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에서 시작해 승용차로 다가오다. 알루미늄 차체를 가진 자동차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동차를 가볍게 만들면 많은 것이 좋아진다. 출력이 낮은 엔진이나 전기모터를 탑재해도 일정 이상의 성능을 낼 수 있으며, 같은 출력의 자동차라면 연료나 전기가 좀 더 적게 들도록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무작정 가볍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자동차는 일정 수준 이상의 튼튼함을 가져야 하기에 금속으로 만드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금속으로 만들면서 가볍게 만들고 싶다는 엔지니어의 노력은 철판이 아닌 알루미늄에도 손을 대게 만들었다.
알루미늄 차체로 유명한 재규어
2002년, 재규어가 충격적인 자동차를 공개했다. 이름은 '재규어 XJ'. 이전부터 계속 만들어져 온 재규어의 플래그십 세단이지만, 이 7세대 모델(X350)은(구분에 따라 세대를 다르게 분류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소소한 분류를 따른다) 이전보다 휠베이스가 길어졌으므로 무거운 것이 당연했는데도 6세대 모델에 비해 무게 증가는 거의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안전장치와 쾌적함을 보장하는 장식들이 점점 더해지며 자동차 무게가 증가하던 시기였으니 많은 이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재규어 XJ가 이렇게 가벼워진 이유는 '알루미늄 합금 차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재규어만 알루미늄 차체를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1990년에 등장한 혼다의 스포츠카 NSX가 '풀 알루미늄 모노코크 차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아우디도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을 탑재한 플래그십 모델 A8을 1994년에 공개했다. 그리고 차체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만 알루미늄을 사용하는 것도 합치면 더 많이 언급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재규어의 알루미늄 차체는 경쟁 모델들과 어떻게 달랐을까? 본격적으로 항공기 제작 기술을 도입한 양산 모델이라는 점이 달랐다. 열팽창으로 인해 변형 가능성이 높은 용접 대신 리벳을 이용해 결합하는 방식으로 각 알루미늄 패널들을 결합했다. 그리고 여기에 에폭시 성분의 접착제를 더해 차체 강성이 증가했으며 제작 정밀도도 높아졌다. 재규어에 따르면 이때 차체 무게는 40% 정도 줄어들었고 강성은 60%가 증가했다고 한다.
알루미늄의 근사함은 이탈리아에서
자동차에 알루미늄을 사용한다는 발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제조사에 따라서도 그 주장이 뒤죽박죽되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의 레이스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 시작은 1956년에 개최된 밀레밀리아(Mille Miglia). 마시모 지롤라모 레토 디 프리올로(Massimo Girolamo Leto di Priolo)라는 이름의 레이서가 알파로메오 줄리에타 스프린트 벨로체(Alfa Romeo Giulietta Sprint Veloce)를 운전하다가 강바닥의 돌과 충돌하고 말았다.
차체가 부서졌기에 수리를 맡겨야 했는데, 알파로메오에서 수리하는 것도 비쌌기 때문에 프리올로는 자신의 차를 알파로메오 대신 자가토(Zagato)로 가져갔다. 자가토는 예전부터 알파로메오의 모델들을 다루는 데 능숙했기 때문에 믿었던 것이다. 자가토는 부서진 차체를 수리하는 대신 순정 모델보다 더 가벼운 차체를 새로 만들어 탑재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알루미늄 차체를 가진 SVZ(스프린트 벨로체 자가토)다.
일반 줄리에타보다 가벼운 SVZ는 그 뒤로 출전하는 레이스마다 압도적인 주행 능력을 보이며 우승을 거듭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자가토에 똑같은 모델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고, 밀리는 주문에 자가토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주문과는 별도로 당시 알루미늄을 가공하는 것은 어려웠다. 프레스로 찍어낼 수 있는 강철과는 달리 당시 알루미늄은 모두 손으로 두드려 만들어야 했으니 당연했다. 주문과는 달리 만든 자동차는 고작 17대.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
그 인기를 그냥 보고만 있을 알파로메오가 아니었다. 특별한 모델이 아니라 양산 차에도 경량화를 도입하길 원했으며, 그 결과 알파로메오가 직접 알루미늄 차체를 적용한 '줄리에타 SZ(스프린트 자가토)'가 등장했다. 이 차는 SVZ보다 휠베이스를 짧게 가져가고 유리 영역을 넓혔다. 1960년부터 판매된 SZ는 다양한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차체 무게가 785kg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불필요한 트렁크 부분을 잘라낸 SZ2도 등장했는데, 이때는 무게가 770kg까지 떨어졌다.
한편, 자가토는 나름대로 경량화를 조금 더 진행하고 있었다. 일반도로 주행까지 겸해야 하는 SZ와는 달리 순수하게 레이스에만 출전하는 용도의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TZ다. TZ는 Tubolare Zagato의 약자로, 자가토가 만든 파이프 프레임이라는 의미다. 파이프 프레임에 알루미늄 차체를 더한 TZ의 무게는 겨우 660kg. 그렇게 레이스를 평정하나 싶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포르쉐가 활약을 하면서 자가토의 명성은 조금 가라앉게 됐다.
알루미늄은 여전히 어려워
차체에 강철 대신 알루미늄을 사용하면서 자동차는 확실히 가벼워졌고, 성능도 연비도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루미늄은 대중화되지 못했는데, 단점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강철에 비해 비싸고 성형하기도 더 어렵다. 지금까지 소개했던 알파로메오 SZ나 TZ는 모두 장인이 손으로 알루미늄을 두들겨 만든 것이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기에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알루미늄은 사고로 부서진 차체를 원상태로 되돌리기도 어렵다.
아우디가 공장에서 알루미늄 차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1984년부터다. 꽤 일찍 시작한 셈인데 그럼에도 알루미늄 차체를 가진 A8은 1994년에야 겨우 등장할 수 있었다. 시험 제작한 알루미늄 차체는 경량화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지만, 강철 차체보다 차내 소음이 심했기 때문에 양산 모델에는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단점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는 데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만 것이다. 그 뒤로도 아우디의 알루미늄 자동차는 손에 꼽는 정도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이제는 전기차의 시대다. 지금은 엔진보다 배터리가 훨씬 무거운 만큼, 경량화는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알루미늄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 좋겠지만, 아직은 대량 생산으로 가격을 떨어뜨리는 기술까지는 없는 것 같다. 그 대신 보닛이나 서스펜션을 구성하는 부품 일부에 알루미늄을 사용해 어느 정도 무게를 줄이는 기술은 잘 도입되고 있다. 현대 아이오닉(지금의 아이오닉 5가 아니다)이 일부 부품에 알루미늄을 사용했다.
지금은 알루미늄 외 경량화 소재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주목받는 것이 바로 탄소섬유인데, 가볍고 튼튼하지만 아직까지는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맥라렌이 객석을 구성하는 프레임을 탄소섬유로 만든다고 알려져 있으며, 레이스의 세계에서는 탄소섬유 패널을 곳곳에 적용해 경량화를 진행한다. 앞으로도 중요하게 여겨질 경량화의 시대에 알루미늄이 다시 한번 빛을 볼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소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인지, 그것도 흥미로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