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란 무엇인가?…호주 법원의 기념비적인 판결
최근 호주의 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전용 소셜미디어 앱의 접근을 거부당한 뒤 제기한 차별 금지 소송에서 승소했다.
호주 연방 법원은 지난 23일(현지시간) 원고 록산 티클이 직접적인 차별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특성을 이유로 개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간접 차별의 피해자임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해당 앱에 1만호주달러(약 900만원)의 배상금과 소송 비용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성 정체성에 관한 기념비적인 판결로, 이번 사건의 핵심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논쟁적인 질문인 ‘여성은 무엇인가?’가 자리 잡고 있다.
때는 지난 2021년, 티클은 남성들은 입장할 수 없는, 여성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피난처라고 홍보하는 여성 전용 앱 ‘기글 포 걸스’(기글)를 다운받았다.
이 앱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성임을 증명하는 셀카를 올려야 한다. 이후 남성인지 가려내도록 설계된 성별 인식 소프트웨어가 이를 판단하는 구조다.
그러나 해당 앱에 성공적으로 가입한 지 7개월 후, 티클은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자신을 여성으로 규정하는 티클은 자신에게는 법적으로 여성을 위한 서비스를 이용할 권리가 있다면서, 자신이 젠더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티클은 기글과 기글의 CEO 살 그로버를 고소하며 그로버 CEO의 “집요한 미스젠더링(상대의 성별 정체성에 맞지 않게 지칭하는 것)”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고, 가끔 자살 충동을 경험했다”면서 20만호주달러(약 1억8000만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티클은 진술서를 통해 “나와 이 사건에 대한 그로버 CEO의 공개적인 발언은 고통스러웠으며,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부끄럽게 했으며, 지치게 하고, 상처 입혔다. 이로 인해 온라인에서는 나에 대한 혐오성 글이 이어졌고,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나를 괴롭히도록) 부추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한편 기글의 법률팀은 이번 사건 내내 성별(sex)은 생물학적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기글 측은 티클이 차별받았음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젠더(gender) 정체성이 아닌 성별(sex)을 기반으로 그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티클의 회원 박탈 자격은 합법적인 성별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해당 앱은 남성이 참여할 수 없는 공간으로 설계됐으며, 앱의 창립자가 티클을 남성으로 인지하기에, 티클의 회원 자격 박탈은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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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난 23일 판결에서 로버트 브롬위치 판사는 판례법에서는 일관되게 성별은 “변할 수 있고 반드시 이분법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며, 궁극적으로 기글의 주장을 기각했다.
한편 티클은 이번 판결이 “모든 여성이 차별로부터 보호받고 있음을 보여준다”면서 이번 사건이 “트랜스젠더 및 다양한 성별을 지닌 이들을 치유”할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에 대해 그로버 CEO는 X(구 ‘트위터’)를 통해 “불행히도 우리가 예상했던 판결이 내려졌다. 여성의 권리를 향한 싸움은 계속될 것”이라고 적었다.
‘티클 대 기글’로 알려진 이번 사건은 호주 연방 법원에서 젠더 정체성 기반 차별 혐의를 심리한 최초의 사례로, 격렬한 이념적 논쟁 중 하나인 ‘트랜스젠더 포용성 대 성별 기반 권리’가 법정에서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모두가 나를 여성으로 대했다’
티클은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젠더를 바꾸고 2017년부터 줄곧 여성으로 살고 있다.
법원 증거 제출 시 티클은 “이번 사건 전까지 모두가 나를 여성으로 대했다”고 주장했다.
“때로 눈살을 찌푸리거나, 의문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들도 있어 당황스럽지만 … 그들은 그저 제가 제 삶을 살도록 내버려둡니다.”
하지만 그로버 CEO는 그 어떠한 사람도 성별을 바꿀 수 없다고 본다. 이는 젠더 비판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이기도 하다.
티클의 변호사 조지나 코스텔로는 그로버 CEO를 반대 심문하며 “태어날 때 남성이었던 이가 수술, 호르몬 요법, 수염 제거, 성형수술을 받고 머리를 길게 기르고 화장을 하고, 여성용 옷을 입고, 스스로를 여성이라 규정하고, 남들에게도 여성이라고 소개하고, 여성용 탈의실을 이용하고, 출생증명서 상 성별을 바꾸어도 이 사람을 여성으로 인정하지 않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그로버 CEO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로버 CEO는 자신은 티클에게 ‘Ms’라는 여성용 경칭을 붙이길 거부한다면서 “티클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라고 말했다.
그로버 CEO는 ‘트랜스젠더 배타적인 급진 페미니스트’, 즉 ‘TERF’다. 젠더 정체성에 관한 담론에서 TERF는 트렌스젠더들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로버 CEO는 X에 “나는 자신이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성으로 인해 연방 법원에 가게 됐다. 왜냐하면 그(he)가 내가 만든 여성 전용 공간에 들어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이 여성 전용 공간을 사용하고자 저를 법원까지 끌어들인 여성이란 없습니다. 이 소송이 존재하는 이유는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로버 CEO는 과거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던 중 SNS 공간에서 남성들로부터 여러 차례 폭력을 경험한 이후, 2020년 ‘기글’을 만들게 됐다고 한다.
“우리 손바닥 안에 여성만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티클이 여성이라는 것은 법적으로 거짓입니다. 그의(his) 출생증명서 상 성별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여성 전용 공간의 안전은 물론 법이 반영해야 하는 기본적인 현실과 진실의 편입니다.”
앞서 그로버 CEO는 항소의 뜻을 밝히며, 고등법원까지 싸움을 이어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법적인 선례
이번 판결은 다른 국가의 젠더 정체성 권리, 성별 기반 권리 간 갈등 해결을 위한 법적인 선례로 활용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은 1979년 채택된 UN 국제 인권 협약인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이다. 사실상 여성 인권에 대한 국제 권리 장전과도 같다.
이번 사건에서 기글 측은 호주는 CEDAW 비준국이기에, 국가로서 단일 성별을 위한 공간 등 여성의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따라서 브라질에서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르기까지 CEDAW를 비준한 모든189개국에서 티클의 편을 들어준 이번 호주 법원의 소송은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국제 조약 해석 시, 각 나라의 법원들은 외국의 선례를 살펴보는 경우가 많다. 이 정도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호주 법원의 해석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젠더 정체성 주장을 들어주는 판례가 많이 나온다면 더 많은 국가에서 이를 따를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