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⑳1990년 LG 트윈스의 뜨거운 질주와 폭발하는 관중

“야구 팬 여러분. 우리는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잠실야구장 전광판에는 태극기 문양이 새겨지고 애국가가 흘러 나왔다. 경기 직전이 아니라 8회초 경기 도중이었다. KBO 출범 후 초유의 사태. 장내 아나운서는 연신 팬들에게 “질서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1990년의 여름밤은 뜨거웠다. 순위 싸움도 치열했고, 팬들의 응원 열기는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팬들이 잠실구장에 운집했다.
하지만 경기 도중 수백 명의 팬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하고, 팬들끼리 패싸움을 벌이는 사상 최악의 관중 난동이 벌어지고 말았다. 1시간 이상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수백 명의 경찰들이 그라운드에 들이닥쳐 팬들을 연행하고 나서야 질서가 유지됐다.
요즘의 성숙한 야구관람 문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지만, 낭만과 야만이 뒤섞였던 그땐 그랬다. 야구에 인생을 건 아저씨들에게 야구장은 전쟁터였고, 분풀이 해방구였다.
그런데 이날은 LG 트윈스 역사에 있어서도 하나의 변곡점이 된다. 3위에 있던 LG 트윈스는 이날 경기 승리를 기점으로 치고 올라가면서 9월 중순 마침내 1위로 도약했고, 시즌 최종전까지 선두 싸움을 거듭하며 해태를 제치고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20번째 주제는 1990년 여름, 잠실 해태전에서 터진 최악의 관중 난동과 LG 트윈스의 뜨거운 질주, 구단 역사상 최다 관중 신기록을 쓰는 흥행몰이에 관한 이야기다.

◆팬들로 터져나간 잠실 일대
“암표 있어요~.”
“표 팔아요~.”
1990년 8월 26일. 잠실야구장 앞에는 정체 불명의 아저씨들이 군중을 헤집고 다니며 암표를 팔고 있었다.
“김밥 있어요~, 김밥!”
지하철역에서 밖으로 나가는 계단 가장 자리에 늘어선 아줌마와 할머니들은 아침부터 부지런히 준비해 온 김밥과 꿀떡 등을 팔기 위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요즘이야 야구장 안에 사 먹을 음식이 넘쳐 나지만, 매점조차 제대로 구비돼 있지 않던 그 시절엔 야구장 밖에서 김밥을 미리 사서 야구장에 들어가는 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혹서기였기에 저녁 6시30분에 경기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날 오전부터 잠실 야구장 앞으로 야구팬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한여름 뙤약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게 줄을 늘어선 채 표 하나를 얻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오후 3시에 매표가 시작되자마자 입장권은 일찌감치 동났다. 매표소 창구 앞에 ‘매진’ 푯말이 붙자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아우성을 쳤다.
요즘엔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일찌감치 예매를 하지만, 당시엔 예매 제도가 없었다. 오로지 현장 매표소 앞에 몇 가닥으로 길게 줄을 서서 순서대로 표를 사야만 했던 시절이다.
잠실구장 앞은 물론 신천역(현 잠실새내역) 인근까지 그야말로 인산인해(人山人海). 입장권이 매진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뒤늦게 지하철을 타고 온 팬들은 종합운동장역 개표구까지 가득 찬 사람들 때문에 한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다.

이처럼 잠실 일대가 인파로 터져나간 건 최고 흥행 보증수표인 LG 트윈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만났기 때문이었다.
8월 24일 금요일부터 26일 일요일까지 양 팀은 시즌 마지막 3연전 맞대결을 벌이는 일정. 특히나 이 3연전을 앞두고 3위 LG(52승41패)와 4위 해태(46승40패3무)는 불과 2.5게임차였다. 주말 내내 구름관중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첫 판인 24일 경기에서 해태는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의 완투로 2-1로 이겼다. 양 팀의 격차는 1.5게임차로 좁혀졌고, 시즌 상대전적도 9승9패로 균형을 이뤘다.
LG로선 잠수함 투수 문병권이 선동열에 맞서 9이닝 2실점 역투를 펼치고도 완투패(10승4패)를 당한 부분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25일 토요일. 3만100명(1990년 잠실야구장 최대 수용인원) 매진사례 속에 이번엔 LG가 8-2 대승을 거뒀다.
에이스로 급부상한 김태원이 9이닝 2실점으로 시즌 6번째 완투승(시즌 13승4패)을 올리고, 백전노장 이광은이 홈런 포함 4타수 3안타 3타점의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양 팀은 다시 2.5게임차로 벌어졌다.
LG는 이로써 이날까지 잠실구장 시즌 관중수 64만269명 신기록을 썼다. MBC 청룡이 8년 동안(1982년~1989년) 서울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지만, 청룡 시절 홈경기 시즌 최다 관중수 기록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1983년의 63만814명이었다.
1990년 신장개업한 LG 트윈스가 이 기록을 시즌 48경기 만에 넘어섰다. 그만큼 1990년 LG의 돌풍은 신선했고, 역동적인 트윈스 야구에 대한 팬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철문이 뚫렸다…심상치 않았던 경기 전 풍경들
문제의 8월 26일. 1승1패 후 위닝시리즈를 결정할 3연전 마지막 경기였다. 그리고 양 팀의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맞대결이기도 했다.
이날도 3만100장의 입장권이 일찌감치 동났다. 포스트시즌이 아닌 페넌트레이스 2경기 연속 매진은 당시 KBO 출범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80년대에 야구열기가 뜨거웠다고는 하지만 천만 명을 뛰어넘는 요즘의 관중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관중석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욕설을 하고, 빈병과 깡통을 그라운드에 집어던지는 거친 관전문화로 인해 야구는 주로 아저씨와 남자 어린이들이 즐기는 남성의 스포츠라는 한계에 갇혀 있었다.
경기 양상이 일방적으로 흘러 야구가 재미 없어질 때쯤이면 술 취한 팬들끼리 웃통을 벗고 심심찮게 주먹싸움을 해 팬들의 시선은 그라운드가 아닌 관중석의 격투기 현장으로 향하곤 했다.
여성 팬들과 가족 팬들이 넘쳐 나는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관전 문화였다.
물론 거친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응원하는 팀이 앞서나가면 기분 좋아진 아저씨들이 골든벨을 울리듯 즉석에서 한 턱을 쏘기도 했다. 관중석을 누비며 아이스크림이며 오징어를 파는 아주머니를 불러 바구니째 사서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투척을 하는 그런 낭만도 있던 시절이다.
아무튼 이날 해태-LG의 시즌 마지막 대결은 경기 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힘을 합쳐 잠실구장 좌측 외야 뒤쪽 철문을 흔들고 밀면서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문이 뚫리자 수많은 팬들이 좌측 파울폴 쪽 펜스 문을 열고 그라운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은 3루쪽 파울지역 펜스를 기어 올라 관중석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LG 트윈스 직원들과 경호 요원들이 외야 쪽으로 달려가 봤지만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팬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당랑거철(螳螂拒轍)’. 사마귀가 앞발로 굴러오는 수레바퀴를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상조치로 철문을 다시 걸어잠근 뒤 경기를 진행하기 위해선 이미 그라운드로 진입한 팬들을 빨리 관중석으로 올려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경호 요원들은 팬들이 펜스를 넘어갈 수 있도록 엉덩이와 신발을 떠받치며 밀어 올렸고, 관중석의 팬들이 이들의 손을 잡아 끌어올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정확히 인원을 집계할 수도 없었지만 어림짐작으로 수백~수천 명의 ‘공짜 팬’이 무혈입성했다. 이날 잠실구장 실제 관중수는 3만100명이 아니라 훨씬 더 많았던 셈이다. 웃돈을 주고 암표를 사서 들어온 사람들만 억울할 일이었다.
사실 잠실야구장 철문이 터진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그해 4월 29일 해태-LG전에서도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밀어닥치면서 셔터가 열렸고, 전날인 8월 25일 해태-LG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해태와 LG가 맞붙는 경기는 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최고의 흥행카드였다.
결국 그렇게 해서 이날 예정보다 5분이 늦은 오후 6시35분에 경기가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경기 도중에 터질 초대형 사태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7회말 LG 대거 7득점…승부의 추가 LG로 기우는 순간
5회까지는 LG 선발투수 김용수와 해태 선발투수 신동수의 팽팽한 투수전으로 전개됐다. 균형이 깨진 건 6회말. LG가 무사 만루서 노찬엽의 유격수 땅볼과 대타 김영직의 2타점 중전 적시타로 3-0으로 앞서나갔다.
LG는 이어 7회말 11명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 대거 7점을 뽑으면서 10-0으로 달아났다. 8번타자 민경삼의 볼넷으로 시작해 타순이 한 바퀴 돌고 다시 민경삼이 2타점 적시타로 그 이닝의 6번째와 7번째 득점을 만들고서야 점수 생산을 멈췄다.

10-0. 사실상 승부의 추가 LG로 기운 상황. 그런데 8회초 해태 공격 직전 일이 터졌다. 이때가 밤 9시12분. 3루쪽 관중석의 팬 한 명이 펜스에서 뛰어내려 그라운드로 진입하자 다른 팬들도 갑자기 우르르 펜스 위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군중심리 속에 순식간에 밀물처럼 수백 명의 팬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했다. 선수들도 덕아웃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이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라운드 한쪽에서 술판을 벌이는 팬도 있었고, 마운드에서 투구 시늉을 하는 사람, 타석에서 타격폼을 잡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가 홈에서 출발해 1루, 2루, 3루를 차례로 돌아 홈으로 어설픈 슬라이딩을 하자, 다른 사람이 심판처럼 양 팔을 옆으로 벌려 세이프를 선언하기도 했다.
심지어 베이스를 뜯기도 하고, 외야 펜스 광고 부착물을 불태우거나 관중석 의자에 불을 지르는 팬도 있었다.
이런 와중에 해태 팬들이 1루쪽 LG 관중석의 팬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LG 쪽의 흥분한 한 팬이 그라운드로 뛰어내리더니 철제의자를 휘둘러 해태 팬을 다치게 하기도 했다.
몇몇 LG 팬들이 추가로 그라운드로 뛰어내렸고, 해태 팬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관중석에서는 빈병과 깡통, 쓰레기를 그라운드 안으로 투척했다. 해태 팬들이 이를 주워 다시 LG 관중석으로 던지면서 싸움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러자 전문에 소개한 것처럼 잠실구장 전광판에 태극기 문양이 내걸리고,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장내 아나운서가 “우리는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라며 두 패로 나눠 싸우는 팬들에게 자제를 부탁했다.
그래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국민가수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노래가 흘러나오는 상황까지 연출됐다. 불과 2년 전 88서울올림픽을 훌륭하게 치른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달라는 의미였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후 각 지역마다, 각 구장마다 팬 소요 사태로 크고 작은 불상사가 생겼지만 이날의 관중난동은 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는 1986년 한국시리즈 3차전 때 팬들이 대구구장 앞에 세워둔 해태 구단버스를 불지른 것에 이어 지금까지 KBO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관중 난동 사태로 꼽히고 있다.


결국 오후 9시 46분쯤 무장경찰 150여 명(3개 중대)이 잠실구장에 투입됐다. 관중들을 경기장 밖으로 몰아내고, 저항하는 팬들은 그 자리에서 연행을 하기도 했다.
오후 9시 12분부터 무려 1시간 7분 동안 경기가 중단된 뒤 밤 10시19분에서야 가까스로 재개될 수 있었다.
해태는 다음 주초에 상대해야 할 1위 빙그레전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태 김응용 감독으로선 승부가 기운 경기에 필승조 투수를 투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1986년부터 1989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지켜봐 온 해태 팬들의 눈높이에 1990년 중위권에 머물고 있는 상황과 순위 싸움을 하는 LG에 대패를 하는 과정이 성에 찰 리 없었는지 모른다.
LG는 8회말에도 3점을 뽑아내 13-0으로 달아났다. 7회부터 구원등판한 정삼흠이 9회초 선두타자 한대화에게 3루타, 김종모에게 중전 적시타를 맞고 1점을 허용하자 흥분했던 해태 팬들도 진정을 하며 귀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후폭풍이 거셌다. 당시 대통령(노태우)까지 나서서 경기장 폭력사태 근절을 지시했다.
현장에서 연행한 난동자 중 11명에겐 폭력행위 가담 정도에 따라 징역 6개월~1년,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경기장에 난입한 관중에게 중형이 내려진 것은 KBO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를 계기로 KBO와 각 구단들은 대책 회의를 했다. 결국 1991년부터 각 구장에 지정좌석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하기로 했다.
그 이전까지는 외야는 물론 내야 관중석도 먼저 앉는 사람이 임자였다. 당시만 해도 야구장에 먼저 도착한 팬이 지인이나 동호회 회원들을 위해 박스나 가방 등으로 좌석을 대거 선점해 놓는 게 다반사였지만, 내야부터 지정좌석제가 도입되면서 그런 풍경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LG와 해태 승승장구…9월 중순 선두 도약
공교롭게도 관중 소요 사태가 벌어진 이후 LG와 해태는 승승장구하게 된다.
LG는 9월 4일 OB를 2-0으로 잡고 삼성과 공동 2위로 뛰어올랐고, 5일에는 OB를 연장 11회에 4-3으로 꺾고 60승 고지에 오르며 단독 2위로 도약했다. 1위 빙그레에도 4게임차로 다가섰다.
9월 7~9일 잠실에서 빙그레와 시즌 마지막 3연전. 그런데 여유 있게 1위를 질주하던 빙그레에 이상 징후가 발생했다. 9월초 김영덕 감독의 ‘종신 감독설’이 터져나오면서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것. 코칭스태프끼리 알력이 발생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LG는 이 틈을 파고 들면서 2승1패 위닝시리즈를 거두고 빙그레에 3게임차로 따라붙었다.
LG는 이어 태평양 3연전을 싹쓸이했다. 빙그레는 삼성에 1승2패로 밀렸다. 양 팀은 이제 1게임차로 좁혀졌다.
1990년까지는 7개 구단 체제. 돌아가며 한 팀은 3연전을 쉬어야 했다. 9월 14~17일 LG는 경기가 없었다. 그런데 빙그레가 15일부터 17일까지 해태에 더블헤더를 포함해 4연패를 당했다. LG는 가만히 앉아서 마침내 단독 1위로 나섰다.
빙그레가 심각한 부진에 빠진 것은 LG로선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던 해태의 무서운 저력이 오히려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LG는 18일 대구 삼성전을 이겼지만 19일과 20일 삼성에 연패를 당했다. 그 사이 해태는 20일 롯데를 잡고 8연승을 내달렸다.
LG는 게임차 없이 해태에 1위를 양보해야만 했다. 1위 해태, 2위 LG, 3위 빙그레가 0.5게임차로 나란히 줄을 섰다. 4위 삼성도 선두와 1.5게임차에 불과해 누가 1위가 될지, 4위가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정국으로 접어들었다.
LG에 남은 정규시즌 게임은 5경기.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인천에서 태평양과 3연전을 치른 뒤 26일 사직 롯데전, 29일 잠실 OB전을 남겨두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4강까지 주어지는 포스트시즌 진출에서 멀어진 세 팀이었다. LG로선 이 부분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감독 김성근)의 고춧가루가 매서웠다. LG는 21일 인천 태평양전에서 1-3으로 일격을 당했다. 앞선 삼성전 2연패를 포함해 3연패. 9월 들어 11승2패의 무서운 기세가 한풀 꺾였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3연패를 당하면서 낭패감에 휩싸였다.
이날 삼성은 빙그레를 잡고 3위로 올라섰고, 빙그레는 시즌 처음 4위로 추락했다.
하지만 오히려 1위(해태)와 4위(빙그레)가 1게임차 이내로 촘촘히 늘어서면서 역대급 막판 순위 경쟁을 예고했다. LG로서는 남은 경기를 다 이겨놓고 경쟁팀들의 전적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매직넘버 산출이 안 돼”…시즌 막판 역대급 1위 싸움
LG는 9월 22일 인천 태평양전에서 4-2로 이긴 데 이어 23일 태평양전에서 김용수와 마무리 정삼흠이 역투를 펼친 덕분에 2-0 승리를 거뒀다. 주말 3연전 경기가 없었던 해태를 2위로 끌어내리고 0.5게임차로 앞서며 다시 1위를 탈환했다.
한편 팀 순위도 순위지만 타격 순위 역시 역대급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검객' 노찬엽은 이날 2회초 선두타자로 나서 좌익선상 2루타를 날리면서 2타수 1안타로 타율 1위로 올라섰다.
노찬엽의 시즌 타율은 0.335(322타수 108안타). 1위를 달리던 빙그레 이강돈이 이날 삼성전에서 4타수 무안타를 기록해 타율이 0.333으로 떨어졌다. 해태 한대화가 0.331로 바짝 뒤쫓고 있었다.

9월 25일. LG의 경기가 없는 날이었다. 해태는 광주에서 태평양전을 치렀다. 필승 각오로 선동열을 선발로 내세웠다.
하지만 태평양표 고춧가루는 LG한테만 뿌려진 게 아니었다. 해태는 김동기에게 홈런 2방을 내주면서 1–7로 패배, 8연승 행진에 마침표를 찍었다.
더군다나 선동열이 3회초 김동기에게 치명적인 3점 홈런을 맞고 3이닝 만에 5실점(비자책점)을 기록하며 강판하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선동열로서는 1989년 5월 9일 빙그레 유승안에게 만루홈런을 맞은 이후 65경기, 1187타석, 319.1이닝 만에 허용한 정규시즌 홈런이었다.
아직도 KBO 역대 연속타석 무피홈런과 연속이닝 무피홈런 기록으로 남아 있을 정도로 전설적인 기록이지만, 하필이면 여기서 중단된 게 선동열이나 해태로서나 통탄할 일이었다.
사실 선동열은 그해 유난히 태평양에 약한 면을 보이긴 했다. 22승6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1.13을 기록했는데 6패 중 태평양에만 3패를 당했을 정도였다. 태평양전에서만 선전했다면 어쩌면 선동열의 0점대 평균자책점은 통산 3차례가 아니라 4차례가 됐을지 모를 일이다.
여전히 매직넘버가 산출되지 않는 어지러운 상황이었지만, 경우의 수가 조금씩 좁혀지기 시작했다.
LG로서는 이제 남은 2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하고 해태가 잔여 5경기 중 1패만 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역으로 해태로서는 1위를 차지하기 위해 LG가 2연승을 할 경우 남은 5경기를 모두 이겨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됐다.
이날까지 2위 빙그레는 LG에 불과 0.5게임차로 뒤져 있었지만 28일 태평양전 1경기만 남겨두고 있어 자력으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기는 어려웠다.
삼성은 3경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선두 LG에 2.5게임차로 뒤져 사실상 한국시리즈 직행은 힘든 처지가 됐다.

●LG 기적의 마지막 여정과 시즌 최다관중 신기록
LG는 9월 26일 사직 롯데전에서 선발 김태원(6이닝 무실점)에 이어 모처럼 김용수(3이닝 무실점)를 마무리로 돌리면서 4-0 승리를 거두고 한숨을 돌렸다. 김태원은 시즌 18(5패, 1세이브)을 수확했다.
이날 해태도 OB를 4-2로 이겼다. 해태는 경기가 없었던 빙그레를 승률에서 앞서 2위로 올라섰고, LG와는 1게임차를 유지했다.
29일 시즌 최종전(잠실 OB전)을 남겨둔 LG는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며 경쟁팀들의 경기를 지켜봤다.
9월 27일에 사실상 두 팀이 제거됐다. 빙그레가 태평양에 0-4로 물렸고, 삼성도 해태에 1-2로 패했다. 페넌트레이스를 마친 빙그레는 해태가 남은 3경기에서 전패를 하지 않는 이상 2위도 힘들어졌다.
해태는 28일 광주에서 삼성전을 치렀다. 1-1 동점 9회말 2사 만루서 백인호가 삼성 최동원을 상대로 극적인 끝내기 안타를 쳤다.
이로써 빙그레 3위, 삼성 4위가 확정됐다. 두 팀은 준플레이오프부터 격돌하게 됐다.
이제 남은 건 1위 싸움. 해태는 잔여 3경기(29일 태평양 더블헤더, 10월 2일 태평양전)를 모두 이길 경우 LG의 승패와 상관없이 자력으로 1위를 확정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9월 29일 운명의 시즌 최종전. LG로선 무조건 OB를 이겨 놓고 해태가 남은 3경기 중 1패를 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토요일 오후 2시 경기였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라 귀성객들은 서둘러 고향을 떠났고, 이날 경기에는 시즌 평균관중보다 적은 9465명이 잠실구장을 찾았다.
이날 평소보다는 관중수가 줄었지만, LG는 1990시즌 홈관중수 76만8329명(경기당 평균 1만2805명)을 기록하는 폭발적인 흥행 성공을 이뤘다. 한 시즌 70만 명 돌파는 MBC 청룡 시절은 물론, KBO 전 구단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같은 잠실을 쓰는 OB의 역대 한 시즌 최다 관중수는 1989년의 43만6026명. 롯데가 1990년 65만4950명으로 구단 자체적인 최다관중수 기록을 세웠다는 점과 비교해보면 LG의 76만 관중수는 당시로선 깜짝 놀랄 만한 수치였다.
앞서 설명한 8월 25일과 26일 연속 매진 속에 역대 최악의 관중 난동 사태도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1990년 LG 트윈스의 첫 시즌 행보는 뜨거웠다.
올해 LG가 KBO 최초 ‘통산 17번째 100만 관중’이라는 금자탑을 세웠지만, 1990년부터 그 밑거름이 부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편 LG는 운명의 시즌 최종전에 선발투수 김용수 카드를 빼들었다.
일찌감치 최하위가 확정된 OB지만 잠실 라이벌 팀의 1위를 순조롭게 만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자존심의 문제였다. OB는 2년생 좌완 구동우를 선발투수로 내세웠다.
역대 가장 치열한 타격왕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노찬엽은 이날 낮 12시 결혼식을 올린 뒤 헐레벌떡 잠실구장으로 달려와 출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LG는 이날 구단 역사에 길이 남을 승부를 펼치게 된다.
[엘팬알백] ㉑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