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캐스터가 WBC를 준비하는 방법 - 명단 지옥 탈출기

WBC 중계방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SBS의 WBC 중계방송은 저와 이대호 해설위원, 이순철 해설위원이 함께 합니다. 지금까지 수차례 리허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각국의 명단을 한글화 하고 각 선수들의 기록과 특징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SBS의 WBC 중계진입니다.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명단 정리는 매우 지루한 작업입니다. 그래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이 만들어준 자료는 눈에 잘 안 들어오거든요.
그래서 저는 모든 경기 중계방송의 선수 관련 자료는 무조건 직접 준비합니다.
국제 대회에서는 이 준비 과정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선수 명단의 한글화 작업입니다.
이게 선행되지 않으면 나머지 작업들이 아예 이뤄지지 않거든요.

방송에 나가는 선수들의 이름은 그냥 들리는 대로 혹은 우리가 소리를 내는 대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이라는 규칙 아래 각국의 언어에 따른 한글 표기법을 명시하고 있고, 이에 따라 방송 자막에 나가는 외국인 선수들의 이름은 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해야 합니다.

WBC 예선의 대한민국 경기가 열릴 도쿄돔

대략적인 방법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국가의 선수 이름을 한글화 한다고 가정하면, 일단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 용례 찾기'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선수들의 이름이 등록이 되어있고, 운이 따른다면 이전 국제 대회를 통해서 용례에 이미 등록이 되어있는 선수들은 전체 이름 검색 한 번에 한글화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전체 이름을 검색했는데 나오지 않는다면 다음 방법은 성 따로, 이름 따로 검색을 해보는 겁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성공하면 이것만 해도 절반의 성공입니다. 전체 이름의 절반 가까이를 채울 수 있으니 작업이 한결 편해집니다.
이제 문제는 남아있는 부분입니다. 성은 검색이 됐는데 이름이 남아있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또 심지어 아예 검색이 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지난 K-베이스볼 시리즈, 도쿄돔 중계석에서의 3인

이 경우 음절별 검색을 해야 합니다. 용례 찾기에 발음이 되는 음절 단위로 검색을 해봅니다. 여기까지 작업을 하면 대략 80%가량의 이름은 한글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남아있는 20%는요? 국립국어원 홈페이지로 갑니다. 그리고 ‘A국어의 한글 표기법‘을 통해 해당 철자를 어떻게 한글로 표기하는지를 확인하고 바꿉니다.

정말 예외로 이렇게까지 해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유럽, 북유럽, 아프리카 대륙 선수들의 이름을 한글화 하는 것이 이래서 어렵습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나오지 않는 몇몇 이름의 경우 Forvo 등, 각국의 언어를 발음해 주는 앱의 도움을 받아서 들어보고 바꿉니다.
단 혼자 듣지 않고, PD와 기록원 등과 함께 들어보고 결정합니다.
그리고 기존의 용례와 비슷한 철자가 있을 경우는 그 경우를 참고합니다.

도쿄돔 K 베이스볼 시리즈에서 대표팀 기념 촬영

자! 그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WBC 예선 C조에 일본, 대만, 호주, 체코와 한 조에 배정이 됐습니다. 비교적 한글화에 수월하고 익숙한 일본, 대만, 호주와 함께 한글화 난이도 중상 수준의 체코와 한 조입니다.
여기서는 대만, 체코, 호주의 몇몇 선수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만의 선수 명단을 확인하는데 아주 익숙한 얼굴이 있습니다.
20 Kuan-Yu Chen 선수요. 너무 익숙해서 어떻게 읽는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검색을 해보겠습니다.

대만의 20번 투수 많이 익숙하죠? <WBC 홈페이지 캡쳐>

엇? 안 나옵니다.
대만과 중국의 선수의 경우 만일 검색이 안될 경우 한 가지 방법을 더 써봐야 합니다. 이 선수의 한자이름이 어떻게 되는지를 확인해 보는 거죠. Kuan-Yu Chen의 한자 표기는 陳冠宇입니다. 한자로 검색을 해보니 한 방에 나왔습니다.
'천관위'

거의 10년 가까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선발로 등판했던 왼손 투수입니다.
이 이름이 검색이 된 것도 다행인데 그 외에도 상당한 소득이 있습니다. 그럼 이걸로 일단 Chen은 '천'으로, 'yu'는 '위'로, 'uan'이 '완'으로 표기된다는 것도 함께 알게 된 겁니다.

검색 성공입니다. 이러면 작업이 한결 수월해집니다. <국립국어원 화면 캡쳐>

이어서 한국전 출전이 유력한 세 명의 선수를 한글화 해보겠습니다.

00 Jo-Hsi Hsu 徐若熙
하이픈을 빼고 Hsu JoHsi로 검색했을 때 안 나옵니다.
따로 검색을 해봅니다. 성인 Hsu 먼저. 검색은 되는데 결과에 중국어 결과는 없습니다.
JoHsi 역시 없습니다.
한자로 한 글자씩 보겠습니다. 성인 徐 먼저. 다행히 검색이 됩니다. '쉬'로 표기하는군요.
徐는 중국에서는 XU로 표기하는데 대만에서는 HSU로 표기하나 봅니다.
若는 중국어로 '뤄'라고 표기하는데 대만어와는 차이가 매우 큽니다. 대만 표기로는 Jo니까요.
熙는 '시'로 검색이 됩니다.
따라서 00 Jo-Hsi Hsu 徐若熙는 중국어로는 쉬러시로 표기해야 하는데 대만의 경우는 쉬조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PD와 협의가 필요한 사항입니다

대만의 00번과 11번 투수들의 이름은 어떻게 한글화를 해야 할까요?

11 Ruei-Yang Gu Lin 古林睿煬
이 선수도 영어표기로는 검색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 한자로 검색을 해봅니다.
古는 구, 林은 린, 睿煬은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그중 Yang은 '양'으로 변환을 할 수 있으니 'Ruei'를 놓고 '뤠이'로 할지 '레이'로 할지를 결정합니다.
외래어를 표기할 때 이중모음을 단모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자음인 'ㅈ,ㅊ'과 함께 쓰일 때니 Ruei는 '뤠이'로 하겠습니다.
11 Ruei-Yang Gu Lin 古林睿煬는 '구린뤠이양'으로 표기할 예정입니다. (혹시 변동이 생기면 또 알려드리죠.)

45 Yu-Min Lin 林昱珉
한층 쉬워졌습니다. 이미 위에 세 음절 중 두 음절이 나왔습니다. '린위'까지는 확인을 했고 마지막 珉을 검색해 보죠.
이걸로는 안 나옵니다. 위 글자는 임금왕 부수에 백성민자(표기가 min이니까요)를 쓰는 형성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의미를 임금왕자가, 음은 백성민자가 가지고 있는 거죠. 그러니 民으로 검색을 무리가 없겠습니다.
民을 검색하니 다행히 '민'으로 표기합니다.
45 Yu-Min Lin 林昱珉은 '린위민'입니다.
천관위의 대를 이어서 지난 아시안 게임부터 프리미어 12까지 우리 대표팀을 상대로 표적등판하고 있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벡스 AAA의 선발투수입니다.

45번 투수의 이름은 '린위민'입니다.

대만은 멀티 이닝을 소화할 수 있는 강속구 선발자원을 투수진에 대거 포함시켰습니다.
우리를 상대로는 이 세 선수가 번갈아가면서 멀티 이닝을 소화할 가능성이 큽니다.
시속 155km 이상을 투구하는 위 두 명의 강속구 선발 투수들보다 이제 차라리 아시안 게임과 프리미어 12를 통해서 4경기나 공을 봐서 나름 익숙할 린위민 선수가 선발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누가 나오건 힘겨운 싸움을 예상합니다.

프리미어12 한국전에 선발등판한 대만의 린위민 <사진 OSEN>

체코는 지난 시즌을 마치고 진행한 평가전을 통해 다행히 한글화를 해뒀습니다.
여기서는 투수 Lukas Hlouch 88 딱 한 선수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88번의 경우 그냥 Lukas는 그냥 루카스가 아닙니다. 그의 이름은 Lukáš입니다. 이는 표기법상 '루카시'가 됩니다.
Hlouch는 당연히 검색이 안되니 비슷한 경우를 따져봐야 합니다. 'HL'을 어떻게 발음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니 예전 아스날에서 뛰었던 흘렙(HLEB)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국적은 벨라루스니 비슷하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HLO, HLE, HLA 등을 순차적으로 검색을 해보니 체코어가 운 좋게 하나 걸렸습니다.
Jihlava를 '이흘라바'라고 표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hl은 '흘ㄹ'이라고 표기하면 되겠습니다. 모음 'ou'는 표기법에 따르면 오우로 읽히고, ch는 'ㅎ'입니다.
Hlouch를 합치면 '흘로우흐'가 되는데 외래어 표기법의 간결화 규칙에 따라 '흘로흐'로 적어도 무리가 없습니다.
88 Lukas Hlouch은 이렇게 '루카시 흘로흐'로 표기합니다.

지난해 K 베이스볼 시리즈에 참가한 체코 대표팀. <사진 OSEN>

이렇게 외국인 선수의 이름이 방송에서 한글화가 되는 과정을 여러분께 자세하게 소개해드렸습니다.
다음 달에 있을 WBC도 모든 선수들이 이 과정을 거치지만 현재 한참 진행 중인 올림픽 중계방송의 외국인 선수 이름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여러분께 전달되고 있을 겁니다.
사실 법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그걸 따르기만 하면 되니까 이 일은 솔직히 귀찮지만 매우 속 편한 작업입니다.
그 과정에서도 매우 사소한 고민은 있습니다. 가끔은 실수로 보이는 이름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K 베이스볼 시리즈에 등판했던 체코의 Jan Novak(얀 노바크). 이 정도 이름이면 한글화 난이도 0단계로 수월한 수준입니다. <사진 OSEN>

이번 WBC에도 그런 선수가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조의 호주 투수 중 'Jack O'Loughlin'이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왼손투수로 지난 2023 WBC에도 우리를 상대로 선발로 나왔던 좌투수입니다. 읽어보면 '잭 올러글린'입니다.
이 투수의 이름이 표기법에 올라와있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Alex O'Loughlin이라는 호주의 배우가 용례에 있습니다.
그는 '앨릭스 올러클린'이라고 올라와 있습니다.

왜 O'Loughlin이 올로클린이 되는 걸까요? 분명한 실수가 보이는 대도 우리는 이걸 따라야 하는 걸까요?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틀린 것을 알면서도 표기법을 따르는 것이 맞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맞다!'면서 바꾸는 것이 맞는 것인지요.
지난 2023년 WBC에서는 이 선수를 '잭 올러클린'으로 표기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만날 가능성이 매우 큰 이 선수의 이름은 '올러글린'일까요? 아니면 '올로클린'일까요?

<SBS스포츠 정우영 캐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