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찍는 김서현…드라마 '이글스'는 해피엔딩일까

사진 제공 = OSEN

트윈스를 잠재운 강력함

9회 말이 시작된다. 갑자기 조명이 하나 둘 꺼진다. 어둑어둑한 오른쪽 외야의 문이 열린다.

역광 사이로 뒷모습이 나타난다. 널찍한 등에는 44번이 새겨졌다. 고개를 약간 숙인, 엄숙하고, 압도적인 등장이다.

ENG 카메라가 피사체를 뒤쫓는다. 서서히 마운드를 향하는 속도가 올라간다. 천천히 걷다가, 어느 틈에 달리기를 시작한다.

동시에 관중석에서도 술렁임이 일어난다.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편다. 조명탑이 다시 밝아진다. 그라운드는 절정의 분위기로 달아오른다.

지난달 30일 대전 경기다. 한화 이글스와 LG 트윈스의 종반 장면이 화제다. 마무리 김서현의 등장씬 말이다. 마치 영화 같은 서사로 이목을 끌었다.

스코어 5-2. 3점 차를 지키기 위해 올라온 20세 투수다. 시속 160㎞에 육박하는 빠르기가 눈을 비비게 만든다. 변화구도 놀랍다. 주무기 슬라이더는 140㎞가 넘는다. 체인지업이 무려 150㎞에 가깝다.

상대는 불가항력이다. 그래도 김현수 정도 되니까, 외야까지 타구를 보낸다. 아무튼 좌익수 플라이 아웃이다. 문보경과 오지환은 아예 KO다. 슬라이더 결정구에 제대로 손 한 번 써보지 못한다. 각각 139㎞에 맥없는 헛스윙(문보경), 141㎞를 지켜볼 뿐이다(오지환).

공 15개면 충분하다. 9회 말을 완벽하게 지운다. 자신의 9번째 세이브를 성공시킨다. 박영현(KT), 김원중(롯데)과 공동 선두를 이끌고 있다. 평균자책점(ERA)은 넘사벽이다. 0.57의 역대급 숫자를 기록 중이다.

유명한 등장씬

주요 인물의 첫 장면이다. 등장씬이 인상적인 영화가 많다.

<다크나이트>의 히스 레저, <위대한 개츠비>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캐리비안 해적>의 조니 뎁, <늑대의 유혹>의 강동원, <관상>의 이정재….

야구에도 그런 게 있다. 이날 김서현의 장면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3년 전. 그러니까 2022년의 어느 날이다. 뉴욕의 시티 필드 우측이다. 역시 9회 말 불펜의 문이 열린다. 동시에 그라운드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멀리서, 조금씩, 누군가 다가온다.

관중석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몇몇은 입에 무언가 물고 있다. 장난감 금관 악기다. 그들이 일제히 스마트폰을 켠다. 장내 음향 시설과 동기화가 이뤄진다.

둥. 둥. 둥…. 둥. 둥…. 반복되는 타악기의 두근거림이 맥박수를 고조시킨다. 달아오른 팬들의 함성. 그 속으로 번호 39번이 달려 나온다. 카메라는 그의 넓은 등을 따라붙는다. 그러면서 화면 구성도 영화 스크린 비율로 바뀐다.

그 순간이다. 강렬한 트럼펫이 울려 퍼진다. 호주 출신의 프로듀서 티모시 주드 스미스, 흔히 티미 트럼펫으로 불리는 DJ다. 블래스터잭과 함께 만든 자신의 대표곡 <나르코(NARCO)>를 장엄하게 펼쳐 보인다.

메츠의 마무리 에드윈 디아즈의 등장곡이다. 중세 시대의 장렬한 출정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원곡자가 직접 나타나자 주인공은 더욱 힘을 낸다. 공 9개로 경기를 끝내 버린다.

이 곡은 우리 귀에도 무척 익숙하다. KBO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등장곡이다. KIA 타이거즈 소크라테스 브리토가 타석에 들어설 때 나왔던 음악이다.

상대를 편히 재워주는 리베라

등장곡 하면 빼놓을 수 없다. 역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에 대한 얘기다. 유일하게 만장일치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인물을 상징하는 곡이다.

양키 스타디움이 무겁게 침잠된다. 그룹 메탈리카의 묵직하고 간결한 일렉트릭 기타의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가득 채워진다.

동시에 백넘버 42번이 나타난다. 마리아노 리베라다.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맨>은 이런 내용이다.

“아가야, 이젠 기도할 시간이야.
잊지 말고 빌어야지, 모두를 위해서.
잠자리에 몸을 누이고, 따뜻한 이불이 몸을 감싸면,
그 안에서 모든 죄 사함을 받을 거야.
샌드맨이 찾아올 때까지….”

가사와 다르지 않다. 리베라가 올라가면, 모두가 잠들게 된다. 상대에게 고요한 평화와 안식을 선물하는 마무리였다.

2013년 그의 42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는 행사가 열렸다. 메탈리카는 양키 스타디움에 직접 참석해 축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화도 있다. 리베라의 고백이다.

“난 오랫동안 그 곡이 누구의 노래인지도 몰랐다. 메탈리카의 공연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솔직히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다. 난 기독교도다.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즐겨 듣지는 않는다.”

상대도 만만치 않다. 메탈리카의 멤버들 역시 양키스 팬이 아니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를 무대로 처음 시작했다. 당연히 자이언츠를 응원한다. 공연할 때 팀의 로고가 새겨진 기타로 연주하는 모습도 목격된다.

지옥의 종소리

또 있다. 인상적인 도입부의 등장곡 말이다. 마무리 투수의 원조격인 트레버 호프먼(1993~2008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을 상징하는 노래다.

‘뎅~ 뎅~ 뎅~’. 그가 나타나면 펫코 파크에 장엄한 소리가 울린다. 그룹 AC/DC의 <지옥의 종소리(Hells Bells)’ 도입부다.

그리고는 마운드에서 특유의 체인지업으로 상대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해 준다.
지금은 부산 사직구장에서 울려 퍼진다. 롯데 자이언츠의 김원중과 함께 등장한다.

우리도 남부럽지 않은 파이널 보스를 보유했다. 돌부처 오승환이다.

그는 몇 개의 등장곡을 가졌다. <소녀의 기도> <OH> <불꽃놀이> 등이다. 그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있다. 그룹 N.E.X.T의 <라젠카 세이브 어스(Lazenca, Save Us)>다. 제목부터 직관적이다.

“강철의 심장 천둥의 날개 펴고,
결단의 칼을 높이 든 자여,
복수의 이빨 증오의 발톱으로,
우리의 봄을 되돌려다오.”

김서현의 곡은 <와일드 씽>이다. 원래 영국 더 트록스(The Troggs)의 곡이다. 록밴드 X가 리메이크했다. 영화 ‘Wild Thing’의 테마이기도 하다.

주인공 찰리 쉰(극 중 리키 본)과 닮은 점이 많다. 짙은 안경, 강한 턱선이 그렇다. 시속 100마일에 육박하는 불 같은 강속구도 비슷하다.

왠지 스토리 라인도 연상되는 면이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캐릭터다. 공도 그렇고, 인생도 그랬다. 하지만 결국 방황을 극복한다. 그리고 꼴찌 팀 마운드의 핵심으로 우뚝 선다. 아마 이글스 파크의 찰리 쉰을 기대하는 팬들의 마음일 것이다.

에필로그

Wild Thing을 테마곡으로 쓴 투수가 또 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등에서 활약한 좌완 미첼 윌리엄스다.

역시 100마일을 쏜 파이어볼러였다. 그러나 들쭉날쭉한 제구가 고민이었다. 통산 192세이브, 45승 58패의 성적을 남겼다.

SK 와이번스 엄정욱의 등장곡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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