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⑭응답하라 1988…두 번째 신인왕 이용철과 두 번째 타격왕 김상훈의 추억

『해태 김성한이 국내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두 차례나 최우수 선수(MVP)에 뽑혔다. 한편 최우수 신인선수엔 MBC 투수 이용철이 219점을 얻어 뽑혔다. 올 시즌 신인왕이 된 이용철은 소속팀 MBC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7승(11패)을 올렸으며, 방어율 2.81을 기록했다. MBC의 김상호는 136점으로 신인왕 투표 2위를 차지했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청보 핀토스가 태평양 돌핀스에 인수돼 간판을 바꿔 달고 리그에 참가한 해였고,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눠 치른 마지막 해였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4번째 주제는 MBC 청룡 시대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88년 이야기다. 인기리에 방영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소재가 됐던 해. '응팔'의 시기, MBC 청룡의 추억을 소환하자면 집안싸움으로 펼쳐진 신인왕 경쟁과 1982년 백인천 이후 6년 만에 타격왕에 오른 김상훈이 떠오른다.


◆1988년 제5대 사령탑 유백만 감독 선임
MBC 청룡은 1987년 포스트시즌 진출 일보 직전에서 미끄러졌다. 페넌트레이스가 한창 진행 중이던 9월 중순 에이스 김건우가 교통사고로 이탈하면서 가을잔치 참가가 무산됐다.
1987년 전기리그에서는 7개 구단 중 5위에 그치면서 김동엽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았고, 후기리그부터 유백만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승격하면서 분위기 반전을 노렸지만 결국 4위로 끝났다.
또 다시 감독이 교체되는 것일까. 그러나 MBC는 그동안 3차례나 감독대행(1983년 25경기, 1986년 1경기, 1987년 54경기)을 맡아온 유백만 코치에게 ‘대행’의 꼬리표를 떼줬다. 1987년 후기리그 감독대행을 맡아 26승4무24패로 5할대 이상 승률(0.519)을 올렸고, 포스트시즌 진출 경쟁을 벌인 데 대해 높은 평가를 했던 것이다. 계약기간 2년, 연봉 4000만 원의 조건이었다.
사실 유백만 스스로는 “감독보다는 코치가 좋다”며 감독직을 계속 고사하다 구단의 지속적인 설득 속에 결국 지휘봉을 잡게 됐다.
유백만은 부산상고와 한국운수, 한국미창, 상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고교시절엔 내야수였지만 한국운수 시절 투수로 전향해 실업야구 사상 최다인 4차례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며 국가대표 투수로 활약했던 인물. 1977년 한국화장품 창단 감독을 맡은 뒤 서울고 감독(1981년)을 거쳐 1982년 MBC 청룡 원년 코치로 합류해 투수코치로 오랜 인연(1982~1983년, 1986~1987년)을 이어왔다.
※여담으로 ‘백만’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를 두고 한동안 “KBO 역사상 가장 숫자가 큰 이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2001년 김백만이 한화에 입단하면서 “타이기록”이라는 말이 나돌았지만, 알고 보면 1998년 현대에 입단한 내야수 김일경(현 LG 트윈스 코치)이 현재까지는 역대 가장 높은 숫자의 이름.
참고로 숫자 단위는 다음과 같다. 일-십-백-천-만-억-조-경-해-자-양-구-간-정-재-극-항하사-아승기-나유타-불가사의-무량수.

◆MBC, 이국성 이용철 김상호 1차지명…OB는 차명석 고졸연고 지명했지만 입단 불발
MBC는 1980년대 후반 유난히 트레이드와 거리가 멀었던 팀이다. 1986년 2월에 김영균을 청보 핀토스로 보내는 트레이드를 진행한 이후 1988시즌까지 한 건의 트레이드도 단행하지 않았다. 다른 팀 선수를 영입한 트레이드는 1985년 11월 투수 김봉근을 내주고 청보 외야수 김우근을 데려온 게 마지막이었다.
한편으로 보면 안정적인 선수단 운영.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팀 관리 부실 속에 선수수급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MBC는 원년부터 6년 동안 적자가 쌓이자 프로야구단에 대한 투자를 줄이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었다.
결국 기대할 수 있는 전력보강은 신인드래프트였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국가대표 알짜 선수들은 모두 프로 진출이 유보된 상황이었다. 1987년 MBC 1차지명을 받은 아마추어 최고 강타자 노찬엽이 고려대 졸업 후 2년간 실업팀 농협에서 뛰어야만 했고, 1988년 입단 대상자인 국가대표 일본킬러 좌완 김기범은 건국대 졸업 후 실업팀 한일은행에 들어갔다.
다른 몇몇 팀도 마찬가지였다. 해태는 조계현, 빙그레는 송진우를 1988년에 곧바로 영입할 수 없었다.
화제를 모을 만한 특급 유망주가 없는 가운데 서울 두 팀 MBC 청룡과 OB 베어스의 1988년 신인 지명회의는 1987년 11월 2일 열렸다. 여기서 MBC는 좌완투수 이국성(성남고~경희대), 우완 잠수함투수 이용철(경기상고~단국대), 거포 내야수 김상호(선린상고~계명대)를 1차지명했다. 이들은 훗날 나름대로 MBC에서 쏠쏠한 활약을 한 선수들이다.
OB는 국가대표 외야수 이석재(서울고~한양대), 내야수 김원식(충암고~동국대)과 정삼룡(덕수상고~인하대)을 1차지명으로 뽑았다. 그러나 이들 중 OB에서 제대로 뛴 선수는 없었다. 대학 강타자 이석재는 프로 진출 유보 선수가 아니었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선택해 실업팀 제일은행에 입단했다. 서울올림픽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한 뒤에도 제일은행에 남아 선수생활을 마쳤다.
2차지명에서 뽑은 주요 선수를 살펴보면 MBC는 2라운드에서 경북고 시절 스타로 떠올랐던 사이드암 투수 문병권(경북고~연세대)을 지명한 점이 눈에 띄었다. OB에서는 2차 3라운드 내야수 길홍규(신일고~고려대), 2차 4라운드 포수 김태형(신일고~인천전문대)이 훗날 전력에 가세하는 선수로 성장한다.

한편 1988년 신인 드래프트 명단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OB가 성남고 투수 차명석을 고졸연고 지명으로 뽑은 것. 그러나 당시 규정상 고졸연고 지명 선수는 11월 15일까지 계약이 이뤄지지 않으면 지명권을 상실하게 돼 있었다. 차명석은 왜 OB에 입단하지 않은 것일까.
“그때 제가 건국대 숙소에 납치돼 있었죠. OB에 지명된 것도 알았고, OB 구단 관계자가 입단 협상을 하기 위해 학교 앞까지 왔지만 제가 학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요. 만나서 얘기를 들어봐야 프로에 갈지 말지 결정도 할 수 있는데 건국대에 감금돼 있다시피 했으니. 허허. 그런데 그때 OB에 가지 않으면서 제 운명도 바뀐 거죠.”
차명석 현 LG 단장은 웃으면서 그 시절을 회상했다.
차명석은 결국 OB와 입단 협상 한번 해보지 못하고 건국대로 진학했다. 그 결과 그의 말처럼 운명이 바뀌었다. 4년 후인 199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지명 1라운드에 LG에 선택되면서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그로 인해 현재 LG 트윈스 단장을 맡고 있는지 모른다.
(차명석에 대해서는 추후 엘팬알백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1988년 시즌 개막부터 5연패…힘겨운 청룡의 행보
1988시즌 MBC는 시작부터 삐끗했다. 4월 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빙그레 이글스에 0-3으로 패했다. 특히 전년도까지 2년 연속 구원왕에 오른 국내 최고 소방수 김용수를 선발로 변신시켜 첫 판을 잡으려 했지만 실패한 부분이 뼈아팠다. 김용수가 8이닝 3실점으로 호투하고 신인 좌완 이국성이 1이닝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팀 타선이 빙그레(7안타)보다 많은 9안타를 때리고도 무득점에 그쳤다.
이로써 MBC는 1982년 원년 개막전에서 KBO 최초 승리팀이라는 타이틀을 딴 뒤 개막전에서만 줄줄이 6연패(1983~1988년)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튿날에도 빙그레에 0-4로 패했다. 선발투수 이길환이 4.1이닝 2실점으로 물러난 뒤 오영일이 3.2이닝 2실점(1자책점)으로 이어던졌지만 타선이 터지지 않았다.
이날 수확이라면 마지막 9회에 패전처리로 등판한 루키 잠수함투수 이용철이 프로 데뷔전에서 1이닝 동안 4타자를 상대하며 1안타 무실점으로 막은 것이었다. 이용철이 그해 신인왕으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빙그레는 1987년에만 해도 전기리그에서 7개팀 중 6위, 후기리그에서 꼴찌였을 정도로 전력이 약했던 팀이었다. MBC로서는 반드시 잡아야 할 상대였다. 하지만 2경기 연속 영패를 당했으니 충격이 컸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김영덕 감독을 영입한 빙그레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1988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정도로 강팀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MBC의 연패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개막 이후 5연패에 빠졌고, 팀 내부에 패배 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 17경기에서 11패. 그중 무려 7경기에서 무득점 패배를 당했다.

◆부상자 속출…전기리그에서 창단 후 첫 꼴찌
에이스 김건우는 여전히 재활 중이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용수는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는 무리한 일정 속에 어깨통증이 발생해 이탈했다. 좌완 에이스 유종겸은 늑막염 후유증, 노장 투수 하기룡은 발목부상으로 개점휴업했다. 마운드가 무너졌다.
타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광은 김상훈 박흥식 등 주력 타자들이 돌아가며 부상으로 결장했다. 5월에 이광은이 돌아오자 이번엔 김재박이 허벅지 부상으로 이탈했다.
전기리그에서는 결국 17승2무35패(승률 0.333)로 최하위가 되고 말았다. 그 시절 약체의 대명사였던 태평양 돌핂스(18승1무35패)에도 0.5게임차로 뒤졌다. 원년부터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눠 보더라도 MBC가 리그 꼴찌를 한 것은 창단 후 처음. 청룡 시대 가장 어두웠던 암흑기가 찾아왔다.
후기리그는 부상선수들이 속속 돌아오면서 전력이 다소 정비됐다. 후기리그 개막 2연전 상대는 빙그레. MBC는 이번엔 적지인 대전에서 2연승을 올리며 전기리그 개막 2연패의 악몽을 되갚아줬다. 7월 1일 잠실 OB전까지 6경기에서 4승1무1패.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가며 전기리그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찻잔 속의 태풍. 승과 패를 반복하더니 7월 15일 잠실 빙그레전 패전을 시작으로 4연패를 당했다. 7월 25일 사직 롯데전에서 연패를 끊었지만 이후 다시 4연패. 그러면서 7개 구단 중 6위로 내려앉았고, 별다른 반등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후기리그 23승2무29패(승률 0.444)로 태평양 돌핀스에 겨우 앞서며 탈꼴찌(6위)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1988년 전‧후기리그를 합친 종합성적에서는 총 108경기에서 40승4무64패(승률 0.389). 후기리그에서 압도적 부진에 빠진 태평양이 34승1무73패(승률 0.319)로 맨 아래를 받쳐줬기에 꼴찌는 면했지만, MBC 창단 후 가장 저조한 시즌 승률이었다.

◆루키 잠수함 이용철, 선동열 제치고 ERA 1위 돌풍
사실 시범경기 때만 하더라도 신인 중에서는 좌완 이국성에 더 큰 기대를 걸었던 MBC였다. 그런데 시즌 개막 이후 이용철이 기대 이상의 역투를 펼쳐나갔다.
앞서 설명한 대로 이용철은 개막 두 번째 경기인 빙그레전에 패전 처리로 나가 1이닝 1안타 무실점을 기록하며 깔끔한 데뷔전을 치렀다. 4월 6일 대구 삼성전에서도 0-8로 지는 상황에서 등판해 마지막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보직은 별 볼 일 없었지만, 데뷔 후 4경기에 등판해 5.1이닝 무실점 행진을 펼치고 있었다.
“개막 엔트리에 들었는데 그땐 패전 마무리라는 게 있었어요. 저는 그걸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MBC 청룡이 시즌 초반부터 연패에 빠지고 지는 경기가 많다 보니 제가 등판하는 횟수가 많았진 거예요. 거기서 계속 무실점으로 막아 나가니까 유백만 감독님이 갑자기 저를 부르시더니 ‘선발 한번 해봐’라고 하시더라고요.”

기회가 왔다. 그런데 데뷔 첫 선발 상대가 하필이면 당시 최강 화력의 팀이었다. 4월 14일 대구 삼성전. MBC는 전날까지 개막 후 1승6패로 부진에 빠져있던 상황이었다. 삼성은 1987년 사상 최초로 팀타율 3할을 기록했을 정도로 막강한 방망이를 자랑하고 있던 팀이었다.
그런데 가냘픈(몸무게 66㎏) 이용철의 낭창낭창한 투구에 삼성 강타자들의 방망이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당시는 시속 140㎞만 넘어도 강속구로 대접받던 시대. 이용철은 그 시절의 잠수함투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130㎞대 중·후반대의 빠른 공을 던졌고, 각도 큰 커브와 우타자 몸쪽을 파고들며 떨어지는 싱커를 주무기로 삼았다.
5이닝 동안 1실점. 이용철은 6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여기서 이종두에게 볼넷, 김용국에게 우전안타를 허용하며 무사 1‧2루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자 유백만 감독은 김용수를 호출했다. 김용수가 2사 후 홍승규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으면서 이용철의 성적은 5이닝 3실점(1자책점). 김용수가 이날 4이닝 2실점으로 다소 고전했지만 6-5 승리를 마무리하면서 세이브를 올렸다.
이용철은 데뷔 첫 선발등판에서 감격의 첫 승을 올렸다. 이때부터 벤치의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때론 앞(선발)에서, 때론 뒤(롱릴리프)에서 마당쇠처럼 등판했다. 4월말까지 7경기에 등판해 평균자책점 0.74(24.1이닝 2자책점)로 천하의 해태 선동열(0.75)을 제치고 이 부문 1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5월 9일 인천 태평양전에서는 9이닝 7안타 1실점으로 데뷔 첫 완투승을 올리며 시즌 2승째를 수확했다. 부상자 속출, 타선의 지원 부족, 내야수들의 연이은 실책 등으로 승수가 많지 않았지만, 신인 이용철의 호투는 가뭄 속의 단비와 같았다.

◆이용철과 김상호 신인왕 집안경쟁
이용철이 데뷔 첫 완투승을 올린 날, 1차지명 루키 김상호는 의미 있는 홈런을 쳤다. 2회초 태평양 선발투수 임호균을 상대로 좌월 2점홈런을 날린 것. 3루수 백업요원으로 간간이 출장기회를 엿보다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날 4타수 2안타 3타점으로 맹활약하면서 눈도장을 받았다.
이날이 어쩌면 신인왕 집안싸움의 신호탄이었는지 모른다.
MBC는 그 시절 가뜩이나 장타력이 부족했던 팀이었다. 1986년 팀홈런은 37개로 꼴찌, 1987년엔 36홈런으로 7개구단 중 6위였다.
그런데 한눈에 봐도 힘이 장사인 김상호의 가세는 거포 갈증에 시달리던 MBC에 청량감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스윙이 다소 거칠고 3루수로서 실책이 잦았지만 일발장타가 매력적이었다.
결국 이용철은 첫해 29경기(선발 19경기)에 등판해 7승(1구원승 포함) 11패, 평균자책점 2.81을 기록했다.
김상호는 규정타석에 미달됐지만 88경기에 출장해 타율 0.269(297타석 72안타), 7홈런, 43타점의 성적을 올렸다. 실책 14개가 다소 아쉬웠지만 홈런 7개는 팀 내에서 김상훈(8홈런)에 이어 2위였다. 그해 MBC 팀홈런은 OB와 함께 42개로 공동 최하위였는데 김상호가 팀홈런의 6분의 1을 책임진 셈이었다. 2루타 17개도 김재박(18개)에 이어 2위였고, 도루 11개로 '호타준족' 선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앞서 설명한 대로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국가대표급 최대어 선수들의 프로 진출이 유보되면서 1988년 신인왕 레이스는 예년 같지 않았다. ‘신인 흉작’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특급 선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MBC 이용철과 김상호가 신인왕에 가장 근접한 성적을 올렸다.
이용철 외에 신인왕 후보에 오른 투수는 롯데 서정용뿐이었다. 서정용은 규정이닝에 한참 미달된 47이닝을 던져 3승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06을 기록했다. 타자는 김상호 외에 해태 김성규와 태평양 여태구가 있었지만 둘 다 타석수도 매우 적었고 홈런도 없었다.

◆청룡 시절 마지막 신인왕 이용철…행운과 불운 사이
“이용철이냐, 김상호냐.”
결국 신인왕은 MBC 집안싸움으로 좁혀지는 분위기였다.
신인왕 투표 결과 이용철은 총 유효표 27표 가운데 1위 18표, 2위 6표 등 219점을 얻어 팀 동료 김상호(1위표 6표, 2위표 11표)를 따돌리고 신인왕에 올랐다. 김성규가 남은 1위표 3표를 받았다.
KBO 신인왕의 역사는 1983년부터 시작됐다. 초대 수상자인 OB 박종훈(외야수)부터 1984년 OB 윤석환(투수), 1985년 해태 이순철(3루수), 1986년 MBC 김건우(투수), 1987년 빙그레 이정훈(외야수)이 마치 홀짝 게임을 하듯 투수와 타자가 번갈아 신인왕에 오르는 전통 아닌 전통이 생겼다. 1988년 투수 이용철이 신인왕을 받으면서 또 다시 지그재그 전통을 이어갔다.
이용철은 MBC 청룡과 LG 트윈스로 이어진 구단 역사에서 김건우에 이어 역대 2번째 신인왕으로 이름을 올렸다. 아울러 청룡 시대의 마지막 신인왕으로 남는 역사를 썼다.
그런데 이용철은 당시 “10승도 올리지 못한 신인왕”, “역대 최소 승수의 신인왕”이며 평가절하되기도 했다.
투수를 평가하는 지표로 승수가 가장 큰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앞서 신인왕에 오른 투수 윤석환(12승8패 25세이브, 평균자책점 2.84), 김건우(18승6패, 평균자책점 1.80)와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 그래서 그 시절엔 ‘행운의 신인왕’으로 불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신인왕을 못 탈 것도 없는 성적이다. 오히려 ‘행운의 신인왕’이라기보다는 ‘불운의 신인왕’이라고 볼 수도 있다.
144.1이닝으로 그해 신인 중 유일하게 규정이닝(108이닝)을 넘어섰다. 팀 내에서 오영일(176이닝)에 이어 2위였다. 다승 역시 팀 내에서 이길환(10승, 7승11패 2세이브)에 이어 2위였다.
6차례나 완투를 했지만 승수가 7승에 그쳤다는 점은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해 MBC의 팀득점은 408점으로 7개구단 중 꼴찌였고, 팀 수비율 또한 0.976으로 꼴찌였다. 이용철은 그해 실점이 63점이었지만 자책점은 45점이었다. 28.6%가 비자책점이었던 셈이다.
그는 우타자를 상대로 과감한 몸쪽 승부를 자주 펼쳤다. 싱커가 주무기이기에 3루수 쪽 땅볼 유도가 많았다. 하지만 하필이면 룸메이트이자 신인왕 경쟁자인 3루수 김상호의 실책이 잦았다. 실점 중 비자책점이 많은 이유였다.
특급 소방수 김용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점도 불운이었다. 앞서 2년 연속 구원왕에 오를 때처럼 김용수가 건재했다면 이용철은 어쩌면 선발로 고정돼 더 많은 승수를 챙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용수는 그해 어깨 부상으로 3승5패 11세이브에 그쳤다. 김용수의 그해 평균자책점 4.47은 청룡 시대에 가장 저조한 수치였다.
1988년 이용철보다 평균자책점이 낮은 선수들의 승수를 보면 그가 얼마나 불운했는지 알 수 있다.
그해 우승한 해태의 이상윤은 2.89(137이닝)로 16승6패를 작성했다. OB 김진욱은 3.10(139.1이닝)으로 11승8패 2세이브, 빙그레 한희민은 3.11(188이닝)로 16승5패5세이브를 기록했다.
‘고독한 황태자’로 불린 롯데 윤학길은 그해 234이닝 17완투를 펼친 덕분에 18승10패 3세이브로 다승왕을 차지했지만, 평균자책점 3.15는 12위였다. 삼성 성준은 3.33으로 11승8패 2세이브를 거뒀다.
이용철은 2.81의 평균자책점으로 승수(7승)보다 패수(11패)가 많았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해 가장 불운한 투수 중 한 명이었는지 모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손가락질을 받았던 신인왕…역대 최소 승수 신인왕 타이틀과 작별
예전엔 10승을 올리지 못하면 신인왕으로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실제로 이용철은 신인왕으로 뽑힌 뒤 언론 인터뷰에서 “올해 10승을 못 채워 아쉽다. 그랬더라면 신인상을 타고도 떳떳할 수 있었을 것이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이제는 투수를 평가할 때 승수로만 말하는 시대는 아니다. 특히 투수분업화가 진행되면서 중간계투 요원이나 마무리투수들이 제대로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용철은 ‘역대 최소 승수 신인왕’이라는 타이틀도 이제 벗어던지게 됐다.
2009년 두산 이용찬(현 NC)은 0승2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4.20(40.2이닝 19자책점)으로 신인왕에 올랐고, 2019년 LG 정우영은 4승6패, 1세이브, 16홀드, 평균자책점 3.72(65.1이닝 27자책점)로 신인왕 타이틀을 따냈다.
2023년 신인왕인 두산 정철원(현 롯데)은 4승1패 17홀드, 평균자책점 4.95의 성적을 올렸고, 2024년 신인왕인 두산 김택연은 3승2패 19세이브, 4홀드, 평균자책점 2.08(65이닝 15자책점)을 기록했다.
불펜 전문투수뿐만 아니다. 2021년 KIA 이의리는 19경기에 모두 선발등판했지만 4승5패, 평균자책점 3.61(94.2이닝 38자책점)에 그쳤다. 그러나 경기 내용과 장래성을 인정받으면서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행운과 불운 사이. 이용철은 어디에 해당할까.
“승수로만 말하던 시절이 아니라 요즘의 평가 시스템이면 저도 그때와 달리 좀 더 나은 평가를 받았을지 모르죠. 하지만 그해 88서울올림픽으로 인해 제가 신인왕이 됐으니 분명 행운이었죠. 만약 송진우나 조계현 투수가 대표팀에 가지 않고 그해 프로에 입단했다면 제가 어떻게 신인왕을 했겠습니까.”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쩌면 이용철은 신인왕에 오르고도 손가락질을 받은 KBO 역사상 ‘가장 슬픈’ 신인왕이었는지 모른다.

◆입시를 보고 단국대 합격…독학으로 터득한 잠수함투구로 신인왕
이용철의 야구인생은 드라마틱했다. 봉천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해 배문중과 배문고로 진학했다. 그러나 배문고 1학년 때 야구부가 해체되면서 야구부를 재창단한 경기상고로 넘어갔다.
그 시절엔 팀이 전국대회 4강에 들어가거나 청소년대표 상비군에 포함되어야만 특기생으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이용철은 청소년대표 상비군에 선발돼 특기생 자격을 갖췄다.
그런데 경기상고가 야구부를 재창단한 학교이다 보니 서류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행정실수를 범했다. 이야기가 다 끝났던 영남대 특기생 입학이 불발됐다.
이용철은 그때부터 벼락치기로 암기 과목 위주로 공부하면서 대학입학시험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반 학생처럼 입시를 보고 단국대 체육학과에 합격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머리가 있었는지, 행운이 있었는지 몇 개월 공부로 대입시험에 합격해 구사일생.
일반학생으로 대학을 다니던 그는 1학년 중반에 야구부를 노크했고, 가까스로 다시 유니폼을 입고 야구를 이어가게 됐다. 당시만 해도 유격수였다.
“그때 유격수 수비는 좀 예쁘게 한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몸무게가 66㎏밖에 안 나가다 보니 타격에 힘이 없었어요. 당시 단국대 투수력이 약했는데 대학 3년 때 강문길 감독님한테 투수를 해보겠다고 했죠. 사실 그때 언더핸드로 처음 던지기 시작했는데, 언더핸드 투구를 지도해주실 코치님도 없어서 다른 학교 한희민(성균관대) 선배, 동기인 문병권(연세대) 등의 투구폼을 보고 독학으로 던졌죠. 요즘처럼 영상을 찍어둘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니까 먼 발치에서 본 투구폼을 눈에 담아놓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서 던졌던 거죠.”

짧은 기간에 투수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대학 시절 거의 혼자 던지다시피 하면서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었고, 단국대 졸업반 때 1차지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1988년 인생에 한 번만 온다는 신인왕의 간택을 받았다. MBC와 LG 구단 역사에서는 모두 6명의 신인왕을 배출하고 있는데 그는 그중 역대 2번째이자 청룡 시대 마지막 신인왕으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김상훈, 백인천 이후 6년 만의 타격왕
88서울올림픽 종합순위 4위에 올라 온 나라가 축제분위였던 것과 달리 MBC의 1988년은 전반적으로 암울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연봉협상에서부터 진통을 겪더니 결국 꼴찌나 다름없는 성적을 안았다. 서울 터줏대감이었지만 시즌 홈 관중수도 23만9562명(평균 4436명)으로 서울 입성 4년째인 OB(27만5061명)에 뒤졌다.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것도 창단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급장갑 단골손님 김재박과 이광은이 부상과 부진으로 헤맸고, 직전 2년 연속 구원왕을 차지했던 김용수도 어깨 부상 속에 구원왕 타이틀을 반납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타이틀을 따낸 부문이 있었으니 이용철의 신인왕과 함께 김상훈의 타격왕이었다.
1984년 입단 이후 청룡의 간판 타자로 자리를 잡은 김상훈은 1988년 0.354의 고타율로 삼성 김성래(0.350)를 제치고 생애 첫 타격왕에 올랐다.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기리그 발목부상으로 결장이 이어지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전기리그 막바지인 6월 4일 잠실 해태전에서 4타수 0안타를 쳤을 때 시즌 타율은 0.225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타격왕은커녕 데뷔 후 가장 저조한 성적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타율만 놓고 보면 발목 부상이 전화위복으로 작용했다. 큰 스윙 대신 정확한 타격에 주력한 결과 믿기지 않는 안타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7월 3일 잠실 해태전 3타수 2안타로 시즌 처음 3할대(0.301)로 진입했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3할1푼, 3할2푼, 3할3푼, 3할4푼대를 차례대로 넘어섰다.
8월 28일 빙그레와 펼친 더블헤더에서 8타수 5안타를 몰아쳐 타율 0.349로 삼성 김성래와 공동 1위로 올라섰다. 이때부터 피를 말리는 타격왕 싸움이 전개됐다.
김상훈은 9월 4일 춘천 태평양전, 6일과 7일 사직 롯데전 등 3경기에서 번트안타만 4개를 성공하면서 타율을 0.355로 끌어올렸다. 그 사이 김성래는 9월 6일 전주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더블헤더 제1경기에서 김성한과 충돌하면서 심각한 무릎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선고받고 말았다. 김성래는 0.350으로 시즌을 마쳤다.
김상훈은 시즌 최종전인 9월 10일 전주 해태전에서 4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시즌 305타수 108안타, 타율 0.354로 김성래(0.350)를 제치고 타격왕을 차지했다.
김상훈 개인적으로 프로 데뷔 처음이자 유일한 타격왕. 이는 1982년 백인천 이후 6년 만에 MBC 청룡에서 나온 두 번째 타격왕이기도 했다.
KBO 역사에서 3년 연속(1985~1987년) 타격왕을 이어가던 장효조의 시대도 마침표가 찍혔다.
LG 트윈스 시절에는 현재까지 5명의 타격왕을 배출했다.

한편, MBC 청룡은 시즌 후 팀 분위기 쇄신을 이유로 유백만 감독을 총감독으로 승격시키면서 일선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러면서 ‘스파르타식 훈련’의 대명사 배성서 감독을 영입하게 된다. 아울러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프로 진출이 유보됐던 국가대표 노찬엽과 김기범을 영입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기 시작한다.
[엘팬알백] ⑮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