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문구] “글씨가 사라져요”…기화펜 한번 써보실래요?

조은별 기자 2025. 9. 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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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까지 알아주는 ‘요즘 문구’
독특한 공책·개성 있는 펜 취향따라 골라
기록하고 꾸미는 ‘텍스트 힙’ ‘다꾸’ 유행
‘문구는 옳다’ 작가, 소문난 문구 마니아
출장·여행 가서도 문구점 쇼핑은 필수
무중력 우주에서 쓰는 펜·퇴비 되는 연필
다양하고 섬세한 기능에 감탄이 절로
다양한 문구 관련 책을 쓴 정윤희 작가는 소문난 문구 마니아다. 그는 문구가 무한히 변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김원철 프리랜서 기자

새하얀 종이, 그 위에 글씨를 쓰는 연필이나 펜, 이를 지우는 지우개. 언뜻 생각하면 문구는 이미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그러니 더 발전할 게 있나 싶지만, 요즘 문구는 끝없이 변신하고 있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4월에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인벤타리오 : 2025 문구’ 박람회가 열렸다. 문구업체 60여곳이 참가한 이 박람회엔 2만5000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다. 뜨거운 인기에 입장권이 동나 발도 못 들인 이도 많았다. 특이한 건 방문객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성인이었다는 점이다.

요즘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는 취향에 맞는 문구를 골라 기록도 하고 창작도 한다. 독특한 공책·펜·책갈피·도장 같은 도구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글을 다루는 걸 멋있다고 생각하는 ‘텍스트 힙(text hip)’이나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같은 유행도 이런 흐름에서 나왔다.

“이제 나를 드러내는 시대가 왔어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자신의 일기장을 꾸미는 영상이 올라오죠. 예전엔 ‘일기를 훔쳐본다’는 표현을 썼고, 심지어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도 팔았잖아요? 많이 달라진 거죠.”

문구의 색다른 매력을 깊이 살펴보기 위해 정윤희 작가를 만났다. 책 ‘문구는 옳다’ ‘문구 뮤지엄’을 쓴 그는 소문난 문구 마니아다. 아버지가 만년필 같은 필기구를 모았던지라 정 작가도 자연스럽게 문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어릴 적엔 용돈 대부분을 문구점에서 썼다. 어른이 돼도 여전히 출장지 주변 문구점에 들르고 여행지에서도 문구를 산다. 그의 모든 일상엔 문구가 함께한다.

“문구의 세계는 무한해요. 볼펜 한자루에선 한가지 색만 나왔는데 어느새 삼색·오색 볼펜이 등장했죠. 이젠 시간이 지나면 필기가 저절로 사라지는 기화펜까지 있어요. 끝없이 변화하는 쓰임새가 젊은 세대의 마음을 건드린 게 아닐까 싶어요.”

다양한 기능의 펜들. 왼쪽부터 불빛이 나오는 ‘제브라 라이트 라이트 알파’, 풀이 나오는 ‘아쿠아 핏’, 정원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리라 가든’ 연필, 펜 끝에 작은 칼이 달린 ‘오토 세라믹 커터’.

서울 용산에 있는 서재 스타일의 스튜디오에서 정 작가가 그만의 물건을 풀어놓았다. 펜·도장·스테이플러 등 다양했다. 그는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 고르는 데 한참 걸렸다”며 “모두 가렵던 곳을 딱 긁어주는 색다른 기능의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먼저 수십자루의 펜을 꺼냈다. 다 일반적인 펜 같은데 뭐가 다른 걸까. 정 작가가 그중 하나를 들어 버튼을 딸깍 누르자 반딧불이처럼 빛이 났다. 이 펜의 이름은 ‘제브라 라이트 라이트(light write) 알파’. 펜 끝부분에 환한 조명이 달려 어두운 곳에서 쓰기에 제격이다. 정 작가는 “위아래가 야광으로 돼 찾기도 쉽다”며 “특히 늦은 밤 고단한 작업을 이어가는 이를 돕는 따뜻한 도구”라 설명했다.

우주에서도 잘 써지는 ‘피셔 스페이스’ 펜.

이번엔 ‘우주 최강 펜’을 꺼냈다. 어린이 만화에 나올 듯한 설명이라 당황스럽지만 실제로 우주에서 쓰인단다. ‘피셔 스페이스’ 펜은 중력이 없는 특수한 상황에 맞춰 개발됐다. ‘펜 대신 연필을 쓰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필기할 때 나온 흑연 가루나 부러진 연필심은 우주선 내부 장치를 고장 내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 펜의 특수 잉크는 물속에서도, 기름이 뿌려진 종이 위에도, 영하 35℃나 영상 125℃에서도 모두 잘 나온단다. ‘우주 최강’이란 수식어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식물을 정성껏 돌보는 ‘식집사(식물+집사)’라면 정원용 연필에 주목해보자. ‘리라 가든’ 연필의 장점은 어디서든 매끄럽게 써진다는 것이다. 연필심에 왁스가 다량 함유돼 목재 표면은 물론 플라스틱·도자기 화분 위에도 글씨를 선명하게 쓸 수 있다. 햇빛에 바래거나 비바람에 지워지는 일도 드물다. 반려 식물에 이름을 붙여주거나 물 주는 주기를 적어둘 때 유용하다. 여기에 연필밥은 흙 위에 올려두면 퇴비까지 된다니, 그야말로 식물을 위해 태어난 존재 같다.

한쪽엔 칼, 다른 쪽엔 펜이 달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이것들이 볼펜처럼 보이죠? 뚜껑을 열어보면 칼·지우개·풀·테이프가 나온답니다. 휴대하기 편리하죠.”

심 없이도 종이를 철할 수 있는 스테이플러.
택배 송장에 적힌 개인정보를 깔끔하게 지워주는 도장.
중요한 내용을 표시하는 데 제격인 북다트.

이어 그는 심 없이 종이를 철하는 스테이플러, 택배 송장에 적힌 개인정보를 단숨에 지울 수 있는 도장, 책의 중요한 내용을 표시하는 북다트까지 하나하나 설명을 이어갔다. 섬세한 기능을 가진 문구가 많아 약속한 취재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어린 조카가 제 서재에 놀러오면 밤새 구경한다”며 “남녀노소 모두와 통하는 게 문구”라고 말했다.

“아직도 새로 나온 문구를 보며 ‘불편하다고 생각한 걸 정확히 고쳤네’ 하고 놀라요.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다정한 친구 같죠. 큰 서점에 가면 필기구 코너를 한번 구경해보세요. 나를 도와주는 작은 친구를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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