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옆면에 크게 그려 넣은 한옥과 하회탈 그림이 경북 안동에 도착했음을 실감케 한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수의 한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안동. 호텔마저 한옥형이라는 소식에 기대가 한껏 높아졌다.
이 땅을 우리보다 먼저 향유하던 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공간에서 ‘아날로그’ 매력에 흠뻑 취해 보자.
1) “만들고 부수고, 만들고 부수고” 장인 정신으로 일구어낸 ‘진짜’ 한옥 호텔
‘락고재’ 한옥 호텔. 하회마을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옛것을 누리는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 안영환 락고재 회장은 “장장 15년이 걸렸다”며 호텔에 대한 첫 소개를 했다. 높은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는 시대에 옛 방식 그대로 한옥을 짓고 싶다는 결심을 이루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옥을 콘셉트로 하는 숙박 시설이 점차 생겨나고 있지만 콘크리트와 현대식 부자재로 가득 채워 겉모습만 한옥인 시설이 대다수다. ‘차용’을 넘어서 ‘고증’을 이루어내고 싶은 안영환 회장의 고집이 락고재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초록의 풀들과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옻색 나무 기둥의 조화가 아름답다. 호텔에 당도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용도의 종이 입구에 마련돼 있다. 가볍게 흔들어 종을 울리자, 개량 한복을 입은 직원이 나와 로비로 안내한다.
정갈하고 소박한 멋이 있는 하얀 식기에 담긴 붉은색의 오미자차를 웰컴티로 제공한다. 차를 담은 식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락고재에서 사용 중인 모든 식기는 1920~3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설명이 들려온다. 작은 소품에도 옛것의 정취를 담으려는 락고재의 성격이 보이는 대목이었다.
호텔이 터를 잡은 안동 하회마을은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하다. 국내의 모든 문화유산은 문화 재단의 감독 아래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보니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곳에 상업 목적을 지닌 건축물을 들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현재도 하회마을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시간이 지날수록 문화유산 지정 구역이 늘어나고 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더욱 락고재가 하회마을에 위치하게 된 경위가 궁금해졌다. 여기에는 ‘한옥이기에 안동에 지어야 한다‘는 안 회장의 뚝심이 빛을 발했다. 락고재가 들어선 곳이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 전에 건설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내 최초로 ‘문화유산 내부에 위치한 숙박 시설’이라는 타이틀을 얻어 냈다. 한옥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열정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건설 허가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국민이 아파트에 살고 있는 시대에 한옥을 건설할 수 있는 기술자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전문적으로 한옥을 짓는 인력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며 발품을 팔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적합한 인재를 구했다고 하더라도, 건설비용에 대한 정가가 없어 부르는 것이 값이 되는 막막한 상황에 부닥치기 일쑤였다.
제대로 된 한옥을 짓고 싶다는 안 회장의 결심은 ‘한옥 학교’를 설립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옥 학교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추구한 결정이었다. 명분으로는 한옥 목수를 양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실제로 안영환 회장의 한옥 학교는 올해까지 약 80명의 한옥 건설 기술자를 배출했다. 실리도 당연히 충족했다. 락고재 안에 위치한 한옥을 기수 별로 한 채씩 짓게 만들어 학교에서 수양한 내용을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배운 내용을 토대로 원리 원칙에 따라 건축물을 짓다 보니 오히려 정교한 건설이 가능했다. 기술자를 양성해 목수 인력을 채우고 나니 인건비가 거의 들지 않아 락고재의 다른 매력을 살리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건축에서 아낀 노력과 비용을 ‘조색’에 투자했다. 한국을 여행 중인 외국인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안 회장은 “문화재의 색이 너무 쨍해서 촌스러운 듯한 느낌이 든다”는 의견을 얻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문화재를 꾸미는 대부분의 색료는 쨍하고 진한 원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문객의 20%가 프랑스인일 정도로 한옥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지대해지는 만큼, 보편적으로 기호성이 높은 온화한 색상을 활용해 락고재 이곳저곳을 칠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호텔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두 개의 정자다. 직접 조색한 파스텔 톤을 활용해 칠한 정자는 쨍한 원색을 사용하는 기존의 정자보다 세련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빛이 바랜 듯한 느낌마저 들어, 6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안동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안 회장의 색칠 공부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와였다. 진회색의 기와로 통일한 지붕은 차분하고 깔끔한 멋이 있지만, 오히려 너무 세련돼 예스럽지는 않다는 것이 안 회장의 생각이었다. 과거에는 기와를 구울 때, 지금보다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기와마다 색이 들쭉날쭉했다. 기와의 색은 온도에 따라 결정이 되는데,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다 보니 다양한 색상의 기와가 생산된 것이다.
의도적으로 온도를 조절해 다양한 색을 가진 기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자를 전국으로 수소문했다. ‘도대체 왜 실패작을 사가느냐’고 의아해하는 기술자의 궁금증을 뒤로 하고 다양한 색상의 기와를 대량 생산했다. 회장의 집념이 담긴 락고재의 지붕은 갈색부터 진회색의 다양한 기와가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뽐낸다.
락고재에 위치한 객실들은 저마다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 정해진 부지 안에 빽빽하게 건축물을 들여놓아야 더 많은 고객을 수용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세계문화유산 안에 자리 잡은 락고재는 작은 것 하나 들여놓는 데에도 문화재청의 눈치를 봐야 했다. 가까스로 건설 허가는 받았으나, 문화유산에 걸맞은 수준 높은 건축이 아니라면 심의를 통과할 수 없었다.
모든 건축물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듯한 모습은 한옥의 미를 살릴 수 없다는 문화재청의 지적에 과감하게 회랑을 없앴다. 여백의 미를 살려 띄엄띄엄 떨어진 한옥을 멀리서 보니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닌 하나의 마을처럼 보였다. 하회 마을 속 또 다른 마을이 들어선 듯했다.
아름다움을 살렸지만, 한옥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은 또다시 안 회장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객실과 떨어져 있는 화장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실내, 해충을 막지 못하는 창문은 대표적인 한옥형 숙박 시설의 단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객실 내에 필수적인 가전제품을 구비하고 현대식 화장실과 3중창을 설치했다.
하나를 해결하고 나니,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가전제품에서 나온 전선과 배관이 한옥의 고즈넉한 미를 해쳤다. 고객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가전제품의 설치는 불가피했기에, 자연스러움을 최고로 여기는 락고재만의 방식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했다. 배관 위에 흙벽돌로 탑을 쌓아 하나의 오브제처럼 연출하거나, 전선을 감추기 위해 한지로 가림막을 만들어 한옥이라는 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했다. 안 회장은 “물건이 명품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디테일’이라며, 세부적인 요소의 질을 높여 ‘한옥의 명품화’를 이루어 낼 것”이라고 밝혔다.
2) 스토리가 있는 객실, 거대한 ‘락고재’ 세계관
락고재의 모든 시설물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가지고 계획적으로 배치했다. 객실 앞에 놓인 작은 석상에도 의미를 부여할 만큼 무엇 하나 대충 만들지 않았다. 15년간 하나하나 쌓아온 디테일이 모여 거대한 ‘락고재 세계관’을 이룬다.
호텔 주위를 빙 두르고 있는 ‘맨발 황톳길’이 독특하다. 락고재가 시내로부터 떨어져 있어 대다수의 방문객이 호텔 내부에서만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마련한 즐길 거리이다. 방문객은 축축한 흙을 밟으며 안동의 푸른 자연경관과 락고재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를 만끽해 볼 수 있다. 산책을 마치고 발을 씻을 수 있는 개울이 황톳길 옆으로 흐르고 있다. 개울의 이름은 화천. 안동 주변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별칭을 차용했다.
황톳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오른쪽에 부용정이라는 객실이 자리 잡고 있다. 신혼부부들을 위해 마련한 객실로, 전체 객실이 연못 위에 떠 있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호텔 부지와 부용정을 다리 하나를 놓고 거리를 두어 신혼부부가 속세와 떨어져 그들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연출했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두꺼비상과 거북이상을 이용해 객실 앞을 꾸몄다. 방안에는 영조 대왕의 친필을 전시했다. 신하의 손자를 어여삐 여기던 영조 대왕이 생전 아이에게 직접 하사한 글귀를 방에 걸어, 왕의 기운을 받은 아이를 출산하라는 소망을 담았다.
수험생 자녀를 둔 가족을 위한 객실도 마련했다. 로비를 기준으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슈페리어룸은 뛰어난 차경을 갖췄다. 슈페리어룸에서 바라보는 산은 세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 늘어선 모양을 갖추고 있다. 세 개의 봉우리의 모습이 붓을 두는 기구인 ‘필가’를 닮았다고 해, 락고재 호텔 측에서 필가봉(필가의 모습을 갖춘 봉우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붓이나 필가 등 문구를 닮은 자연경관을 바라보며 공부한 선비들이 장원에 급제했다는 과거 속설이 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학생들이 필가봉의 기운을 받아 좋은 결과를 얻기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강인하고 우직하게 수험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학생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중앙에는 커다란 소나무를 배치했다. 5채의 슈페리어룸 사이에는 커다란 족욕탕이 있어, 수험 생활에 지친 몸을 달랠 수도 있다.
스토리를 담은 객실뿐 아니라 독특한 서비스도 즐겨볼 수 있다. 로비 옆에 위치한 다실은 간단한 다과를 즐기며 호텔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들어볼 수 있는 곳이다. 다실에서 문을 열면 전통적인 분위기의 제실이 나타난다. 전통 가옥에서 제사를 지내고 싶은 고객을 위해 제사 서비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제사 음식을 담는 도기들이 14~15세기의 유물들이라 더 특별하다.
밤에 바라보는 락고재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다. 낮게 깔린 어둠 사이로 빛나는 주황색 등불과 어렴풋이 보이는 한옥의 실루엣이 아름답다. 기와지붕 측면에 위치한 ‘합각’에 영문 모를 동그란 점들이 어둠 속에서 빛을 내고 있다. 건축물마다 동그란 점이 찍혀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점이 의아하다. 동그란 점을 따라 선을 그어보니, 사자자리가 나타난다. 10개의 별자리가 한옥 지붕 머리에 새겨져 있던 것이다. 조금 더 둘러보니 해와 달을 새긴 건축물도 있었다. 황도 12궁, 전통적인 우주관을 담아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했다. 전통적인 기술과 정신을 모두 계승하고자 하는 안 회장의 뜻이 담겼다.
3) “박물관 아니야?” 한국의 멋을 간직한 락고재
로비 안에는 거대한 규모의 목판활자 기구가 있다. ‘콘셉트에 맞추어 구비한 소품인가?’ 싶어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목판활자 기구라는 설명이 들려온다.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실제 유물이라는 사실에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가까이 붙였던 얼굴을 황급히 뗐다. 이렇게 귀한 유물을 유리관도 없이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가슴을 달래본다. 유물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거리를 제한하는 체인조차 설치하지 않았다.
목판 활자 뒤로는 뽀얀 달항아리가 보인다. 높이만 족히 50㎝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달항아리가 뿜어내는 청아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달항아리 뒤로 펼쳐진 거대한 서예화는 로비 한쪽 면을 꽉 채웠다. 넓은 로비가 유물로 꽉 차 좁아 보인다. 오랫동안 고미술품을 수집해 온 안영환 회장의 취향이 가득 반영되어 이곳저곳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객실 내부에서도 다양한 고미술품을 만나볼 수 있다. 스위트룸 객실 이곳저곳에 오래돼 보이는 도자기가 가득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도자기 앞에 놓여 있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13C 고려 백자’. 13세기, 14세기의 고미술품이 방 안 이곳저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다.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한 17세기 자기는 무려 디퓨저 용기로 사용 중이었다.
‘파손의 위험이 있는데 불안하지는 않냐’는 질문에 돌아온 안 회장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회장은 “박물관에서는 연출해 놓은 대로 감상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다”며 “한국 고미술품의 아름다움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방문객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 중인 자기를 제외하고도, 욕실에 있는 비누 받침대와 휴지통 역시 19세기에 만들어진 도기라는 점에서 안 회장의 고미술품 사랑이 느껴진다. 고미술품은 스위트룸을 비롯한 락고재 안에 위치한 모든 객실에 다양하게 비치했다.
어떤 객실에 묵더라도 한국 예술의 소탈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게 했다. 안 회장은 “예술품의 아름다움은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에 따라 결정한다”며 “한국의 고미술품은 한옥에서 가장 빛난다”고 강조했다.
안 회장이 고심한 흔적이 호텔 곳곳에 녹아 있다. 한옥을 모습은 그대로 유지하되, 투숙객의 불편함을 줄일 수 있도록 고군분투하는 사이, 장장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가장 아름다운 차경을 선보이기 위해 수백 번 나무를 뽑고 다시 심었다. 대충하는 법이 없는 안 회장의 한옥 호텔은 말 그대로 한 차원이 높다.오는 10월 중으로 오픈하는 락고재는 한옥 숙박 시설계의 새로운 역사를 작성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