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실수? EQ900에 숨겨진 비밀

고급 한정식, 살면서 한 번쯤은 받아본 적이 있으실텐데요. 오로지 나만을 위해 차려진 널따란 상 위에 펼쳐진 수십가지 요리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절로 좋아집니다. 저는 고급 한정식 하면 오늘 소개할 이 모델이 떠오릅니다.

.물론 한정식집 앞에 서있는게 많이 보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온통 필요 이상의 것들로 채워진 이 '럭셔리 세단'을 보고 있으면, 어떤 음식은 제 젓가락이 닿기도 전에 식사가 끝나버리는 고급 한정식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만만치 않은 가격도요.

현대차를 대표하던 에쿠스의 후속이자 국산 최초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의 시작을 연 플래그십 세단. 이번 시간에는 제네시스 EQ900, 그리고 G90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이 G90을 알아보기 앞서 먼저 살펴봐야 할 차가 있죠. 바로 현대차의 플래그십이었던 에쿠스입니다.

대한민국 한정 그랜저 시리즈를 연달아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한 끝에 미쓰비시와 공동 개발했던 8기통 초대형 세단. 웅장한 디자인과 온갖 호화로운 기능으로 무장해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차가 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우물 밖으로 나온 순간 이야기는 달라졌습니다.

미쓰비시와의 계약 문제로 수출이 자유롭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지만, 승차감과 주행 성능을 끌어올리는데 한계가 있는 이 급의 대형 세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구동 방식인 전륜구동을 채택한 점, 그나마 미쓰비시가 손을 댔기에 이 정도지 이제 막 독자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어 주행감각과 품질을 논하기에는 여전히 미숙한 브랜드라는 점, 등 차 자체만 놓고 봐도 해외 유수의 럭셔리 세단들과 경쟁하기에는 분명 역부족이었습니다.

때문에 현대는 새로 개발한 독자 개발 후륜구동 플랫폼을 이용 2세대 모델부터 후륜구동으로 설계해 정통 고급 세단으로서의 덕목을 갖추기 시작했고 자체 개발 8기통 엔진을 탑재해 성능을 인정받는 등 프리미엄의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현행 G90의 코드네임이 RS4인 것을 보면 현대 제네시스를 G80의 계보에 올리듯, 이 에쿠스를 G90의 근본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차명과 브랜드가 모두 달라졌기 때문에 한편으로 묶기엔 서로에게 예의가 아닌것같습니다.

그 사이 현대차의 차 만들기 실력은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지만, 또 하나의 거대한 장벽이 에쿠스를 가로막았습니다. 독자 엠블럼으로 가려도 사라지지 않았던 가장 비싼 현대차라는 타이틀이었죠. 이 급의 차를 선택하는 소비자들에게 제품보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입니다. 그저 성능이 더 뛰어나거나 공간이 더 넓어지면 편의장비가 풍부해도 이것 앞에서는 장사가 없어요.

다행히 이 시기인 미국발 금융위기가 서서히 해소되고, 글로벌 경기가 회복세를 띠자 현대차는 숙원사업이었던 프리미엄 브랜드 런칭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에쿠스의 후속으로 준비하던 프로젝트 'HI'를 브랜드의 첫 번째 모델로 선보이기로 결정했죠. 이후 2015년 럭셔리 GT 컨셉트카 비전G와 함께 브랜드를 정식으로 소개한 데 이어 'HI'의 양산형 모델을 공개하며 제네시스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죠. 2015년 말 제네시스 브랜드의 첫 번째 모델이자 플래그십으로 출시된'HI'는 EQ900이라는 다소 어색한 이름표를 달고 출시됐습니다.

정식 차명은 '이큐 나인 헌드레드'이었는데 이름이 길기도 길고, 입에 잘 붙지도 않으니 업계나 직원이나 공공연하게 'EQ900'이라고 불렀어요. 원래 이름은 G80의 상위 모델인 G90이었고 해외 시장에는 처음부터 이 이름으로 소개됐지만, 에쿠스의 브랜드 파워가 여전히 건재했던 국내 시장에서는 굳이 전작의 고급차 이미지를 내다버릴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에쿠스를 연상할 수 있는 EQ를 뒤에는 차급을 감안할 수 있는 숫자 900을 붙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소비자들에게 제네시스는 현대차의 단일 모델로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제네시스 EQ900 보다 시장에서는 한동안 '신형 에쿠스', '에쿠스 후속' 등으로 통했어요.

외관은 앞서 공개된 컨셉트카 '비전G'를 바탕으로 플래그십 대형 세단 특유의 중후함과 풍채에서 오는 덩어리감이 강조된 생김새였습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LED 헤드램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세로형 그릴 등 화려함과 날렵함을 강조했던 선대 에쿠스에 비해 인상이 한결 차분, 나쁘게 말하면 밋밋해졌지만, 덕분에 더욱 진중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거듭났죠.

제네시스의 패밀리룩인 거대한 크레스트 그릴을 중심으로 좌우로 한껏 벌린 범퍼가 웅장함을 연출하는 전면부, 가로로 길게 뻗은 LED 주간주행 등은 방향지시 등 역할까지 담당했는데, 존재감 넘치는 이 깜빡이 보고 있으면 초대 에쿠스가 겹쳐 보이기도 했어요.

3m가 훌쩍 넘는 긴 휠 베이스가 돋보이는 측면은 앞뒤 램프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톰한 캐릭터 라인으로 안 그래도 긴 차가 더욱 길어 보였습니다. 에쿠스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터빈 형태의 알루미늄 휠은 바퀴가 회전할 때 생기는 공명음을 상쇄하도록 설계돼, 디자인은 물론 기능명으로도 훌륭했죠.

트렁크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보수적인 3-박스 세단들과 달리 앞뒤 오버행을 짧게 처리해 약간의 역동감을 부여했지만, 뒷부분이 지나치게 두꺼워져 '오히려 둔해 보인다' 전작에 비해 '짜리몽땅해 보인다'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습니다.

물론 단점만 있는 건 아니죠. 입체감이 돋보이는 LED 리어램프는 에쿠스의 테일램프를 세로로 길게 늘려놓은 듯한 느낌으로 캐딜락, 제규어 등 해외 고급 세단을 동시에 연상시켰는데, 두툼해 보이는 후면 디자인 덕분에 그들보다 더욱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냈어요.

램프를 이렇게 양 끝단에 배치하면 트렁크 패널의 면적, 즉 '차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넓어지면서 차를 더욱 넓고, 두툼해 보이게 만들죠. 적당한 두께의 크롬 파츠와 매립형 머플러 팁으로 단정하게 마무리한 것도 멋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덕분에 뒷모습의 고급감만큼은 '후속작들보다 낫다'고 평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은근히 호불호가 갈리는 외관에 비해 실내는 호평일색이었습니다. 외관과 마찬가지로 가로선을 주제로 한 인테리어는 서서히 낮아지며 운전자를 감싸는 콘솔, 계기판과 인포테인먼트 모니터를 하나의 거대한 하우징으로 일체감을 높이는 등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기도 했지만, 기존의 국산 차와는 확실히 결이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잘 정리된 버튼들은 사용하기 편리한 위치에 직관적으로 배치됐고 실제 원목을 가공해 나뭇결을 살린 우드그레인과 금속 장식 이탈리아산 '세미 아닐린 가죽'으로 꾸며 손에 닿는 소재와 버튼의 질감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드디어 수입 프리미엄 세단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고급감으로 무장했죠.

여기에 최대 17개 스피커의 '렉시콘 프리미엄 사운드', 국산차 중 가장 커다란 12 .3인치 센터 모니터와 헤드업 디스플레이, '전좌석 메모리 시트'등 일일이 열거하기 입아플 정도로 당대 넣을 수 있는 편의장비는 몽땅 들어갔습니다. 없는 것부터 찾는 게 빠를 정도였어요.

이 '전자식 기어레버'는 제네시스 라인업 중 유일하게 경사면에 배치돼 있어서 기어레버에 손을 올리면 P버튼을 검지로 자연스럽게 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 옆에 자리한 수납공간은 스마트폰 무선 충전 패드를 품고 있는데 타자마자 스마트폰이나 지갑, 차 키 등 자잘한 소지품을 넣어놓기에 참 편리했습니다. 탑승객의 시선을 강탈하는 비상등은 시인성이나 조작 편의성은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서울대 의대와의 합동연구를 통해 개발한 '스마트 자세 제어 시스템'도 독특했죠. 운전자의 키, 몸무게 같은 신체 정보를 입력하면 시트가 알아서 최적의 자세를 제안해 주는데, 오차 범위도 좀 넓고 타겟 고객의 성향을 반영했는데 약간 누워 타는 포지션으로 안내 되더라구요.

가장 중요한 뒷좌석은 공간도 승차감도 한결 쾌적해졌습니다. 리클라이닝은 물론 열선 및 통풍 기능을 품은 시트는 이전의 '푹신함' 보다는 독일차의 탄탄한 느낌이었는데 말랑한 것보다는 적당히 탄탄한 시트가 오히려 장거리 주행 시 피로도가 더 적다고 알려져 있죠. 승객을 감싸는 전동식 커튼과 독립식 공조장치, 뒷좌석 듀얼 모니터 등 전작에서 이어져 온 호화로운 편의장비 역시 모두 최신 사양으로 업그레이드했습니다.

편안한 착좌감에 방점을 찍는 '스웨이드 목베개', '퍼스트 클래스' 옵션을 선택하면 고정형 암레스트와 함께 뒷좌석이 좌우로 구분되며 VIP에게 더욱 특별한 느낌을 줄 수도 있었어요. 골프백 4개가 들어가고도 여유 공간이 남는 광활한 트렁크 역시 분명한 장점이죠.

전반적으로 '인간 중심의 진보'를 브랜드의 철학으로 내세운 만큼 탑승객을 우선했다는 느낌이 드는 배려 섞인 디테일들이 돋보였지만 반대로 퇴보가 아닐까 싶은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인포테인먼트 모니터는 '주행 중 안전'을 이유로 터치 조작이 아닌 '조그 다이얼'로만 조작할 수 있도록 해놨는데, 직관적인 조작을 선호하는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그저 답답함을 유발하는 구성이었습니다. 벤츠, 렉서스 등 동일한 방식의 수입차 역시 똑같은 이유로 욕을 먹는 부분이었죠. 심지어 '목적지 검색' 등 '타이핑'을 하는 상황에서만 부분적으로 터치가 가능하도록 해놓은 게 더 불편한 시점이었습니다.

또 4인승 '퍼스트 클래스 옵션'은 이전에 에쿠스에 있던 볼타입 마사지 기능, 냉장고, 허벅지 받침대 같은 주요 기능이 빠져서 옵션 가격에 비해 어떤 효용성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에어셀을 이용해 허리를 받쳐주고 주기적으로 긴장을 풀어주는 기능이 있긴 하지만 안마라고 부르기는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이 밖에 차급이 무색하게 트림에 따라 B필러 에어벤트가 빠지는 것과 엔틱한 분위기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에쿠스는 물론 그룹 내 하위 모델인 기아 K9에도 있던 '풀LCD 계기판'을 장비하지 않은 건 역시 작지만 서운한 부분이었죠. 파워트레인은 V6 3.8L 람다 GDI 가솔린을 주력으로 새롭게 선보인 3.3L 트윈터보 가솔린, 상징성이 큰 '8기통 타우' 3가지 엔진에 신형 파워텍 '8단 자동 변속기'가 매칭됐습니다.

앞서 그룹의 고급 제품 라인업에 두루 사용돼 품질이 검증된 라인업으로 어떤 파워트레인을 선택하더라도 고급차에 걸맞는 부드러운 주행감각과 뛰어난 정숙성, 안정적인 성능을 제공했죠.

특히, EQ900에 처음 탑재된 3.3L 터보 GDI 가솔린 엔진이 눈길을 끌었는데요. 넉넉한 출력과 8기통 엔진에 버금가는 토크를 제공해 2톤이 훌쩍 넘는 거구를 호쾌하게 밀어붙였습니다. 다만, 주 고객층이 아직 '다운사이징'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기량만 보고는 자연흡기 3,8L의 하위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이 밖에 초고장력강이 폭넓게 사용된 신형 플랫폼으로 차체 강성을 높인 것은 물론 전작의 '에어서스펜션'은 빠졌지만, 발전된 전자제어 서스펜션과 자세제어장치 '쌍용 체어맨W'의 싸움에서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던 사륜구동마저 주행환경에 따라 구동력을 다르게 배분하는 전자식 AWD H트랙을 탑재해 해소하는 등 전작 에쿠스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진보했습니다. 거친 비포장길을 주파할 일은 없지만 겨울철 강남의 언덕길마다 비상등을 켜고 주저앉아야 했던 전작의 설움은 달래줄 수 있었죠.

또 트렌드에 발맞춰 자동 긴급제동, 차로 유지 보조 같은 첨단 주행편이 및 안전장치를 채워놓은 것도 분명한 세일즈 포인트였어요. 발전을 멈추지 않는 동급 수입차와 비교하면 여전히 부족했지만 여러모로 역대 '국산차 중 최고 수준'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고, 프리미엄 브랜드에 기대하는 만큼은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출시 얼마 뒤에는 차체를 늘려 거주성을 개선한 리무진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이번에도 수입 세단들처럼 뒷좌석만 길게 늘린 형태가 아닌 차체 한가운데 B필러를 길게 늘린 스트레치드 타입으로 전형 19인치 휠과 늘어난 전장이 일반 모델과는 확실히 남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어요. 특이하게도 B필러뿐만 아니라 뒷좌석 도어까지 늘렸는데 뭔가 유난히 더 길어 보였는데, 최고급 내장재, 다리를 쭉 펼 수 있도록 허벅지 받침이 추가된 전용 VIP 시트를 더해 내부를 좀 더 호화롭게 꾸몄고 육중해진 몸집에 걸맞게 파워트레인은 5 .0 AWD 단일 사양만 제공했습니다.

당연히 가격도 육중해서 국산 승용차의 끝판왕스러운 1억 5천만원이라는 어마무시한 가격표가 붙었죠.

한편 카니발, 쏠라티 등 프리미엄 밴을 만들어오던 노블 클라쎄에서 이 모델을 손봐 별도 판매하기도 했는데요. VIP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앞좌석과 뒷좌석을 격벽으로 분리해 보다 정통적인 형태의 리무진으로 개조한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제네시스의 순정사양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운 퀄리티와 원한다면 벤틀리, 롤스로이스처럼 보디 컬러를 투톤 처리해 더욱 특별하게 꾸밀 수도 있었어요.

참고로 이분들은 과거 프로토모터스에서 에쿠스를 비롯한 당시 고급차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던 경력이 있죠. 왕자의 자리에 오른 만큼 영광도 함께했습니다. 전작인 에쿠스에 이어 대한민국 공식 대통령 의전 차량으로 선정돼 청와대를 누비기도 했어요.

이번에도 거주성을 위해 리무진 모델을 선택했고 국가원수를 보호해야 하는 만큼 중기관총, 폭발물, 화생방 공격에 대응이 가능한 수준의 방어 성능이 요구됐기 때문에 독일의 방탄 차량 제조업체의 의뢰에 특별 제작했죠. 자국산 방탄차를 쓴다는 건 여러모로 의미가 깊습니다. 국가의 산업 수준과 경제력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에 노출 되는 일이 작기 때문에 기업 홍보 효과도 부가적으로 따라오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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