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저 지명률 속 빛난 1순위” 방강호…2025 KOVO 드래프트 총정리

서울 강서구 메이필드호텔, 10월 마지막 주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KOVO 남자 신인선수 드래프트가 막을 올렸다. 전광판에는 48명의 이름이 떠 있었고, 그중 단 18명만이 프로 무대의 문을 통과하는 날이었다. 지명률 37.5%. 남자부 드래프트 역사상 최저 수치라는 말이 현장에 퍼지자 한숨이 먼저 새어 나왔다. 그만큼 구단들은 신중했고, 선수들은 절실했다. 하지만 탄식만 있던 건 아니다. ‘고교 최대어’ 방강호가 전체 1순위로 한국전력에 불리던 순간, 장내는 확실히 술렁였다. 지난해 김관우에 이어 역대 2번째로 고졸 얼리 드래프티가 1순위를 차지한 장면, 한국 남자배구의 세대교체가 현실이 됐음을 알리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올해 추첨 구슬 확률만 봐도 드라마였다. OK저축은행이 35%로 1순위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한국전력 30%, 삼성화재 20%, 우리카드 8%, KB손해보험 4%, 대한항공 2%, 현대캐피탈 1%가 뒤를 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한국전력이 1순위, 삼성화재가 2순위를 가져가며 예상을 뒤집었다. 한국전력은 지체 없이 제천산업고의 아웃사이드 히터 방강호를 호출했다. 키 198.4cm, U-19 세계선수권 8강을 이끈 대표팀 주포, 공격과 리시브를 동시에 책임질 수 있는 ‘겸업형 윙’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선수다. 본인은 “1순위는 상상도 못 했다. 잘못 부른 줄 알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근력 운동으로 체력을 더 끌어올려 잠재력을 프로에서 증명하겠다”고 덧붙였다. 말의 온도에서 순도가 느껴졌다. ‘당장’보다 ‘오래’ 보겠다는 태도, 1순위가 가져야 할 첫 걸음에 가깝다.

2순위 삼성화재의 선택은 또렷했다. 이탈리아 몬차와 계약하며 한국 고교생 최초로 유럽에 도전했던 아웃사이드 히터 이우진, 키 195.9cm의 탄탄한 공격수다. 2023년 U-19 세계선수권 3위를 이끌었고, 성인 대표팀으로 AVC 네이션스컵을 경험했다. 유럽 무대에서 충분히 뛰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 그는 “답답했다. 변화를 위해 드래프트에 나왔다. 공격에서 팀에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삼성화재가 최근 몇 년 외쪽 화력과 외인 의존을 줄이고 ‘국내 윙의 자립’을 가장 큰 과제로 잡아 왔던 흐름을 떠올리면, 이 선택은 계산이 분명하다. 즉시전력과 리빌딩의 교집합을 골랐다고 보면 된다.

3순위 OK저축은행은 조선대의 장신 세터 박인우를 품었다. 신영철 감독 체제에서 세터 육성은 늘 중장기 과제였고, 대학 무대에서 ‘높이+전개’라는 두 축을 함께 보여준 박인우는 그 퍼즐의 한 조각이다. 4순위 우리카드는 인하대 손유민을 불렀다. 아포짓과 미들블로커를 오가는 멀티 자원으로, 파에스 감독이 자주 활용하는 ‘속도+높이’ 전술에서 스위치 카드가 될 만하다. 5순위 대한항공은 다시 제천산업고를 바라봤다. 이준호라는 또 하나의 고교 윙을 낚았다. 임동혁-정한용 라인에 제천 출신 한 명을 더 올려, 높이와 파워의 계승 구도를 분명히 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6순위 현대캐피탈이 선택한 이름은 장아성. 지난해 충남대 소속으로 지명을 받지 못했던 그가 올해 부산시체육회로 재수에 성공했다. 블랑 감독이 ‘선택과 집중’으로 돌려 세운 팀 컬러에 미들층 저변을 더 두텁게 하려는 시도가 보였다. 7순위 KB손해보험은 한양대의 미들 임동균을 택했다. 레오나르도 감독이 빠르게 조합을 맞추는 스타일이라는 걸 잘 아는 팬들이라면, 이 선택이 ‘센터 안정화’를 향한 직진이라는 걸 쉽게 눈치챌 것이다.

1라운드가 끝난 뒤부터는 역순이다. 2라운드에서 KB는 순천제일고 리베로 이학진을 지명하며 수비 라인을 다졌다. 현대캐피탈은 2라운드를 패스했는데, 상위에서 의도한 블록을 채운 뒤 과감히 손을 떼는 ‘선택적 절제’가 최근 몇 년 이 팀이 보여온 드래프트 운영법과 닮아 있다. 대한항공은 제천산업고 리베로 정의영으로 백코트 깊이를 늘렸고, 우리카드는 명지대 미들 강건희로 중앙 탄성을 보강했다. OK저축은행은 홍익대 아포짓 마유민으로 파워 카드를 추가했고, 삼성화재는 긴 타임아웃 끝에 명지대 OH 이윤재로 외쪽 두께를 더했다. 한국전력은 2라운드를 과감히 패스했다. 이미 방강호라는 에이스 조각을 얻은 뒤, 잔여자원을 3라운드로 미뤄 ‘가성비 픽’을 노리는 그림이었다.

3라운드의 첫 이름은 다시 한국전력이었다. 중부대 김민철, 팀이 오래 들여다본 유형의 성장형 자원이다. 삼성화재는 또 한 번의 장고 끝에 패스를 선언했고, OK저축은행이 중부대 리베로 강선규를 낚았다. 우리카드, 대한항공, 현대캐피탈, KB손보는 3라운드를 모두 넘겼다. 4라운드에선 어느 팀도 지명에 나서지 않았다. 대신 수련선수 지명으로 마무리를 했다. KB손보가 경기대 아포짓 임지우, 대한항공이 경희대 미들 김영태, 우리카드가 한양대 세터 박상우, 삼성화재가 인하대 김민혁을 불러 마지막까지 문을 열었다. 수련선수는 계약금 없이 연봉 2400만 원, 정식 지명 선수는 연봉 4000만 원(계약금은 라운드별 차등)이라는 틀도 그대로 유지됐다.

숫자로 남은 사실 몇 가지를 정리해보자. 전체 참가 48명 중 대학생 39명, 고교 졸업예정 6명, 실업 2명, 해외활동 복귀 1명. 이 가운데 18명이 지명을 받아 지명률 37.5%, 역대 최저 기록이다. ‘문이 좁았다’는 평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맥락을 붙이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V-리그가 외국인 의존을 낮추는 대신 토종의 질적 상향을 목표로 하면서도, 1·2군 로스터 운용 효율을 극단적으로 따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시전력 아니면 뚜렷한 개발 포인트, 둘 중 하나가 분명하지 않으면 과감히 패스하는 흐름이 이번 드래프트 내내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취업률’은 내려갔지만, 뽑힌 선수의 ‘적합도’와 ‘필요성’은 올라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팀별 전략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한국전력은 방강호 한 장으로 윙 세대교체의 시계를 확 꺾어 돌렸다. 외인-토종-백업으로 이어지는 윙 로테이션에서 토종 1옵션을 고졸로 선점했다는 사실 자체가 모험이지만, U-19에서 이미 국제전의 속도를 경험한 선수에게 장기 투자하는 건 위험 대비 수익이 크다. 삼성화재는 이우진으로 ‘국내파 핵심 윙’의 욕심을 분명히 했고, 2·3라운드 운영에서도 외쪽 깊이와 수비 밸런스를 차근차근 채웠다. OK저축은행은 ‘세터-아포짓-리베로’로 1·2·3라운드를 채우며 축의 균형을 잡았다. 우리카드는 멀티 자원과 미들을 통해 코어의 변속폭을 키웠고, 대한항공은 제천 라인의 연장과 백코트 보강으로 ‘안정 속 힘’을 택했다. 현대캐피탈은 1라운드의 명확한 보강 뒤에는 과감히 멈췄고, KB손보는 미들과 리베로로 중앙-수비의 뼈대를 먼저 세웠다. 한 줄 평으로 요약하면, 모두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것’부터 골랐다.

무엇보다 올해 드래프트가 남긴 큰 흐름은 두 가지다. 첫째, 고졸 얼리의 위상 변화다. 방강호, 이준호 같은 고교 유망주들이 단순히 ‘미래 가치’가 아니라 ‘즉시 가용성’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고교 배구의 경기 속도와 전술 다양성이 프로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둘째, 해외·대표팀 경험의 가치다. 이우진처럼 유럽을 경험했거나 연령별·성인 대표팀을 거친 선수들이 상위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국제전의 리듬을 미리 익힌 자원은 적응 곡선이 짧고, 그만큼 실패 확률이 낮다. 리그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이 경력의 프리미엄은 더 올라갈 것이다.

지명률이 낮아 좌절한 이름들도 분명 많다. 그러나 드래프트는 끝이 아니라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수련선수로 들어와 궤도를 바꾼 사례는 이미 여럿 있다. 또 실업과 대학 무대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강점을 날카롭게 벼리면, 내년 이 테이블로 다시 돌아온다. 현장에선 “올해는 뽑힌 선수가 유독 적다”는 말이 돌았지만, 구단들은 오히려 ‘맞춤형 선발’로 질을 택했다. 팬 입장에서 보면, 당장 올겨울 코트에서 볼 신인들이 팀 시스템 속에서 빠르게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결국 드래프트는 구슬의 행운으로 시작해, 구단의 철학으로 완성된다. 한국전력의 방강호, 삼성화재의 이우진, OK저축은행의 박인우, 우리카드의 손유민, 대한항공의 이준호, 현대캐피탈의 장아성, KB손보의 임동균. 그리고 2·3라운드와 수련선수로 이름을 올린 젊은 얼굴들까지. 누가 더 빨리 코트의 속도를 얻고, 누가 더 오래 팀의 색에 스며드느냐의 싸움이 이제 시작된다. 메이필드호텔을 나서는 선수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가 ‘내일’을 보고 있었다. 그게 드래프트의 본질이고, 우리가 이 행사를 매년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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