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와 ‘청렴’의 상징, 삼마태수 송흠

-50년이 넘는 관직 생활
남도를 대표하는 ‘효’와 ‘청렴’의 상징 인물이 있다. ‘삼마태수’로 불린 지지당 송흠(宋欽, 1459-1547)이 그다. 송흠은 1459년(세조 5)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에서 참봉을 지낸 송가원의 아들로 태어난다.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며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1492년(성종 23),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간원 헌납 등을 지낸다. 남원 향교 교수 시절 연산군에게 궁중의 일에 대해 간언을 올렸다가 장(杖) 100대를 맞고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중종반정 이후 송흠의 관직은 순탄했다. 주로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자청했고 보성군수를 시작으로 옥천군수, 순천부사, 여산군수를 지낸다.
여산군수 시절,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찹쌀과 멥쌀로 세 번 빚은 술인 ‘호산춘’(壺山春)이란 특별한 술을 개발한다. 호산은 지금 여산(礪山)의 별호다. 송흠이 개발한 ‘호산춘’은 조선시대 4대 명주(名酒)가 된다.
1515년(중종 10), 다시 내직으로 들어온 후 받은 관직이 사헌부 장령이었다. 이어, 의정부 사인, 사가원 대사간이 됐다가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고 1528년(중종 23)에는 도승지에 오른다. 대사간은 사간원의 장이며 도승지는 승정원의 장으로, 모두 정3품직이다.
송흠이 동부승지에 임명되던 해인 1519년(중종 14), 조광조·김정 등 젊은 사림들이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자 그는 정치에 뜻을 잃고 낙향한다.
1524년(중종 19), 다시 나아간 관직은 전주 부윤이었다. 이어, 광주목사와 나주목사, 장흥부사, 남원부사를 역임한다. 그리고 1534년(중종 29)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된다. 이후 그는 한성부 좌윤과 공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오른다. 그의 나이 84세였다. 50년이 넘는 순탄한 관직 생활이었다.
-관직 50년, 장수의 비결
‘조선왕조실록’에는 송흠이 50년 넘게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 등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중종 9년(1514) 12월5일자에는 공조판서 안침이 청백한 사람들을 천거하면서 임금께 아뢰는 말이 다음처럼 나온다.
“신이 눈으로 직접 보고 마음속으로 복종하는 사람은 ……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는 송흠과 박상이 가장 적합하니 포장할 만합니다.” 공조판서 안침이 마음속으로 복종했던 두 인물인 송흠은 장성, 박상은 광주 출신이었다.
중종 24년 6월9일자 ‘중종실록’에는 전라도 관찰사 조방언이 송흠을 청백리로 치계할 때, 송흠에 대해 사신(史臣)은 “송흠은 조행(操行)이 단아하고 평소에 청백을 숭상하여 벼슬한 지가 매우 오랬지만, 집에는 한두 섬의 곡식도 없었다.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했을 뿐, 아무리 청현(淸顯)한 관직에 제수되어도 이를 기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효성과 청렴에 감복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신은 송흠의 ‘효성’과 ‘청렴’에 감복하고 있다.
중종 27년 4월20일 ‘중종실록’에도 그에 대한 평가가 다음처럼 나온다. “매양 늙은 부모를 위하여 지방 수령으로 나아가 봉양하느라 1년도 조정에 있지 않고 호남의 7-8군현과 주부(州府)를 돌면서 다스렸다. 모두 공평과 염간(廉簡)으로 임하였기 때문에 많은 치적이 있었으며,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사랑하였다. 이때에 모친의 나이가 95-96세였으므로 관인(官印)을 풀어놓고 집에 돌아와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으니,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송흠에 대한 당대인의 평가가 대단하다. 송흠이 50년 이상을 관직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실록’에서 보듯 ‘청렴’, ‘공평’, ‘염간’, ‘효성’의 실천이었다. 특히 ‘청현’직에 목메지도 않았다. 그가 청백리에 뽑히고, 지방민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여긴 이유였다. 유배 한번 없이 50년을 버틴 이유이기도 했다.
-송흠의 또 다른 이름 ‘삼마태수’
청백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청백(淸白)은 ‘청렴결백’의 약칭인데,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청백리는 부정부패하지 않고 그냥 깨끗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짐과 의로움이 넘쳐야 청백리다. 백성을 내 처자같이 사랑하고, 나랏일을 정의롭게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얻도록 하는 관료가 진짜 청백리다.
청백리가 되기 위해서는 동료들의 평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과 의정부의 검증 절차 외에도 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최고 수장들이 추천, 심사해 통과돼야만 했다. 어려운 심사를 거쳐 청백리로 선정되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는데, 송흠은 그 청백리에 다섯 번이나 뽑힌다.
송흠은 이미 살핀 것처럼 보성군수를 시작으로 옥천·여산군수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낸다. 그는 부임지에 갈 때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체면이나 위풍을 도외시한 채 언제나 말 3필만 받았다. 당시 한 고을의 수령이 부임지로 나갈 때나 임기가 끝날 때 감사의 표시로 보통 그 고을에서 가장 좋은 말 여덟 마리를 바치는 것이 관례로 돼 있었다. 그런데 송흠은 새로 부임해 갈 때 본인과 어머니, 아내가 탈 말 3필만 받았다. 그런 송흠을 고을 사람들은 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렀다. 삼마태수, 이는 청백리 송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송흠이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 말 3필만 받았다는 이야기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소개돼 있다. 목민관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송흠이 삼마태수로 거듭나게 된 계기가 송흠의 문집인 ‘지지당유고’에 다음처럼 나온다. “초당 허엽이 말하기를, 응교 최부는 나주 사람이요. 정자 송흠은 영광 사람이다. 같은 시대(성종)에 옥당에서 다 같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서로의 거리가 15리였다. 하루는 송흠이 최부의 집에 찾아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최부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떤 말을 타고 왔는가’라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최부가 ‘나라에서 역마를 준 것은 그대의 집까지였는데 어찌 역마를 타고 왔단 말인가?’ 하고 조정에 돌아온 즉시 그 뜻을 아뢰어 파직시켰다. 송흠이 최부에게 와서 사직 인사를 하니 ‘자네는 아직 젊네. 앞으로도 마땅히 조심하여야 할 것이네’ 하였다.”
성종 말년 송흠은 최부와 홍문관에서 함께 근무했다. 최부는 송흠의 5년 선배였지만, 과거는 10년 빨리 합격했다. 최부는 정4품 응교였고, 송흠은 정9품 정자였다.
말단 정9품이던 송흠은 초임발령지에서 동향 선배를 만났으니 의지하는 바가 컸을 것이다. 둘이 휴가를 받았고, 송흠은 나주에 사는 최부에게 인사차 들렀다가 큰 교훈을 얻게 된 것이다. 이후 송흠은 다섯 번이나 청백리에 선정된다. 송흠이 다섯 번이나 청백리에 뽑힐 수 있었던 것은 최부가 있어 가능했다.
송흠이 호로 삼은 지지당(知止堂)의 뜻이 멋지다. ‘지지’(知止)는 ‘멈추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노자’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 하였고, ‘대학’에도 “멈춤을 알아야 뜻을 정할 수 있다(知止而后 有定)”라 하였다. 지지당 송흠은 멈출 줄 아는 것을 신조로 삼고 살았던 분이었다.
- 송흠의 흔적을 찾다



‘효’와 ‘청렴’의 아이콘이 된 지지당 송흠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그가 말년을 머문 두 정자, 관수정(觀水亭)과 기영정(耆英亭)을 찾아봐야 한다.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에 위치한 관수정은 1539년(중종 34) 송흠이 병조판서를 사직하고 내려와 선방산 자락에 세운 정자다. 이후 폐허가 됐다가, 1876년 그의 10대 후손인 송익좌가 중수했고 6·25전쟁으로 불에 타자 1955년 다시 지은 것이다.
관수정에는 송흠의 원운 한시와 관수정기 등을 비롯 김안국, 소세양, 양팽손, 송순, 임억령, 김인후, 유사 등 당대 쟁쟁한 23분의 차운시를 새긴 27개의 현판으로 가득 차 있다. 당대 남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곳 관수정에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관수정 뜰 아래에 세워진 ‘관수정기’에는 “그 물결을 보고 그 물의 근원이 있음을 알고, 그 맑음을 보고 그 마음의 사특함을 씻어버린 뒤에라야 가히 관수(觀水)가 될 것이다”라고, 관수정이라 이름 붙인 연유가 설명돼 있다.
송흠의 말년은 아름답고 행복했다. 1543년(중종 38), 중종은 낙향한 송흠을 위해 새로 부임하는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에게 특별한 명을 내린다. “송흠을 위해 정자를 지어주고 큰 잔치를 베풀라”는 명이 그것이다. 그래서 세워진 정자가 기영정이다. 기영정의 기(耆)는 70세 이상의 노인을, 영(英)은 가장 빼어난 풀을 의미하므로 “나이 많고 덕이 높은 노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란 의미다.
정자가 지어지자, 이듬해인 1544년 기영정에서는 나주 목사 조희가 주관하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 이 자리에는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를 비롯해 나주, 영광, 장성, 진원 등 주변 10개 고을의 수령, 지역 선비, 주민 등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모였다. 송흠의 나이 86세였다.

오늘 기영정은 건립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화재로 소실됐다가 송인수의 10대 후손 송겸수가 1856년 영광군수로 부임하면서 다시 건립한다. 정자 안에는 송인수의 ‘기영정원운’이 걸려 있다. “서가에는 수천 권의 책이 꽂혀 있고 연세는 높아 지금 86세 춘추라네. 기영정 위에서 좋은 잔치를 자주 이루고 이 단청에 옮겨서 만년을 누리소서”라는 축원시다.
기영정에는 두 개의 현판이 붙어있다. 오른쪽 현판은 19세기 문인인 신석희의 글씨이고 왼쪽 현판은 송인수의 10대손으로 기영정을 재건립한 송겸수의 글씨인데, 두 글씨 다 힘이 넘친다.


기영정에서 잔치가 벌어진 3년 후인 명종 2년(1547), 지지당 송흠은 천수를 누린 후 고향 집에서 숨을 거둔다. 향수(享壽)가 89세였다. 조정은 그에게 효헌(孝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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