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철옹성 무너뜨린 팝의 여제

윤성민 2025. 2. 8. 00:3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일 그래미 어워즈에서 수상한 비욘세가 딸과 포옹하며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크립토닷컴 아레나에서 열린 제67회 그래미 어워즈의 주인공은 비욘세였다. 그는 다섯 번 후보에 오른 끝에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다. 1992년 나탈리 콜, 1994년 휘트니 휴스턴, 1999년 로린 힐에 이어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한 네 번째 흑인 여성이 됐다. 누군가는 불평했다. 비욘세가 ‘레모네이드’(2016년), ‘르네상스’(2022년) 앨범으로 받았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두 앨범은 걸작이었다. 이번 ‘카우보이 카터’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상은 뒤늦게 도착한 연서(戀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올드보이’가 아니라 ‘복수는 나의 것’으로 먼저 프랑스 칸을 갔어야 마땅했듯이. 그러니 비욘세의 올해의 앨범상 수상은 늦었되 깜짝 놀랄 일은 아니다.

대신 비욘세가 컨트리 부문에서도 수상했다는 게 놀랄 일이다. 컨트리 음악은 백인들이 철조망을 높게 쳐둔 텍사스 목장 같은 장르다. 비욘세가 ‘레모네이드’ 앨범에서 ‘대디 레슨스’라는 컨트리 곡을 내놓았을 때 그래미는 이 곡을 컨트리 음악 카테고리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미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올해 그래미는 비욘세 ‘카우보이 카터’에게 컨트리 앨범상을 수여했다. 1964년 해당 부문이 신설된 뒤 처음으로 흑인이 받았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상을 린다 마텔에게 바친다”고 했다. 미국 유명 컨트리 라디오 방송 그랜드 올 오프리에서 공연한 첫 흑인 여성이다. 비욘세는 주석(註釋) 자리로 밀린 흑인 여성을 컨트리 음악 역사의 본문에 다시 썼다.

‘백인 남성들의 잔치’라는 비판을 받았던 그래미가 2010년대 후반 들어 변화를 모색한 결과다. 61회 그래미 어워즈(2019년)는 전환점이었다. 여자 가수 알리샤 키스가 단독 진행을 맡았다. 4개 주요 부문상(올해의 레코드·앨범·곡·신인상) 중 2개를 여성이 수상했다. 나머지 2개도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가사로 유명한 흑인 래퍼 차일디시 감비노에게 돌아갔다.

올해 그래미도 그런 맥락 안에 있다. 후보 발표 때부터 감지됐다. 올해의 레코드상과 앨범상 후보 8개 팀·개인 중 6개 팀·개인이 여성 솔로 뮤지션이었다. 지난해 ‘파워 퍼프 걸’로 불리며 팝 시장에서 우뚝 선 채플 론, 찰리xcx, 사브리나 카펜터가 모두 포함됐다. 이들은 그래미에서도 ‘엣지’를 잃지 않았다. 채플 론은 올해의 신인상 수상 소감에서 “레이블은 뮤지션에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임금과 건강 관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2014년 데뷔한 중고 신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미 후보에 투표하는 사람들이 음악 산업 관계자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감한 소감이기도 했다. 찰리xcx는 하늘에서 속옷이 떨어지는 가운데 춤을 추는 공연을 보여줬다. 뉴욕타임스는 “최고의 온스테이지 준(準)레이브 파티”라고 평가했다.

이번 그래미는 그런 식으로 다양성과 포용을 상징하는 그림을 많이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위켄드의 ‘그래미 복귀’는 음악 팬들이 가장 반길 만한 순간이었다. 그는 2020년 앨범 ‘애프터 아워스’로 이력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그래미는 어느 부문 후보에도 그를 올리지 않았다. 그는 그래미를 ‘보이콧’하고 떠났다. 흑인 차별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번 시상식에서 하비 메이슨 주니어 그래미 회장은 위켄드 무대에 앞서 “지난 몇 년간 그래미를 향한 비판을 귀담아 듣고, 달라지려 했고, 행동에 옮겼다”고 했다. 그래미는 시상식이면서, 그 자체로 메시지를 품고 있는 쇼이기도 하다.

록 앨범상을 받은 롤링 스톤스를 대신해 앤드류 와츠가 수상하며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아무 관심도 못 받고 있지만 록 음악도 얘기해야겠다. 록은 늙었다. 관심 없겠지만, 이번 록 앨범상 수상자는 누굴까. 롤링 스톤스다. 롤링 스톤스? 맞다. 1964년 데뷔한 그 밴드 맞다. 환갑 넘어 마을 청년회장을 맡는 격이랄까. 록 앨범상 후보엔 블랙 크로우스(데뷔 1989년), 그린데이(1989년), 펄 잼(1991년), 잭 화이트(1999년·화이트 스트라입스 기준)가 올랐다. 록 음악계는 인구 소멸 위기의 농촌이 돼가고 있다. 요즘 록의 경향을 보여줄 후보는 폰테인 D.C 정도였다. 한 외신은 “아버지들이 좋아할 후보 명단”이라고 했다. 심지어 록 퍼포먼스상은 비틀스의 ‘나우 앤 덴’에게 수여됐다. 힙합에서 켄드릭 라마가 올해의 레코드상을 받은 것과 대조된다. 힙합도 위기가 있었다. 2023년 랩 음악이 빌보드 핫 100 1위를 1년 동안 한 번도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켄드릭 라마의 곡은 서부 힙합의 새로운 송가로 떠올랐다. 힙합은 다시 주류 음악이 됐다.

그렇게도 지난해 들을만한 록 앨범이 없었을까. 아니다. 뱀파이어 위켄드의 ‘온리 갓 워즈 어버브 어스’는 밴드의 앞선 앨범 사운드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걸작이었다. 미국 음악 잡지 피치포크는 “밴드가 가장 잘하는 것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요약했다”며 지난해 최고의 신보로 꼽았다. 그러나 그래미는 록(얼터너티브 포함) 부문에 이 앨범을 후보로도 올리지 않았다. 미국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엔 “그래미와 상관 없이 이 앨범을 계속 사랑할 것”이라는 글이 있었다. 상은 어쩌면 도착하지 않는 연서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설렘이 없었던 건 아니다. 실컷 그래미 상 얘기를 하고 이렇게 말해서 민망하지만, 수상 여부와 상관 없이 좋은 음악은 그냥 좋은 음악이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