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명 불쑥 꺼낸 정부도, 무조건 백지화 외치는 의사도 잘못”
“의대 증원 백지화 현실적으로 힘들어… 증원 취지 공감하지만 속도조절을
의정 갈등, 누적된 문제 개선 기회로… 수가 등 해결해야 필수의료 살려”
신영수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81)는 12일 서울 용산구 자택 인근 카페에서 인터뷰를 갖고 “정부와 의료계가 지난 7개월의 갈등은 잊고 미래 의료 발전을 논의할 때”라며 이같이 말했다. 신 명예교수는 1980, 90년대 건강보험 제도 발전과 건강보험심사 제도 선진화를 이끈 국내 최고의 의료제도 전문가다.
의정 갈등 사태 이후 많은 언론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신 명예교수는 매번 고사해 왔다. 그런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 응한 이유에 대해 “‘2000명 증원’이란 경직된 정책에 갇힌 정부와 이에 격앙된 의료계 사이에서 국민이 볼모가 된 현실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로 돌리기는 어려워
신 명예교수는 의료계가 요구하는 ‘2025학년도 의대 증원 재검토’에 대해 “정부가 잘했든 잘못했든 이미 모집 인원이 발표돼 수험생 수만 명이 (의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며 “완전히 없던 일로 되돌리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의료계 후배들을 향해선 “‘원점 재검토’ 같은 너무 불가능한 요구는 내려놓아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며 여야의정 협의체를 통해 돌파구를 찾을 것을 당부했다.
신 명예교수는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 과정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는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는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고령화로 인한 병원 이용 증가, 의료 기술 발전 등 의료 이용 행태를 좌우할 변수가 많아 필요한 의사 수를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다. 정부가 1500명, 2000명이라는 숫자에 매몰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증원 속도에 대해서도 정부가 유연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정부는 “10년 뒤 의사 수 부족분을 고려해 5년간 1만 명을 증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수치가 의대 교육과 수련 현장에서 감당할 수 있는지 신중하게 검토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 명예교수는 “실습 중심으로 도제식 교육이 이뤄지는 의대는 학생을 원하는 만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갑자기 50명도 안 되는 정원을 3∼4배로 늘리는 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원하는 규모의 증원이 다소 늦어진다고 (대한민국 의료가) 망가지는 게 아니다”라며 2026학년도 이후 규모 조정 등을 통해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속도 조절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 의정 갈등, 의료계 고질병 해소 기회로
신 명예교수는 국회가 협의체를 구성해 의정 간 대화의 장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 협의체가 의대 증원뿐 아니라 의료개혁 과제 전반을 논의하는 장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신 명예교수는 “의료는 곧 정치 문제다. 의료제도나 정책을 바꾸는 데 사회 형평성, 국민 개개인이 갖게 될 부담 등을 하나하나 따져야 한다. 정치권이 이런 갈등의 해소를 위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대 증원으로 촉발된 의정 갈등을 의료계의 누적된 문제를 개선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과잉 의료 이용, 왜곡된 수가 구조 등 대한민국 의료에는 구멍이 너무 많다. 빠른 속도로 전 국민 의료보장을 이뤘지만, 그 후 제도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했다. 10년간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을 지낸 신 명예교수는 “일본 등 해외에선 의사들이 정부와 교섭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의료제도 개선에 참여한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신 명예교수는 이 같은 의료계의 구조적 문제를 이번에 해결하지 않으면 지역 및 필수의료 살리기 등 정부가 기대하는 증원 효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의사 2000명을 더 만들어도 그들이 꼭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진 않는다. 왜곡된 보상 구조를 지켜본 젊은 의사들은 결국 더 나은 조건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이번 갈등을 대한민국 의료의 기본 틀을 바꾸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신영수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 |
△부산 출생(81) △서울대 의대 졸업, 예일대 박사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 △세계보건기구(WHO)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장 |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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