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G의 성공으로 그랜저는 현대차 포트폴리오에 빼놓을 수 없는 주력 차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탄력을 받은 현대차는 후속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2005년엔 모두의 기대와 관심 속에 4세대 모델 '그랜저 TG'가 출시됐죠.
외관은 번쩍이는 크롬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던 전작과 달리, 인상이 한결 중후하고 수수해졌습니다. 이번에도 신형으로 거듭난 쏘나타의 차체를 이용해 개발된 만큼 NF 소나타와 유사한 가로선이 강조된 디자인으로, 안 그래도 넓은 전폭이 더 넓게 느껴졌어요.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 차의 영향을 받았던 이전 세대 모델들에 비해 실제로 덩치가 눈에 띄게 커지면서 주차에 어려움을 겪는 소비자가 속출했었죠. 전작의 멋들어진 프레임리스 도어는 일반적인 풀 도어로 변경되어 아쉬움이 남았지만, 부드럽게 떨어지는 아치형 루프라인과 풍부한 볼륨감의 측면, 다시금 일자로 이은 거대한 'LED 테일램프'와 듀얼 머플러를 더한 후면부로 쏘나타와는 확연히 차별화된 고급 차다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심플하면서도 유행을 타지 않는 '타임리스' 디자인은 세월이 지나야 그 진가가 드러나는데, 이 차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어요.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여전히 매력적이죠.
다만 앞서 출시된 5세대 NF쏘나타와 디자인이 너무 유사해 외려 고급형 쏘나타로 돌아간 것 같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패밀리룩'이라는 개념이 익숙지 않았던 데다 실제로 멀리서 보면 NF 쏘나타와 구분이 잘되지 않을 정도이긴 했으니까요. 그나마 가로 그릴에 '뿔'이 들어간 초기형 모델들은 괜찮았는데, 이후 보행자 안전 규정이 강화되어 뿔을 삭제하면서 쏘나타와 더욱 비슷해졌습니다.
또 LED 테일램프를 전 사양 기본 적용하면서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기도 했는데요. 요즘처럼 간접 조명 형태가 아닌 땡 LED를 촘촘하게 박아놓은 구성이었기 때문의 뒤차에 엄청난 눈부심을 유발했어요. 원조 '눈뽕티지'는 스포티지가 아니라 이 차였죠.
수수하고 넙데데한 외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한 실내는 전작의 좌우대칭을 넘어서 운전자를 감싸는 '랩 어라운드' 스타일로 꾸몄고, 마치 거실 같은 공간감이 특징이었습니다. 떡칠하기 바빴던 우드그레인은 적재적소에 포인트로 추가해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고, 특히 시트가 아주 푹신푹신했던 게 기억에 남네요.
트립컴퓨터는 시인성이 뛰어난 슈퍼비전 클러스터로 이사 왔고, 후방카메라를 더한 7인치 대화면 DVD 내비게이션과 10개 스피커의 JBL 고급 오디오, 스티어링 휠, 사이드미러가 연동되는 메모리 시트 등 기존에 있던 편의사양을 업그레이드한 것은 물론, 개선된 모젠 시스템과 '스마트키' 등 첨단 사양까지 갖춰 그랜저다운 편의성으로 무장했습니다.
특히 이전 세대에서는 규격화된 오디오 및 공조 장치, 'DIN' 규격의 모듈을 사용하면서 차종마다 동일한 제품을 돌려썼지만, 신형으로 거듭나면서 아예 인테리어에 걸맞은 디자인을 적용해 실내 분위기를 이끄는 중요한 디테일로써 기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프터마켓 내비게이션을 시공하면 제품에 따라 오디오 유닛이 턱주가리처럼 툭 튀어나와 있던 게 떠오르네요.
더욱 넉넉해진 뒷좌석은 전작의 편의장비는 물론 '후방 전동 블라인드'와 나중에는 '6:4 뒷좌석 전동 리클라이닝'까지 추가해 중요한 손님을 모시기에 충분한 공간을 제공했습니다.
견고해진 프레임과 사이드 커튼 에어백을 탑재해 승객 안전성도 더 보강했어요.
파워트레인도 모두 신형으로 교체됐습니다. 새로 개발한 'V6 2.7L 뮤 가솔린 엔진 및 LPi 엔진'을 주력으로 V6 3.3L 람다 가솔린에 5단 자동변속기를 맞물려 쏘나타와 확실히 차별화된 매끄러운 주행감을 제공했습니다. 이 초기형 뮤, 람다 엔진의 부드러운 질감은 GDi 엔진을 탑재한 후속들보다 고급스러웠어요.
이전에 있던 전자제어 서스펜션은 빠졌지만, 플랫폼과 전자제어장치가 개선되면서 승차감과 고속 주행 안정성이 향상됐고, 여전히 물렁한 하체는 소비자층을 고려하면 당연한 세팅이었습니다. 다만 육중해진 몸무게에 비해 빈약한 1-피스톤 브레이크 시스템을 갖추면서 제동 성능은 전작만 못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죠.
이후 연식 변경을 통해 수출용에 적용되던 3.8L 람다 엔진을 탑재한 'S380' 트림을 신설했죠. 당시 국산차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력한 성능을 제공하면서 초대 '인터넷 슈퍼카' 중 하나로 군림했던 SM7의 'VQ 3.5L'에 맞서는 그랜저 오너들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했습니다.
해외에서 이삿짐으로 역수입된 3.8L 모델들이 있긴 했지만, 이 S380 모델은 모든 옵션이 포함된 차량인 데다, 출고 가격이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NF 쏘나타의 'V33' 모델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희소성을 자랑했어요.
또 NF 쏘나타에 적용된 2.4L 쎄타 가솔린 엔진을 적용한 'Q240' 트림을 신설하기도 했는데, V6 2.7L 엔진이 주력인 상황에서 4기통 MPI 사양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굼뜨다는 지적을 받았죠. 물론 여론이 부정적이었을 뿐 뛰어난 가격 접근성 덕분에 적지 않은 숫자가 판매되었는데, 길에 보이는 TG는 무조건 'Q270' 아니면 'L330'이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답했다'는 이 광고 모르시는 분들 없죠? '물질만능주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반감을 샀는데, 수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아직까지 회자되는 걸 보면 마케팅 담당자 입장에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것 같아요.
강렬한 광고와 함께 2008년 등장한 '1차 부분 변경 모델'은 '뉴 럭셔리'라는 서브네임을 붙였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기 때문에 내·외관 모두 변화는 크지 않았습니다. 입체감을 더한 라디에이터 그릴과 새로운 디자인의 알루미늄 휠로 신선함을 더했고, 가로로 긴 번호판, 리어램프는 LED를 기어이 한 줄 더 추가해 더욱 강력한 눈부심을 선사했죠.
실내는 연두빛 조명을 현대차 브랜드 컬러로 자리 잡은 푸른색으로 교체 도시적인 분위기를 냈고, 차분한 색상의 우드그레인, USB와 iPod을 연결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등 트렌드에 발맞췄습니다.
판매량이 저조했던 3.8L 모델이 단종되면서 '그림의 떡'이었던 뒷좌석 전동 시트가 3.3L 모델로 내려왔어요.
특히 '듀얼 디스플레이'라는 옵션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는데, 단순히 모니터 2개를 달거나 화면을 분할하는 단순한 형태가 아닌 한 화면으로 주행 중 운전석에서는 내비게이션을, 조수석에서는 미디어를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기능이었습니다. 다만 당신 기술의 한계로 안 그래도 안 좋았던 화면 해상도가 이 기능을 적용하면 더 안 좋아졌고, 사악한 가격 때문에 선택율이 저조했기 때문에 얼마 안 가 삭제됐습니다.
그 대신 2009년부터는 '쏘나타 트랜스폼'에서 먼저 선보인 '인텔리전트 DMB 내비게이션'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제공해 좋은 반응을 얻었죠. 여기에 '버튼 시동 스마트키'와 전방카메라, 엔진 라인업의 출력을 끌어올리고 새로운 6단 자동변속기를 탑재해 파워트레인에도 변화를 줬습니다.
그 사이, 호랑이 기운을 등에 업고 나타난 기아 'K7'이 기대 이상의 돌풍을 일으키면서 그랜저에 비상이 걸렸죠. 비록 '한 식구'이긴 하지만, 그룹 내에서 엄연히 경쟁 구도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현대차는 부랴부랴 '2차 페이스리프트 모델'인 '더 럭셔리 그랜저'를 출시해 K7을 견제했어요.
외관은 헤드램프와 범퍼 디자인을 수정하면서 인상이 확연히 달라졌는데, 블랙 베젤 헤드램프와 'LED 포지셔닝 램프'로 뚜렷해진 동공은 공격적인 인상을 넘어 흑화 한 것 마냥 사악해 보이기까지 해서 호불호가 갈렸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하이퍼 실버 알루미늄 휠과 면적을 넓히고 내부 그래픽을 수정한 테일램프, '범퍼 일체형 듀얼 머플러'로 존재감을 높인 것이 특징이었죠.
한편, 시트와 도어트림 등 실내 곳곳을 '알칸타라'로 꾸며 고급감을 높이는 '알칸타라 에디션'을 한정 판매해 과거 1세대 그랜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랜저 TG는 출시 전 계약만 1만여 대로 역대 신차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전 계약 대수를 자랑했어요. 1위는 놀랍게도 '트라제 XG'였죠. 출시 첫해인 2005년 12월에는 그랜저 최초로 월 판매 1만 대를 돌파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량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현대차들이 지금도 훌륭하다는 평가받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브랜드 밸류를 높이고자 현대차가 칼을 갈기 시작할 때 나온 모델인 만큼 차량의 완성도와 상품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샐러리맨의 로망' 그랜저라는 명함의 가치가 더해지면서 국내에서만 총 40만 대가 넘게 판매됐습니다.
품질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해외시장도 적극적으로 공략했는데요. 자동차의 본고장인 유럽 시장을 위해 디젤 모델까지 준비하는가 하면, 주력인 북미 시장에는 전작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AZERA'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투입했고, 다른 현대차 라인업과 마찬가지로 넓은 실내 공간에 풍부한 편의장비, 깔끔한 디자인과 가성비를 앞세워 현지 자동차 전문 매체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포드 토러스'나 '도요타 아발론', '닛산 맥시마' 등과 경쟁했고, 적지만 의미 있는 판매량을 기록했죠. 전작에 이어 일본에도 소량 수출됐는데, 일부 차량이 택시로 쓰이면서 내구성을 입증하기도 했어요.
국내에서는 렉서스의 전륜구동 럭셔리 세단 'ES'를 경쟁 차로 호기롭게 지목했지만, 그저 현대차의 바람이었을 뿐 아무도 비교하는 사람이 없었고, SM5발 리스크로 마르샤 꼴이 나버린 SM7과 '폭스바겐 파사트' 등 운 좋게 기아 K7 등장하기 전까지 이렇다 할 경쟁차 없이 좋은 성적을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다만 워낙에 많이 팔리다 보니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데다 택시와 렌터카로도 흔하게 탈 수 있게 되면서 '대중 차 이미지'가 강해졌고, 후기형으로 갈수록 고급 차 간판이 무색하게 티 나는 원가 절감이 이루어지면서 그로 인한 고질병에 시달리는 등 말년에 체면을 구기기도 했습니다.
초기형 모델은 차체 부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후기형 2.7L 모델은 주행거리에 따라 엔진 부품의 하나인 '밸브 리프터'인 '태핏'에 유격이 생겨 '딱딱딱딱' 하는 소음이 나는 고질병이 있었는데, 같은 '뮤 엔진'을 사용하는 K7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했던 문제였죠. 수리를 통해 태핏을 교체하면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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