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안전한 그물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_아일랜드 일상다반사_도윤

Holes in our social safety net_The Nova Scotia Advocate

어느 곳에서든 산을 볼 수 있는 한국과는 달리 아일랜드에서는 뭉게구름이 가득한 하늘과 끝없이 이어지는 녹색의 땅이 만나는 ‘지평선’을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드넓은 풀밭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집들과 사람보다 숫자가 많다는 소 떼와 양 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아일랜드의 풍경은 내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금요일 오후의 동네 외곽도로는 평소보다 교통량이 많아 자동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1년 중 어느 때, 퇴비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경우를 제외하곤 풍경도 냄새도 소리도 연중 내내 새로운 것 없는 그 길가에서 전에 없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한 자동차들의 뒤를 쫒으며 얼핏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회색의 기둥을 지나치며 ‘누군가 무언가를 태우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이틀 뒤 일요일. 평소에도 미사가 끝나면 동네 사람들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소식을 전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날따라 더 많은 수의 사람이 한참 동안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침 동네 소식에 밝은 소피가 지나가자 나와 남편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의 가족들과도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는 W 씨의 집이 지난 금요일에 불타버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불이 났을 때 아무도 집에 없어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뒤늦게 화재 경보 연락을 받고 W씨의 가족은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온 집으로 번져버린 불길에 집이 완전히 타들어 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문득 지난 금요일에 보았던 연기 기둥이 떠올랐고, 그제야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소피는 좀 더 자세하게 W 씨 가족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W 씨는 목수 일을 하다가 몇 년 전부터 병원에서 요양사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그의 아내는 동네 편의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초등학생인 막내를 포함해서 5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W 씨는 몇 년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 오고 있었기 때문에 화재 보험을 들 만한 여력이 없었고, 이번 화재로 온 가족이 거리로 나가 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화재가 난 뒤 가족들은 친척 집이나 친구의 집에 뿔뿔이 흩어져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아일랜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일랜드 지역사회 공동체의 역할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Community'는 흔히 ‘공동체’라는 말로 사용되는데, 케임브리지 영어 사전에 따르면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들 또는 공통점이나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뜻한다. 조선시대 한국에서 오일에 한 번 열리는 장마당에서 사람들이 소식을 전하고 정보를 나누었던 것과 유사하게 가톨릭교회 전통이 뿌리 깊었던 아일랜드에서는 일요일에 성당에 가서 서로의 소식을 전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일랜드 사람들의 인적 및 정보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GAA라는 지역사회 체육회의 역할이었다. 아일랜드는 남자는 헐링(Hurling), 여자는 커모기(Camogie) 그리고 아이리시 풋볼이라는 운동에 거의 모든 사람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참여한다. 일주일에 2회 이상 연습에 참여하고 주말마다 친선 경기를 가지면서 아이들의 부모들도 자주 만나 교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GAA는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교류하는 장이 되고, 또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또 도우며 살아가는 끈끈한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GAA는 단지 체육회의 역할 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전역에서 지역사회 공동체를 이끄는 주요한 핵심 조직이라 말할 수 있다.

지역사회 공동체의 사람들은 W 씨 가족을 돕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옷 외에는 아무것도 챙겨 나올 수 없었던 이들 가족을 위해 옷이나 음식들을 가족이 머무는 집으로 보내고, W 씨의 직장에서는 그가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일정 기간까지 결근으로 처리하지 않겠다고 했다. 앞서 말했던 GAA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고, 멤버 중에 건축과 관련된 사람들을 중심으로 집을 다시 복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최대한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자선경기가 열려 티켓을 판매하거나, 여성들은 케이크 세일 데이를 열어 돈을 모으기도 했다. 모두 한 마음으로 W 씨가 재기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화재가 일어난 1주일 뒤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밤 W 씨가 집을 나와 친구의 집에 머물고 있던 자신의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아이들을 만나고 난 다음 날 동네에서는 하루 종일 헬리콥터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W 씨 가족의 재기를 돕기 위해 한마음으로 노력하던 GAA의 멤버들과 지역사회 공동체는 이 사건으로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W 씨의 가족들은 모든 것을 화재로 잃은 뒤 1주일 만에 집안의 가장을 잃었으니 그 슬픔은 헤아릴 길이 없었을 것이다.


GAA는 W 씨 가족을 돕기 위해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찾기로 했고, 인터넷에 모금 사이트를 개설하기로 했다. GAA 멤버를 중심으로 지역공동체의 사람들은 W씨 가족의 사연과 함께 SNS와 메신저 서비스를 통해 가족과 친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졌고, 지역의 신문과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모금사이트가 개설되고 3일 만에 30만 유로(약 4억5천만 원)가 모금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액인 50만유로(약 7억 원)를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전례 없이 진행된 W씨 가족을 위한 모금과 그 후에도 지역사회의 물심양면에서의 관심과 지원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저소득층 소득의 위기에 방점을 둔 것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세계은행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경제적 어려움의 ‘불규칙성’을 확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아시아 태평양 경제 사회 위원회(EACAP)에서는 2001년 사회안전망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상치 못하는 사건들로 인한 충격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영향에 대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국가 시스템과 같은 공식적 안전망 외에도 지역사회의 안전망이 개인의 위기를 지원하여 시민에게 ‘안전’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현대 사회의 불안정성은 모든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줄타기를 하는 사람처럼 인생이라는 어려운 길을 한발 한발 조심해서 내딛어가면서 어느 순간 줄이 크게 흔들려 떨어지게 되는 위기의 순간이 생겼을 때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정책에 관한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인생에서 예상치 못하게 닥쳐오는 위기의 순간에 가족 외에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이나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처지에 관심을 가지고 기꺼이 도움을 주고자 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커다란 안전망이 쳐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community garden_dreamstime

W 씨의 불행한 상황 앞에서 지역사회 공동체가 보여준 관심과 노력이라는 지역 사회의 안전망은 W 씨 가족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또 그것을 지켜본 공동체의 일원들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일 앞에 지역 사회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를 지켜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W 씨의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와 반대로 한국에서 2년 넘게 살았던 원룸에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무관심의 사회에서 나의 삶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을 경험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참고문헌: Paitoonpong, S., Abe, S.,& Puopongsakorn,N. (2008) The meaning of “social safety nets”, Journal of Asian Economics, 19(5-6):p467-473.


아일랜드 일상다반사
국제결혼을 한 뒤 아이를 키우며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에 살면서 겪고 있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도윤
사람을 돕기 위해 공부하고 또 일하며 살다가, 이제는 아일랜드에서 아내이자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나를 알고 너를 이해하기 위하여여, 그리고 내가 쓰는 글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읽고 쓰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regina0910


'세상의 모든 문화'는 각종 협업, 프로모션, 출간 제의 등 어떠한 형태로의 제안에 열려 있습니다. 관련된 문의는 jiwoowriters@gmail.com (공식메일) 또는 작가별 개인 연락망으로 주시면 됩니다.

# 지식토스트

Copyright © 해당 글의 저작권은 '세상의 모든 문화' 필자에게 있습니다.

이 콘텐츠가 마음에 드셨다면?
이런 콘텐츠는 어때요?

최근에 본 콘텐츠와 구독한
채널을 분석하여 관련있는
콘텐츠를 추천합니다.

더 많은 콘텐츠를 보려면?

채널탭에서 더 풍성하고 다양하게 추천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