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실험 없는 시대 열린다…유럽이 선두, 한국은 걸음마
“유럽과 북미·브라질·인도·중국까지 도입 속도
한국은 시작 단계… 소통과 동물실험 간소화 필요”
“유럽에서는 동물실험을 대체하는 시험법이 이미 여러 분야에 도입되고 있고, 향후 10년 안에 백신 품질 관리 단계에서 동물실험이 완전히 사라질 가능성이 큽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글로벌 바이오 콘퍼런스(GBC) 2024′에서 만난 국내외 동물대체시험법 전문가들은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대체시험법을 서둘러 도입하고 있다”며 “이 분야에서 걸음마 수준인 한국은 적극적으로 규제 기관과 기업이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니장기와 항체, 유전자 분석, 인공지능도 활용
동물실험은 신약 개발부터 단순한 실험까지 과학에서 빠질 수 없는 절차다. 신약이나 화장품이 사람에게 안전한지 확인하기 전에 동물에서 먼저 확인하는 과정이 필수이다. 동물실험에 사용되는 동물로는 생쥐(mouse)와 몸집이 큰 쥐(rat)·기니피그·토끼·개·원숭이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지난 5년 동안 국내에서 사용된 실험동물만 1461만 마리에 달한다.
실험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윤리적인 문제가 크지만, 사람과 실험동물의 생물학적 차이에 따른 실효성 문제도 있다. 비용 문제도 크다. 동물실험을 하려면 먼저 실험동물을 원하는 환경에 맞춰서 길러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벨기에의 국립공중보건연구소 ‘사이언사노(Sciensano)’의 막심 베르뮐렌 연구원은 “동물실험의 변동성이 높다 보니 정확도가 높은 데이터를 얻으려면 많은 수의 동물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적으로 동물실험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험법이 빠르게 도입되고 있다. 벨기에 사이언사노는 폴 스티킹스 영국 의약품규제청 연구원 연구진, 백신 제조업체 두 곳과 DTP(디프테리아, 파상풍, 백일해) 백신의 품질을 관리하는 단계에서 동물실험을 대체할 수 있는 다중 면역분석법(Multiplex Immunoassay)을 개발했다. 다중 면역분석법은 여러 표적 물질에 대한 특이적인 항체를 사용해 분석하는 방법이다.
베르뮐렌 사이언사노 연구원은 “다중 면역분석법으로 2개월 이상 걸리던 백신 품질 관리 시험 기간을 단 1~2일로 단축하고, 더 정확하고 신뢰성 있는 실험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며 “유럽의 두 백신 제조업체가 DTP 백신을 출시하는 과정에서 대체시험법을 검증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체시험법을 사용하면 백신 출시 속도를 높이고,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차세대염기서열분석법(NGS)이나 오가노이드(Organoid), 인공지능(AI)을 대체시험법에 적용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NGS는 DNA 가닥을 하나씩 빠르게 분석해 유전자 단위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 미니 장기를 뜻하는 오가노이드는 인간 세포로 만든 장기 유사체로 약물에 대한 인체 반응을 볼 수 있다. AI는 이미 시행된 동물실험 결과를 분석하거나, 약물의 독성 시험을 모의로 진행할 때 쓰인다. 프랑스 제약사인 사노피는 오가노이드와 AI 기반 시험법을 생체(In-vivo) 연구에 함께 적용하고 있다.
◇유럽·캐나다부터 브라질·인도·중국까지 도입
유럽은 현재 동물 대체시험법이 가장 빠르게 자리 잡고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유럽은 약전(의약품 품질과 안전성을 관리하는 기준서)에 동물실험을 줄이기 위한 세부 지침을 계속 개정하고 있다. 백신 개발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동물실험을 대체하는 방법이 점차 표준화되고 있다. 캐나다도 유럽을 따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노피는 2030년까지 동물실험의 50%를 대체시험으로 대체할 계획이다. 사노피의 에마누엘 코펜스 글로벌 분석 전문가는 “전임상 단계와 품질 관리 쪽에서는 동물실험을 대체할 방법이 없거나 규제 기관이 요구하는 경우에만 하고 있다”며 “2013년과 비교해 품질 관리 분야에서 동물실험을 약 70% 줄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는 중복되는 실험을 없앤 게 주효했다. 박경민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 이사는 “백신에서 부작용을 일으키는 독소가 중간 단계에서 제거된 것을 명확히 확인했다면 그다음 단계에서 또 독소 시험을 할 필요가 없다”며 “독소 시험에 쓰이는 동물실험의 횟수를 줄여나가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동물대체시험법 도입은 유럽, 북미에 이어 브라질과 인도, 중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라우라 비비아니 휴메인 소사이어티 규제 과학 고문은 “중국은 내년에 새로운 약전 개정안이 나올 예정인데, 대체시험법 도입에 관한 내용도 들어갈 거라고 본다”며 “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계속해서 동물대체시험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걸음마 수준…규제기관과 기업 ‘소통’ 필요해
세계 각국이 대체시험법을 도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를 중심으로 백신 안전성 시험에서 동물실험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 2022년 식약처는 생쥐나 기니피그를 사용하는 동물실험인 이상독성부정시험을 법적 규제 시험에서 제외했다. 생물학적 제제가 오염됐는지 살피는 이상독성부정시험을 하지 않아도 제품 안전성을 관리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최근 5년간 국내 동물실험에 사용된 실험동물이 1500만 마리에 달한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 주요 국가 중에서 한국은 아직 대체시험법 도입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빠른 대체 시험 도입을 위해서는 규제 당국과 기업 간의 협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동물대체시험법 도입 분야에서 선두에 있는 유럽은 공식의약품통제연구소(OMCL)라는 국제적인 협력 체계를 만들어 기술 상용화를 촉진하고 있다.
서보라미 한국휴메인소사이어티인터내셔널 정책국장은 “한국에서도 점점 대체시험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중요한 부분은 식약처와 같은 규제 기관이 제조사와 협력하는 것”이라며 “동물대체시험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규제기관과 연구기관, 기업 등 이해관계자 간 소통을 원활히 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민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 이사는 “한국 정부도 동물대체시험법 도입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 다양한 규제 수정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해외 사례를 감안해 안전성과 효율성이 확보된 수입 의약품의 중복적인 시험을 간소화하면 의약품의 원활한 공급과 환자의 접근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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