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G그룹 2대 회장으로서 기술입국(技術立國)의 신념을 평생 실천한 상남(上南) 고(故) 구자경 명예회장이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1925년 4월24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전자와 화학을 양대 축으로 한 LG그룹의 산업화 기반을 다졌고 대한민국 재계 최초의 '무고(無故) 승계'와 '아름다운 계열분리'를 실현한 인물로 기록된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구 명예회장의 경영 아래 LG는 수많은 국내 최초 제품을 시장에 선보였고 기술 자립과 인재 육성을 기반으로 한 조용한 혁신을 이어갔다. 그가 남긴 철학과 제도, 조직 문화는 오늘날까지 LG그룹의 근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책상보다 공장서 배운 리더십
젊은 시절 교사였던 구 명예회장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부친이 설립한 락희화학(현 LG화학)에 입사하며 경영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부산 범일동·연지동 등지의 공장에서 20년 가까이 연지동 등지의 현장을 누비며 실무를 익힌 그는 10년 넘게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생산현장을 삶의 중심에 두었다. 이 시기부터 LG그룹 총수는 실무 경험을 거쳐야 한다는 현장 수련 전통이 뿌리내렸다. 아들 구본무, 손자 구광모 회장 모두 회장직에 오르기 전 10년∼20년에 걸쳐 현장을 돌며 경영 수업을 받은 것도 이 전통의 연장선이다.
현장에서 기업을 배운 구 명예회장은 1970년 부친의 유고로 만 45세의 나이에 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LG의 전신인 럭키금성그룹은 창업 1세대와 방계 일가, 동업자 집안 등이 얽혀 있었지만 장자승계 원칙에 따라 큰 충돌 없이 리더십이 이양됐다. 창업 원로들 또한 동반 은퇴하며 세대교체를 지원했다. 구 명예회장은 이러한 매끄러운 경영권 승계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고 곧바로 그룹 혁신에 나섰다.
교사에서 기업인으로 전환한 이력은 특유의 교육자적 안목과 실행 중심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는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할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자"는 철학 아래 가전 국산화와 전자산업의 내재화에 집중했다. 해외 기술도입 시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배워 철저히 우리 것으로 만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만큼이나 사람을 중요하게 여긴 경영자였다. 특히 연구개발(R&D) 분야에 대한 집요한 관심은 인재 중시 철학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는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는 말을 남기며 연구 환경의 질이 곧 인재 확보의 출발점임을 강조했다.
그는 연구소에 우수 인력을 우선적으로 배치하도록 했고 임원 정원 제한 없이 인재를 적극 채용했다. 관련 예산 역시 가장 먼저 승인했다. 그룹 차원의 연구개발상을 제정해 연구원들의 동기를 북돋는 등 기술 인재를 핵심 자산으로 인식한 조직 문화를 정착시켰다. 이는 훗날 LG가 연구인력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조직문화의 기틀이 됐다.
1980년대에는 LG그룹 차원의 인재교육기관인 '인화원'을 설립해 실무형 인재 양성에 나섰다. 1989년에는 LG연암문화재단을 통해 국내 최초로 대학교수 해외연구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구 명예회장은 재단 이사장 역임 당시 거의 빠짐없이 증서수여식에 참석해 교수들을 일일이 격려했을 만큼 이 지원사업에 큰 애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학벌이나 출신보다 실력을 중시한 인사 철학도 그의 경영 특징 중 하나였다. 말단에서 시작한 인재가 임원까지 올라가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고 "구자경 회장이 한 번 눈여겨본 인재는 반드시 쓰임이 있다"는 말이 그룹 내부에 회자되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열어두고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으로 조직을 이끌었던 그의 리더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내 소임은 끝났다"… 조용히 물러난 리더, 끝까지 지킨 품격
구 명예회장은 1995년 만 70세에 회장직을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넘기고 자발적으로 퇴진했다. 현역 총수가 별다른 대외부 압력 없이 자발적으로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준 첫 사례였다. 당시 그는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 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다"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 결정은 단독 행보에 그치지 않았다.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젊은 경영인들이 소신 있게 경영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동반퇴진을 단행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퇴임 이후 구 명예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그의 철학은 2005년 LG그룹의 계열분리 과정에서도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당시 LG는 방계 일가와의 분리를 충돌 없이 매듭지으며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구 명예회장 직계 가족은 전자, 화학, 통신, 서비스 부문을 맡아 LG그룹으로 잔류했다. 허씨 일가는 정유·유통·홈쇼핑·건설을 중심으로 GS그룹을 출범시켰으며 구씨 방계(구태회·구평회·구두회)일가는 LS그룹을 통해 전선·산전·비철금속 등 중후장대 산업을 맡았다.
계열분리가 충돌 없이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구인회 창업회장의 유훈과 이를 실천한 구자경 명예회장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 창업회장은 생전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는 말을 남겼고 구 명예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상호 신뢰와 절제, 의리를 중시하는 인화(人和)의 리더십을 실천해왔다. 상호 신뢰, 절제, 의리에 기반한 신념 덕분에 LG는 한국 대기업 역사에서 보기 드문 평화로운 경영 분리를 이룰 수 있었다.

은퇴 이후 구 명예회장은 자연과 함께 조용한 삶을 이어갔다. 경남 하동 지리산 자락과 충남 천안시 성환의 연암대학교 농장을 오가며 도심의 화려함 대신 소탈하고 절제된 일상을 선택했다. 삶의 중심이 된 것은 자연, 그리고 배움이었다.
특히 연암대 부지에서 버섯 재배와 생물자원에 대한 연구에 깊이 몰두했다. 젊은 시절 나무를 가꾸며 시작된 취미는 은퇴 후 농업과 생태 전반으로 확장됐다.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무엇을 하나 시작하면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출 때까지 깊이 파고드는 열정은 기술경영자로서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집요한 탐구정신은 은퇴 이후에도 여전했던 셈이다.
구 명예회장은 후배들에게 "절대로 1등만 하려고 하지 말라"는 다소 독특한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이 발언에 대해 생전 구 명예회장은 생전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다. 예전엔 정말 정치적으로 견제도 받았고, 반대 세력이나 노조로부터 공격받은 일도 있었다. 1등은 되도록 하지 말라고 했다"고 회고했다. 선두에 선다는 이유만으로 외부의 견제와 내부의 저항을 감당해야 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앞서기'보다는 '함께하기'를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 구 명예회장은 독주보다 조화를, 속도보다 지속가능성을 강조하는 경영자로 평가받았다. 경쟁에서 앞서는 것보다 함께 성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태도는 오늘날 LG 특유의 비충돌 문화와 묵묵한 기술 중심 경영으로 계승되고 있다.
2019년 12월 14일 구 명예회장은 숙환으로 향년 94세에 별세했다. 유족 뜻에 따라 장례는 조용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조문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됐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용한 품격과 절제된 존재감을 지킨 그의 발자취는 LG의 정신이자 한국 산업사의 한 축으로 남아 있다.
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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