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의 셋업맨, 투수 한승혁의 변신이 놀랍습니다. 비록 어제 등판에서 홈런을 허용하면서 연속 경기 무자책 기록이 깨지기는 했지만 이전까지 17경기 연속 무자책 기록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8홀드롤 기록하고 있는 한승혁이 지금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28홀드가 가능합니다. 이 정도면 본인의 최다 홀드(19홀드, 2024년) 기록 경신은 물론 충분히 시즌 홀드왕을 놓고 다퉈볼 만한 기록이죠.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걸까요? 일단 기록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나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위 표는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야구에 산다'에서 캡처했습니다.
확실한 변화입니다. 위력적인 구위를 가지고 있던 투수가 리그 평균보다 훨씬 낮은 비율로 스트라이크를 던지다가 이제 평균 수준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지기 시작한 겁니다. (기록통계 사이트 스탯티즈에 따르면 2025시즌 리그 전체 투구 중 스트라이크의 비율은 63.3%로 한승혁 선수는 이제 딱 리그 평균 수준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5월 10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한승혁 선수를 만나서 17경기 연속 무자책 기록을 포함해서 올 시즌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이유를 어떤 점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공격적으로 던지려는 것이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제가 항상 득점권 상황에 몰리면 초반 카운트가 불리해지고, 억지로 스트라이크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됐고, 그럴 때마다 항상 안타를 맞고 점수를 줬어요. 올 시즌은 그 부분을 신경 쓰면서 던지려고 하는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라이크를 아무리 많이 던지더라도 구위가 좋지 않으면 그냥 배팅볼일 뿐이죠. 그런데 문제는 한승혁 선수는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2011년 KIA 타이거즈에 1라운드 전체 10번으로 입단한 15년차 선수거든요. 그럼에도 15년 동안 꾸준하게 시속 150km 이상의 빠른 공을 꾸준히 던지고 있습니다. 이 비결은 뭘까요?
"부모님께서 좋은 유전자를 주신 것이 한 몫을 했죠.
그거 외에는 보강 운동과 러닝을 거르지 않는 점이 오랜 시간 동안 구속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한승혁 선수가 말하는 좋은 유전자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한승혁 선수의 아버지는 실업 배구 백구의 대잔치 시절, 대표적인 스타 플레이어 중 한 명인 대한항공의 한장석 선수거든요. 엘리트 스포츠 선수의 유전자를 타고난 건 맞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본인의 노력입니다.
한승혁 선수의 그 노력을 한화 이글스의 양상문 투수코치는 이렇게 말합니다.
루틴이 성실하고 건강한 선수입니다. 프로 입단하고 크게 빛났던 적이 없고, 힘든 시절이 길었던 선수가 이렇게 루틴이 건강하다는 것은 이 선수의 마음가짐과 노력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양상문 코치의 이야기는 또 잠시 후에 이어드리겠습니다. 한승혁 선수와의 대화로 돌아와 보죠. 지난해부터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습니다. 바로 ABS와 제구의 관계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이 어떤 지를 말이죠.
"영향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비슷한 코스(보더라인)로 갔을 때 볼로 판정이 됐던 적이 꽤 많았어요. 그렇게 되다 보면 볼 배합도 바뀌게 되거든요. 경계선 근처의 공 한 개가 스트라이크가 되는지, 볼이 되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전에 볼이 됐던 공이 스트라이크가 된 것은 의미가 크고요. 저도 믿으면서 던질 수 있게 됐고요. 지금은 확신을 가지고 던지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에 대한 확신인지 궁금했습니다.
"ABS의 경우는 볼이면 볼인 것을 인정하게 되고요. 스트라이크면 스트라이크를 바로바로 인정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스트라이크 존의 정립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한승혁 선수와는 야구장에서 오래 본 사이지만 이렇게 '확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좀 낯설었습니다.
"이전에서 이렇게 '확신'할 수 없었던 이유가 좋았다가도 금방 안 좋아졌던 적이 많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말을 하다가도 조심스러웠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신감도 생겼고, 또 야구를 오래 하면서 스스로 정립해 나간 부분도 있다 보니 이제는 좀 편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승혁 선수는 원래 포심을 위주로 하던 투수였습니다. 그러다가 두어 시즌 전에 투심을 던졌는데 2025시즌 현재는 포심만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데이터로 봤을 때 투심과 포심의 큰 차이가 없더라고요. 제 마음 편하려고 투심을 던졌는데 큰 차이가 없었던 겁니다. 포심을 던지다가도 공이 똑바로 안 갈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됐을 때 타자들이 못 치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접근법을 그렇게 바꿨습니다. 어렸을 때는 무조건 150 이상 나와야 하고 공 끝이 좋아야 하고, 타자들이 직구에 대한 타이밍이 늦어야지 '지금 좋은 공을 던지고 있다'라고 느꼈다면, 지금은 공이 가다가 변화가 되더라도 별로 상관이 없다는 마음입니다. 어찌 됐던 잘 막아내는 것이 중요한 거고요. 그런 마음을 가지다 보니 마운드 위에서 조금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한승혁 선수의 공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자연 커터나 자연 투심 같은 움직임의 공들이 가끔 보인다는 겁니다.
"그걸 제가 알고 던진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던질 때 손에 한 번씩 힘이 많이 들어갈 때가 있어요. 더 강하게 던져야지 생각하고 던지다 보면 어쩔 때는 좀 공이 잘못 채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공이 끝에서 움직임이 생겨요. 예전에는 그런 공이 나오면 '어휴 왜 이런 움직임이 생기지?'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너무 좋아요. 그런 공을 받을 때 가끔씩 포수 형들이 '포심인데 잘 좀 던져봐.'라고 할 때도 있었거든요. 요즘은 '형, 그런데 상관없잖아요. 타자들이 못 치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이런 식으로 형들한테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좀 뻔뻔하게 바뀌었습니다."
본인은 뻔뻔함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당당함일 겁니다. 그런 당당함이 2025년의 한승혁을 만든 겁니다.
한승혁 선수는 지난 2011년 프로 입단 후, 여러 보직을 오가면서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자리를 잡지 못했고, 힘들었던 시간이 더 길었던 한마디로 '만년 유망주'의 꼬리표를 달고 있었던 선수였습니다. 바로 지난 시즌 전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이랬던 한승혁 선수가 '유망주'라는 단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망주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얻는 칭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리그의 유망주들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결국에는 버티다 보면 본인만의 시간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러는 가운데서도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겁니다. 스스로 지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승혁은 지난 15년을 이렇게 버텨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면서, 또 본인의 시간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죠. 양상문 투수코치가 이야기하는 '건강한 루틴'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계발과 인내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김경문 감독과 양상문 투수코치가 한승혁 선수에게 셋업맨(앞서있거나 박빙 상황에서 8회에 등판하는 투수)의 중책을 맡긴 데에는 한승혁 선수의 성실함도 컸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양상문 투수코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승혁이는 투구 메커니즘 자체가 너무 좋았고 폼에 대해서 건들 이유가 전혀 없는 선수였어요.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자신감이 중요했죠.
그런데 준비를 너무 열심히 하는 겁니다. 사실 사람이면 안될 때 정신을 좀 내려놓기도 하고, 일탈도 하고 그러는 게 보통인데 작년부터 지켜본 한승혁 선수는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중요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김경문 감독님과 제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있어요. 열심히 하는 선수에게 기회가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8회를 책임져야 한다.'
이걸 명확하게 인식 시키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본인의 책임감을 갖도록 한 부분도 있고, 또 경기를 준비하는 데에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2025년 한승혁 선수의 이야기는 '신데렐라의 탄생'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랜 시간 동안 본인의 야구가 잘 풀리지 않았던 선수가 실망하지 않고 건강한 루틴을 지켜온 결과, ABS라는 야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아래, 땀의 가치를 알아보는 지도자들을 만나서 날개를 펴게 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제게는 신데렐라의 동화보다 아름답습니다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
영상을 통해서도 한승혁 선수를 만나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