 합니다. 문제는 파이프가 한 설계도 안에 수백, 수천 개라는 겁니다. 베테랑 엔지니어가 이런 단순 반복 노동에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있다는 건 큰 손실입니다. 잘못 기재된 부분이 시공까지 걸러지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우려도 있어요.”

오토플로우 개발을 위해 75명의 현장 엔지니어를 만나 그들의 고충을 직접 들었다. /김상윤 대표 제공

많은 기업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플랜트 설계 자동화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기술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현장 엔지니어들의 복잡한 실무 맥락을 AI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개발해야 엔지니어가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쓸 수 있냐’에 초점을 맞췄어요. 75명의 국내외 엔지니어를 직접 인터뷰하며 현장의 고충을 생생히 들었습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오토 플로우’라는 설루션으로 구현했다. 설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집약적인 수작업을 자동화하는 서비스다. “가장 큰 특징은 사용 방법이 간단하다는 점입니다. 엔지니어가 기존에 쓰던 오토캐드에 프롬프트 창 하나만 추가하는 방식이에요. 수정 사항을 텍스트로 입력하기만 하면 AI가 자동으로 설계도를 수정하고 그 수정에 대한 근거 자료까지 생성해 줍니다.”

오토플로우 사용 화면 예시. 오토캐드에 프롬프트 창(빨간 창)만 추가해 수정 사항을 텍스트로 입력하는 방식이다. /김상윤 대표 제공

스냅스케일은 창업 1개월 만에 300명 규모의 건설 기업과 기술 검증(PoC)에 돌입했다. “라인 리스트 자동화 시스템의 데모 버전을 만들어 공급했습니다. 작업 시간이 혁신적으로 단축됐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 내부 테스트에서도 일주일이 걸리던 라인 리스트 초안 작업이 10분으로 크게 줄어든 것을 확인했습니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에너지 인프라의 핵심으로

제14회 정주영 창업경진대회 최종 데모 데이에서 연단에 선 김 대표. /김상윤 대표 제공

스냅스케일은 제14회 정주영 창업경진대회에서 예비창업 트랙 대상을 받으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시니어 엔지니어를 공동창업자로 둔 20대 대표로서 고충이 많았습니다. 정주영 창업경진대회의 멘토링 프로그램인 마루커넥트를 통해 다양한 선배 창업가들을 만나 구체적인 조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비즈니스 소통 노하우를 빠르게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스냅스케일을 통해 그려갈 미래는 국내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2026년에는 추가로 2~3개 기업과 더 기술 검증을 하면서 설루션을 고도화할 계획입니다. 이후엔 바로 글로벌 설계·조달·시공(EPC) 기업과 협업을 추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5년 내, 글로벌 30위권 EPC 기업 중 10곳 이상의 거래처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AI를 이용한 자동화 기술로 기후 위기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김 대표. /더비비드

그의 시선은 단순한 설계 자동화를 넘어 에너지 인프라 구축을 통한 기후 위기 해결을 향하고 있다. “어떤 기술이든 3년 이내에 상용화가 되길 바랍니다. 새로운 기술은 빠르게 등장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수많은 노동집약적 작업이 이를 가로막고 있죠. AI가 이 문제를 풀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화공 플랜트를 시작으로 다양한 산업 분야의 ‘자동화’를 이뤄낼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이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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