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의 대가, 할리데이비슨의 굴욕과 부활 [카너먼처럼 생각하기]

이지원 기자, 정안석 대표 2023. 3. 1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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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탐구생활-브랜드 스토리
할리데이비슨 흥망성쇠 1장
위기에 대응하는 브랜드 전략
할리데이비슨은 1903년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한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한 브랜드다.[사진=연합뉴스]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은 위협이자 잠재적 리스크입니다. 당장은 힘이 미약할지 몰라도 언제든 파괴적인 경쟁자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1인기업이나 스타트업은 새 경쟁자의 등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더스쿠프의 같이탐구생활 '카너먼처럼 생각하기'에선 모터사이클의 대명사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을 통해 위기에 대응하는 브랜드 전략을 모색하려 합니다. 그 첫번째 장입니다.

한가한 주말, 서울에서 경기도 양평으로 향하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십수대의 '할리데이비슨'이 줄지어 달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배기량 500~2000cc에 달하는 거대한 차체, 우렁찬 배기음과 달리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질서정연하게 달리는 라이더들의 모습은 야성과 품위라는 이질적 매력의 조화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터프하면서도 우아한' 바이크 자체의 미적 감각은 다른 브랜드가 대체하기 어려울 정도죠.

이런 할리데비이슨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덴 영화도 한몫했습니다. 할리데이비슨이 등장하는 '와일드 엔젤(The Wild Angels·1966년)' '헬스 엔젤 온 휠스(Hells Angel On Wheels·1967년)' '이지 라이더(Easy Rider·1969년)' '터미네이터2(Terminator2·1991년)' 등이 대표적이죠. 특히 이지 라이더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미국을 횡단하는 두 히피 청년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네가 아니라 네가 보여주는 자유야"라는 영화의 명대사부터 OST인 '본 투 비 와일드(Born to be wild·Steppenwolf)'까지…. 할리데이비슨의 브랜드 유전자와 잘 맞아떨어지죠.

할리데이비슨의 두 창업자 윌리엄 실베스터 할리(William Sylvester Harley)와 아서 데이비슨(Arthur Davidson)이 브랜드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다면, 이 영화들은 할리데이비슨을 모두가 탐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유를 꿈꾸게 만든 할리데이비슨(1903년 창업)은 굴지의 모터사이클 회사로 자리 잡았습니다. 1970년대엔 미국 오토바이 시장점유율 75%를 차지했을 정도입니다.

물론 지금도 할리데이비슨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21.1%(스태티스타·2022년 6월)로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후발주자와 격차는 좁혀졌지만 왕좌를 놓치지는 않았죠.[※참고: 일본 브랜드인 '혼다' '가와사키' '야마하' 등의 미국 오토바이 시장점유율(이하 2022년 6월 기준)은 각각 17.5%, 12.8%, 11.3%입니다.]

그렇다고 할리데이비슨이 아무런 곡절을 겪지 않은 건 아닙니다. 1960년대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 브랜드 '혼다' '야마하' '스즈키' 등의 공세로 위기에 처했었죠. 1980년대 초반엔 시장점유율이 한자릿수까지 고꾸라지더니 파산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그럼 할리데이비슨은 어떻게 반등에 성공했을까요. 할리데이비슨의 전략은 경쟁사의 공세에 어려움을 겪는 1인기업이나 스타트업에 어떤 인사이트를 줄 수 있을까요? 물론 혹자는 "30년도 더 된 (할리데이비슨의) 위기 극복 전략이 지금 기업들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할리데이비슨의 위기 극복기를 그저 옛날얘기로 치부하기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럼 할리데이비슨이 승승장구하던 1960년대로 시계추를 되돌려 볼까요. 앞서 언급했듯 일본 오토바이 브랜드들은 1960~1970년대 미국 시장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브랜드는 1·2차 세계대전에서 군사용으로 쓰였던 할리데이비슨과는 달랐습니다.

마초 이미지를 폴폴 풍기던 할리데이비슨과 달리 남녀노소 누구나 탈 수 있는 '소형 바이크'를 지향했죠. 가격도 저렴했습니다. 이런 일본 브랜드는 시장 진출 초기엔 어려움을 겪었지만, 조금씩 세를 넓혀나갔습니다. 일본 특유의 디테일한 마케팅으로 소형 바이크 시장을 만들어낸 결과였죠. 이는 시장을 선도하던 할리데이비슨에 좋지 않은 시그널이었지만, 정작 그들은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일본 브랜드는 할리데이비슨의 점유율을 갉아먹었고, 경쟁에서 밀려난 할리데이비슨은 1969년 미국 레저용품 회사 AMF(American Machine and Foundry)에 매각되고 말았습니다.

AMF에 인수된 할리데이비슨은 이후 '흑역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후발주자들의 뒤를 쫓아 소형 바이크를 만드는가 하면, 골프카트까지 생산하기 시작했죠. 정체성을 잃어버린 대가는 한자릿수 시장점유율로 되돌아왔습니다.

이 회사가 반등을 꾀한 건 1981년입니다. 할리데이비슨의 경영진 13명이 AMF로부터 8000만 달러(약 1044억원)에 회사를 다시 사들인 게 계기였습니다. 13명 중엔 창업자 아서 데이비슨의 손자인 윌리 G. 데이비슨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초기 창업가 정신을 되살리면서 "독수리는 홀로 비상한다(The Eagle Soars Alone)"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죠. 할리데이비슨의 정체성을 되찾겠다는 거였습니다.

일본 브랜드와 '소형 바이크'로 가격 경쟁을 벌이던 할리데이비슨은 주력인 대형 모터사이클에 다시 집중했습니다. 품질을 끌어올리는 한편 고가의 가격정책을 펼쳤죠. 일본의 소형 바이크가 편의성이나 가격 경쟁력에 초점을 맞췄다면 할리데이비슨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감성'과 '달리는 즐거움'에 주력한 셈이었습니다.

일본 브랜드와는 다른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할리데이비슨은 독수리처럼 '비상'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이어가겠습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정안석 인그라프 대표
joel@ingraf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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