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한의 시대 속 28세의 청년, 5평 사무실에서 삼성 제국의 씨앗을 뿌리다
1910년 2월 12일, 국권이 침탈되던 그 해, 경상남도 의령의 부유한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다. 호암 이병철이다. 100년이 넘은 지금, 그가 남긴 유산은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거대 기업집단이 되어 세계 시장을 누비고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시작점은 비극과 좌절로 얼룩진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 호암 이병철의 초기 사업 여정과 삼성 창립 시대
>> 양반 집안의 막내, 신식 교육으로 눈을 뜨다
이병철은 경주 이씨 종손으로, 성리학의 대가였던 조부 이홍석이 운영하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를 공부했던 그는 나중에 "가장 큰 감동을 받은 책은 논어"라고 회상했을 만큼 동양 고전에 깊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신식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청년 이병철은 부모에게 강하게 건의했다. 서당 공부를 그만두고 신식 학교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부모의 뜻이 확고했던 이병철을 1919년(혹은 1922년) 진주 지수보통학교에 편입시켰다. 하지만 채 1년을 공부하지 못하고 9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했다. 비록 지수보통학교에서의 재학 기간은 짧았지만, 이곳에서 그는 인생의 중대한 인연을 맺었다. 바로 훗날 LG 그룹의 창립자가 될 구인회였다. 비록 같은 반에서 오래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이 두 거인의 만남은 한국 경제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실제로 이들이 함께 심은 소나무가 "재벌송"으로 불리며 지금도 그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이병철은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집안의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1926년에는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결혼했다. 이후 해외 유학의 꿈을 품은 이병철은 일본의 도쿄로 떠났다.

>> 와세다 대학, 병으로 꺾인 학업의 꿈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 이병철은 다른 학생들과 달랐다. 강의를 절대 빼먹지 않았고, 노트필기는 철저했으며, 심지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까지 읽어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의 부모는 한 달에 200엔을 보내주었는데, 당시 중산층 가정의 월 생활비가 60엔이던 시절이므로 얼마나 큰 지원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각기병이 그의 유학 꿈을 짓밟았다. 자취 생활로 인한 편식과 스트레스로 그는 심각한 각기병에 걸렸고, 1931년 2학년 가을 결국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돌아온 이병철은 한동안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 첫 도전, 마산 협동정미소의 성공과 좌절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이병철은 아버지로부터 사업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것은 연수 300석(年收 300石)의 재산이었다. 1936년, 26세의 청년은 경남 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자본금이 부족해 식산은행에서 차입금을 얻어야 했는데, 당시 지점장은 일반적인 정미업자가 알 필요도 없는 질문들을 퍼붓곤 했다. 곡물 가격 변동의 원인은 무엇인지, 일본 곡물 시장 동향은 어떻게 보는지 하는 까다로운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이병철은 성실하게 답변했고, 결국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본금의 3분의 2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이병철은 문제의 근원을 찾아냈다. 쌀 구매 시 시장 흐름을 반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쌀값이 떨어질 때 사고, 올라갈 때 파는 역발상 전략을 펼친 결과, 정미소는 순식간에 흑자로 돌아섰다. 이후 이병철은 운수업과 토지 매입을 통해 200만 평에 달하는 대지주로 성장했다.
하지만 천재일우(天才一遇)의 기회는 무참히 스러졌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동남아와 중국 진출을 노리던 일본이 중국 화북 지역을 침략한 것이다. 땅값은 폭락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본이 비상조치를 선언하면서 조선의 모든 은행 대출을 중단한 것이었다. 차입금으로 부동산에 투자한 이병철은 수십억 원대의 손실을 입었다. 27세의 청년이 첫 번째 완전한 파산을 경험한 것이다.
이 경험을 이병철은 생애 최고의 교훈으로 삼았다. 호암자전에서 그는 이렇게 기술했다: "이 실패는 그 후의 사업경영에 다시없는 교훈이 됐다. 사업을 운영할 때는 국내외 정세 변동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그 한계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 부산에서 대구로, 삼성상회의 탄생
모든 사업을 청산한 이병철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다음 기회를 모색했다. 그는 과일과 건어물을 중국과 만주로 수출하는 무역업에 눈을 돌렸다. 1938년 1월, 이병철은 과일 수집에 유리한 지리적 이점을 지닌 대구를 사업지로 정했다.
1938년 3월 1일, 대구 서문시장 한편의 200평 남짓한 점포에서 "주식회사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올렸다. 자본금은 3만 원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 기업인 삼성그룹의 시작점이었다.

삼성상회는 초기부터 놀라운 성장세를 보였다. 별표국수는 특히 인기였는데, 하루에 100상자 이상이 팔려나갔다. 거래 은행인 한성은행 대구지점은 개업 당시 10만 원이던 대출 한도를 1년 후 20만 원으로 늘어 사업의 호황을 증명했다. 청과류는 일본뿐 아니라 만주에서도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으며, 국수 또한 일제의 미곡수탈로 인한 식량난 속에서 빠르게 팔려 나갔다.
>> 조선양조 인수, 새로운 황금알을 거머쥐다
성공의 맛을 본 이병철은 새로운 투자처를 찾았다. 당시 대구에는 8개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 중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양조가 매물로 나와 있었다. 양조업은 허가가 제한된 사업이었기에 생산하기만 하면 팔려나가는 황금 같은 사업이었다.
1939년, 삼성상회 설립 1년 만에 이병철은 조선양조를 10만 원에 인수했다. 이 선택은 탁월했다. 조선양조는 인수 후 1년 만에 연간 생산량 1만 섬을 돌파했다. 밀주 단속이 강화되면서 정부의 규제가 오히려 조선양조의 사업을 도와주었다.
1941년 6월 3일, 개인 상점으로 출발한 지 3년 3개월 만에 삼성상회는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등록되었다. 1942년 1월 9일에는 이건희가 태어났다. 훗날 삼성의 2대 회장이 될 아들의 탄생은 이병철의 사업 기운을 더욱 높였다.
>> 광복과 새로운 꿈, 서울 진출
광복 후, 이병철은 한 가지 깨달음에 도달했다. 국제 무역의 필요성이었다. 대구만으로는 사업의 무대가 한정되어 있었다. 1947년, 이병철은 마침내 서울로 상경하기로 결심했다.
1948년 11월, 종로2가 영보빌딩 2층에 "삼성물산공사"라는 새로운 간판이 걸렸다. 자본금은 조홍제(효성그룹 창립자), 김생기, 이오석 등과 함께 출자되었으며, 이병철이 75%를 차지했다. "공사"라는 이름을 내건 것은 주거래 예정 대상이던 홍콩의 화상들이 익숙해하는 표기법을 따른 것이었다.
삼성물산공사는 폭발적 성장을 거듭했다. 설립 1년 후인 1950년 3월 결산에서 무려 1억 2천만 원의 이익금을 기록했으며, 당시 상공부에 등록된 543개 무역회사 중 7위를 차지했다. 그 다음해에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다.

>> 전쟁이 빼앗아간 모든 것, 그리고 불씨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삼성물산공사가 수입, 보관 중이던 수십만 근의 설탕, 면사, 한약재, 염료 등 모든 자산이 전쟁 속에 소실되었다. 이병철이 심혈을 기울여 5년간 축적한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조선양조의 비축 자금 3억 원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자금이 없었다면 삼성은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부산으로 피난한 이병철은 조선양조의 자금을 바탕으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재설립했다. 그 날짜는 1951년 1월 10일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불을 지핀 것이다.
>> 악성 인플레이션과 제조업 전환의 필연성
당시 한반도는 악성 인플레이션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수입품에 의존하는 무역업만으로는 한계가 명백했다. 이병철은 제조업 진출을 결정했다. 국내에서 생산한 뒤 수출해야 한다는 필연적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이 결정이 제일제당(1953년), 제일모직(1954년) 등 삼성 제국의 자산들을 낳게 되었다. 초기 자본금 3만 원으로 시작한 한 청년의 도전은 이제 한반도 경제 전체를 움직이는 거대한 엔진이 되어 있었다.
>> 최후의 평가
호암 이병철의 초기 사업은 실패와 재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각 실패에서 얻은 교훈은 다음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국내외 정세를 읽는 눈, 자신의 한계를 냉철하게 인식하는 능력,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것이 28세의 청년이 5평 사무실에서 시작한 삼성상회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1910년 국권침탈의 해에 태어난 이병철은, 100년이 넘은 지금도 한국 경제의 정신적 아버지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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