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 정보통신산업의 급성장 속에서 한 명의 입지전적 인물이 산업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다. 창업자 한상수 사장이 이끈 세진컴퓨터랜드는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컴퓨터 유통업계의 거목으로 성장했으나, 결국 무리한 확장과 외환위기라는 파도 속에 침몰하게 된다. 그 흥망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 부산 5평에서 시작한 컴퓨터 판매의 혁명
한상수 사장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고교 중퇴 후 탄광 광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택시기사를 거쳐 사법시험 준비까지 하던 그는 컴퓨터 판매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한국 정보산업은 혼란 속에 있었다. 컴퓨터 구매는 미로 같은 경험이었다. 판매상들은 고객의 지식 수준을 재단하여 차별적인 가격을 책정했고, 제품 정보는 투명하지 않았으며, 사후 서비스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거대 전자회사들도 이 분야에서 고객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한상수 사장은 이 틈을 포착했다. 1991년, 그는 부산 서면 지하상가에 매장을 개점했고, 1992년에 주식회사로 법인화했다. 직원 3명과 함께 시작한 이 작은 가게가 한국 컴퓨터 유통시장의 판도를 바꾸게 된다. 초기 전략은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정찰제(정상가 판매)를 도입하여 모든 고객에게 동일한 가격을 제시했고, 평생 무상 수리와 무료 교육을 약속했다. 다른 매장에서 구매한 컴퓨터도 무상으로 수리해주었다.

이 정책들은 당시로선 혁명적이었다. 1991년의 한 신문 인터뷰에서 한상수 사장은 자신의 경쟁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부분의 컴퓨터판매상들은 사람을 보고 물건을 팝니다. 어리숙한 사람에게는 비싸게 팔고, 깐깐한 사람에게는 싸게 부르지요. 세진은 최소한의 마진만 붙여 정직하게 판매합니다." 그는 대기업의 경직된 구조 속에서 불가능했던 소프트웨어 A/S까지도 현장에서 직접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 백화점식 대형매장, 지방에서 전국을 제패하다
세진컴퓨터랜드의 성장 속도는 가파르기만 했다. 1991년 1개 매장에서 출발한 세진은 3년 만에 부산 시장을 석권했다. 1994년 10월 대구점을 개점한 후부터 자금난에서 해방되었고, 1995년에 서울 진출을 선언했다. 당시 컴퓨터 유통시장의 기축인 용산전자상가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매장을 전국에 선보였다. 세진의 매장은 대형 백화점식 구조였다. 깔끔한 인테리어, 자유로운 제품 체험 공간, 고객 유도 없는 편안한 쇼핑 환경이 청소년과 일반인들의 발길을 모으기 시작했다.
1996년, 창업 4년 만에 세진컴퓨터랜드는 국내 3위 수준의 컴퓨터 유통사로 자리 잡았다. 57개의 직영매장을 운영했고, 연간 10만 대 이상의 컴퓨터를 판매했으며, 매출액은 삼성전자, 삼보컴퓨터에 이어 국내 3위 규모로 추산되었다. 같은 해 회장은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물가를 절반으로 꺾어 놓겠습니다"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마침내 1995년 서울 진출 이후, 세진은 진돗개 컴퓨터, 세종대왕 컴퓨터 같은 자체 브랜드(PB) 모델을 출시하며 지명도를 높였다.
마케팅도 공격적이었다. 월 50억 원대의 광고 비용을 투입했고, 연예인을 기용한 광고와 대규모 세일 이벤트를 이어갔다. 한 번 시작된 세일이 "명목"만 바뀌며 1년 내내 계속되기도 했다. 이 전략은 소비자들에게 '최저가 컴퓨터 전문점'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 성공의 다른 얼굴: 무리한 확장의 대가
그러나 세진의 급성장 뒤에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가 숨어 있었다. 무리한 확장에 필요한 자금은 대출과 외상의 악순환으로 확보되었다. 메이커로부터 3개월 어음으로 물건을 구입하되, 이를 전부 현찰이나 신용카드로 팔아치우는 방식이었다. 겉으로는 자금 흐름이 순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를 떠안고 있었다.
경영진의 자질 문제도 대두되었다. 한상수 사장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소유자였지만, 주먹구구식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너의 직감과 판단에만 의존하는 경영 방식은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통제 불능의 조직을 만들어냈다. 또한 기업 문화도 문제였다. 당시 세진컴퓨터랜드는 업계 최고 수준의 급여를 제공했으나, 강압적이고 경직된 조직 문화로 인한 직원 불만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 1996년, 정점에서 내리막으로

1996년의 영광이 바로 피크였다. 57개 매장, 5천억 원대의 예상 연간 매출은 세진컴퓨터랜드의 최고점이었다. 그 이후로는 하강의 궤적만 이어진다. 과도한 부채, 경영 체질의 한계, 그리고 시장 포화가 동시에 닥쳤다. 1995년 11월 20일, 대우통신이 세진컴퓨터랜드의 51% 지분을 인수하는 합의를 체결하였다. 이후 1997년 2월, 대우통신은 유통과 생산 부문을 분리하면서 유통부문을 완전히 인수하였다.
이는 세진의 몰락이 아닌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었다. 대우그룹의 경영난이 심화되면서 세진 역시 더 큰 파도에 휩쓸렸다. 1997년의 IMF 외환위기는 한국 산업 전반을 파괴했고, 세진컴퓨터랜드는 예외가 아니었다. 1998년 경영진 교체, 1999년 구조조정, 2000년 7월 주거래은행에 결제하지 못해 부도를 선고받았다. 같은 해 9월,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았고, 2009년 8월 13일 법인이 소멸되었다.
>> 컴퓨터 대중화를 이끈 영웅에서 경영 실패의 사례로
세진컴퓨터랜드의 쇠락은 단순한 한 기업의 실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1990년대 한국 IT 산업의 고도 성장기에서의 경영 마인드의 한계를 보여준다. 세진은 소비자 중심의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로 컴퓨터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평생 무상 수리, 정찰제, 무료 교육 같은 정책들은 당시 한국 컴퓨터 시장의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하지만 동시에 세진은 또 다른 교훈을 남겼다. 장기적인 재무 전략 없이 단기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위험성, 조직의 성장 속도를 경영 체질의 개선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때의 문제점, 그리고 외부 경제 위기에 취약한 높은 레버리지 구조의 위험성 말이다.
1990년대 초반 "동네 컴퓨터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소비자에게 신뢰를 얻었던 세진컴퓨터랜드는 2000년대 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 시대를 경험한 세대의 향수와, 경영학 교과서에 기록된 성공과 실패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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