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줄임표, 다른 망설임 [프리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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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쓰며 연락했던 다른 취재원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2022년 교원평가 서술형 문항에 적힌 성희롱 문구를 공론화하고 학교를 떠난 교사 가넷은 "지 선생님을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라며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괜찮으니 묻지 마라'고 하는 어른과 '나는 괜찮은데 아이들이 걱정이다'라고 말하는 어른 중에 학교에 남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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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임. 정년을 2년 앞두고 해임이라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라고 쓰다가 지웠다. 평생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헌신했던, 그러나 이제는 그 일로부터 철저하게 배신당한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점잖은 말은 없었다. 교내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라고 요구하다 다른 학교로 발령 난 지혜복 교사는 지난 7개월간 새 학교로 출근하는 대신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부당한 전보를 취소하라는 피켓을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담은 기사가 아직 인쇄소 윤전기를 따라 돌고 있을 때, 서울시교육청은 그에게 해임을 통보했다.
기사를 쓰며 연락했던 다른 취재원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2022년 교원평가 서술형 문항에 적힌 성희롱 문구를 공론화하고 학교를 떠난 교사 가넷은 “지 선생님을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라며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이었다. 가넷은 문자를 읽자마자 “?”라고 답장했다.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 “성범죄를 저지른 남 교사들에게도 안 내리는 해임이라는 중징계를요?” 다시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이 고민을 왜 내가 하고 있는 걸까.
어떤 목소리가 떠올랐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던 학교의 한 관계자는 피해 학생들이 지금은 잘 지내고 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요 기자님, 이제 그 아이들도 잊고 싶어 해요. 자꾸 그 이야기를 꺼내면 뭐랄까, 아주··· 짜증스러워해요.” 2차 가해에 시달리다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한 피해자가 왜 사건을 ‘잊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이해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어차피 아이들은 졸업할 거고 자신은 평화롭게 은퇴할 테니. 그가 ‘아주’ 뒤에 적절한 단어를 찾기 위해 잠깐 숨을 멈춘 게 그렇게 짜증 날 수가 없었다.
그 머뭇거림은 또 다른 머뭇거림을 생각나게 했다. 3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마친 뒤 다시 피켓 시위를 하러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시선을 느낀 지혜복 교사가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치듯 말했다. “아이들이 자기들 때문에 제가 쫓겨났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요, 그 죄책감을 평생 남길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갈 거라는 게 아니고 돌아가야만 합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게 해요? 저는··· 저는 괜찮습니다.” 다시 들어본 인터뷰 녹음 파일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정말 그는 괜찮은 걸까. ‘아이들은 괜찮으니 묻지 마라’고 하는 어른과 ‘나는 괜찮은데 아이들이 걱정이다’라고 말하는 어른 중에 학교에 남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미약한 들숨 속에 섞여 있던 망설임이 잊히지 않는다.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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