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기 전에 보고싶은 건”…무대 뒤 차가운 현실 꼬집은 K발레 전설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도 부재
한국 발레 생태계의 한계 절감
獨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산하
존 크랭코 학교의 사례 인상적
시·주정부 지원덕에 재정 탄탄
포르쉐 같은 기업도 거액 후원
학교·극장 오가며 마음껏 훈련
좋은 스승과 시스템도 받쳐줘
◆ 매경 명예기자리포트 /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
그런데 한편으로 해외의 발레단을 접할수록 한국 발레 생태계의 한계를 절감한다. 특히 무용수들이 공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갖춰진 발레 전용 극장과 교육 체계를 보면 ‘죽기 전에는 이 모든 게 갖춰진 전용 극장을보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물론 전용관 없이도 지금까지 한국 발레는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해왔다. 1999년 내가 동양인 최초로 무용계 최고 권위의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무용수 상을 받은 이후 2006년 김주원(당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현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 예술감독), 2016년 김기민(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2018년 박세은(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 2023년 강미선(한국 유니버설발레단) 등 한국인 무용수가 이 상을 거머쥐었다. 이들을 비롯해 국내외 발레단에서 활약하며 한국 발레를 널리 알리는 무용수들이 많아졌다.
이런 생각은 지난 여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산하의 전문 교육기관 ‘존 크랑코 발레 학교’를 방문하며 더 절실해졌다. 학교는 내가 현역 발레리나로 1986~2016년 30년 간 몸담았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전용 극장인 슈투트가르트 오페라하우스 바로 근처, 도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2018년에 완공돼 최신식 시설을 갖췄다. 독일에 갈 때마다 들러보고 싶었지만 시간 여유가 없어 방문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처음 가봤다.
이 시간을 통해 느낀 건 ‘정말 부럽다’는 것이다. 마침 방학을 맞아 기숙사에서 짐을 싸고 있는 한 학생을 만났는데 “집에 가게 돼 좋겠다”고 말을 건넸더니 “아뇨, 난 이곳이 집보다 더 좋아요!”라고 답했을 정도다. 연습과 공연을 위한 시설은 물론이고, 건강 식단이 있는 식당과 운동·여가 시설, 언어와 사회생활을 가르치는 각종 수업 등이 마련돼 학생들은 즐겁게 발레를 배운다. 어떤 제약도, 방해도 없이 자기 기량을 갈고 닦으니 졸업하자마자 전문 무용수로 활동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이곳은 학생뿐 아니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무용수를 위한 스튜디오와 분장실도 따로 갖췄다. 극장 공간이 부족하면 수시로 학교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학생들이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으로 보였다. 발레단과 학교가 함께 공연을 올리기도 한다. 나도 현역 시절, 학생들과 함께 무대에 서며 그들의 꿈을 응원했던 교감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존 크랑코 학교의 경우, 일종의 방과 후 수업 개념인 ‘발레 학교’와 전문 교육을 하는 ‘시립 발레 아카데미-직업 학교’로 구성돼 있다. 발레 학교에선 만 7~16세 학생들이 각자의 수준에 따라 훈련받는다. 음악과 리듬을 익히는 훈련부터 기본적인 발레 테크닉, 레퍼토리, 컨템포러리 발레 등을 배우게 된다. ‘시립 발레 아카데미-직업 학교’는 18세 이하 학생들이 오디션을 거쳐 입학하는 정원 120명의 2년 과정이다. 이곳에선 다양한 무용 실기 수업과 더불어 언어, 사회학, 해부학, 화장술, 음악이론 등 학문 수업도 병행한다. 학생들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뷔르템베르크 주립극장 공연에도 직접 참여해 무대 감각을 익힌다. 2년 교육 후 최종 시험을 거쳐 국가 공인 전문 무용수의 자격도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이 시·주 정부의 재정 지원하에, 약간의 교육비를 제외하고는 무료로 제공된다는 점이다. 재능 있는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나 역시 모나코 왕립 발레 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 밖으로 나갈 필요 없이 기숙사와 연습실이 한 건물 안에 있어서 늦은 밤에도 원할 때는 마음껏 연습할 수 있었다. 독일에선 발레단에서 걸어서 5분도 안 걸리는 가장 가까운 아파트에 살았다. 무용수의 삶은 자기 몸을 갈고 닦는 자신과의 싸움인데, 그때 가장 중요한 건 시간과 효율이다.
원석을 보석으로 갈고 닦기 위해선 무용수 스스로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 재능을 더 키워낼 수 있도록 좋은 스승과 환경도 중요하다. 우선 우리 발레·무용계 도약을 위한 1순위 숙제는 발레 전용 극장이다. 전용관이 없는 지금의 국립발레단은 한 마디로 ‘집 없이 떠도는 사람’인 셈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관객이 원하는 공연을 마음껏 선보이기 어렵다. 국립발레단은 거의 매 공연마다 ‘공연 횟수를 늘려달라’는 관객 피드백을 받고 있다.
올해 국립발레단은 지역공연·해외공연을 제외하고 서울에서만 3월 ‘백조의 호수’, 5월 ‘인어공주’, 6월 ‘돈키호테’, 10월 ‘라 바야데르’, 12월 ‘호두까기인형’ 등 5편의 정기 공연을 올린다. 이중 매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11일 동안 선보이는 호두까기인형을 제외하면, 각 작품은 5회 공연에 그쳤다. 일일이 공연장을 빌려야 하고, 무대 설치와 리허설을 하는 기간까지 대관 일수에 포함해야 하므로 이 이상 공연하는 건 예산에 큰 부담이 되는 게 현실이다. 만약 전용 극장이 있다면 한 작품을 제작해두면 관객 수요에 따라 한 달에 열두 번도 공연할 수 있다. 여건이 되지 않아 공들여 만든 작품을 짧은 기간 동안 보여주고 마는 현실이 안타깝다.
공연장은 많지만, 공연할 만한 곳은 적은 것도 현실이다. 다목적 공연장을 지을 때 기획과 운영을 미리 고려하지 않아 활용도가 좋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전용관은 설립 단계부터 어떤 장르, 어느 정도 규모의 공연을 무대에 올릴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적합한 극장 운영 시스템을 찾아야 한다. 나는 운 좋게도 여러 국가의 극장을 경험했지만, 모든 시스템을 경험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많은 전문가가 계시기에 언젠가는 한국 상황에 꼭 맞는 전용 극장이 만들어지리라 기대해본다.
우리나라는 문화예술 수준도, 관객들의 문화 향유 수준도 빠르게 성장했다. 특히 공연장을 찾는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층의 관객들을 보면 분명 미래가 보인다. 다만 기술과 사회가 빠르게 발전하는 한편으로 문화예술도 함께 발전하려면, 이제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논의하고 실천할 때다. 기술적 편의 이면에 인간다움을 느끼는 일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문화예술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기에 중요하고, 전용 극장을 세우자는 제안도 결국 관객과 국민을 위한 것이다. 나를 비롯한 국립발레단과 문화예술 단체들은 오늘도 관객들이 느낄 마음의 평안을 위해 최고의 컨디션과 최상의 결과물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 정리 =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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