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황량한 것들이 무기력에서 나를 건지다 [낭만야영 쿵스레덴]
입추立秋가 지났음에도 폭염이 계속됐다. 퇴근 후 배낭을 쌌다. 배낭 안에 기본 장비를 채우고, 남은 공간에 반소매와 긴소매, 얇은 패딩까지 사계절 옷으로 채웠다. 스웨덴 아웃도어 브랜드 피엘라벤 본사에서 주최하는 트레킹을 위한 준비였다. 스웨덴 북부의 기온은 15℃ 전후였다. 행사가 진행되는 쿵스레덴은 '왕의 길'이라는 뜻이다. 북쪽의 아비스코에서 남쪽의 헤마반Hemavan까지 약 467km에 걸친 트레일이다. 이 중 피엘라벤 클래식은 아비스코~니칼루옥타의 약 110km 구간을 5박6일 동안 걷는다. 20년 전 스웨덴을 시작으로 한국, 독일, 미국, 덴마크, 영국 그리고 올해 처음 오픈하는 칠레 파타고니아까지 총 7개국에서 매년 공통 글로벌 이벤트가 개최된다. 스웨덴 클래식 탄생 20주년 기념으로 여길 걸어보기로 했다.
스톡홀름에서 다시 키루나로 비행했다. 좁은 공항 안은 백패커들로 북적였다. 대기하고 있던 셔틀버스를 타고 베이스캠프인 캠프 리판Camp Ripan으로 이동했다. 전 세계 백패커들이 모여든 캠프 리판은 백패커들의 천국이었다. 스태프들의 안내로 체크인 후, 식량과 가스를 챙겨 캠핑장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한국인 참가자들은 캐빈을 예약했지만, 나는 '뼛속까지 백패커라서 캠핑장을 고집했다'라는 건 핑계고, 게으른 탓에 캐빈 예약에 실패했다. 덕분에 반 강제로 끌려온 조창호 오빠도 덩달아 6박7일 동안 노숙을 하게 됐다.
Day1. 순록 버거VS보트
니칼루옥타Nikkaluokta → 케브네카이세Kebnekaise 15.5km → 야영지 4km 추가 이동(6시간)
과연 왕의 길은 어떤 곳일까? 30분쯤 걸었을까? 비는 그쳤지만 풍경도 없이 지루한 자작나무 오솔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바람은 없고 더웠다. 입고 있던 쉘 재킷과 오버 트라우저를 벗었다. 스틱을 지렛대처럼 뒤로 밀며 뛰다시피 걸었다. 빨리 이 덥고 지루한 길을 벗어나고 싶었다. 장대 높이뛰기 하듯 물웅덩이도 뛰어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래식을 준비하며 알게 된 동생 하승민, 정선희 커플과 마주쳤다. 그들은 함께 온 팀이 있어 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다행히 더 이상 비는 오지 않았다. 6km쯤 지나자 광장이 나타났다. 그 유명한 순록버거를 파는 곳이었다. 순록 패티를 굽는 매대 앞에는 백패커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물을 보충하고 쉬고 있던 나는 뒤이어 도착한 승민 팀이 줄을 선 것을 보자 호기심에 합류했다. 잠시 후 호수를 둘러보던 창호 오빠가 나를 불렀다. 저쪽에서 보트가 오고 있다며 계획에도 없던 보트를 타고 가자는 것이었다. 순록버거냐? 보트냐? 순록버거를 포기하고 지루한 길을 4km 단축하는 쪽을 선택했다.
보트가 로켓처럼 출발했다. 호수를 가르며 시원하게 내달렸다. 걸으면서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풍경들이 내 몸을 통과했다. 호수에서 좁은 물길로 들어서자 보트는 지그재그로 커브를 돌며 시원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신이 난 승객들이 박수를 쳤다. 보트를 선택한 건 신의 한 수였다. 4km를 단축한 덕분에 체크포인트인 케브네카이세에 빨리 도착했다. 물이 있는 멋진 야영지가 나올 때까지 더 걷기로 했다. 가는 길 중간 어디에나 텐트가 있었다. 통제는 없었다. 원하는 곳 어디든 멈추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바람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오빠 어디까지 가실 거예요?"
"저 산에서 내려오는 하얀 물줄기 보이지? 저 물줄기 상류 쪽으로 가면 산 배경에 깨끗한 물도 얻을 수 있을 거야. 가보자!"
트레일에서 500m 정도 벗어났지만, 하얗게 갈라져 흐르는 빙하수가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블루베리가 많아졌다. 그렇게 첫날은 멋진 산자락의 고즈넉한 곳에 자리 잡았다.
Day2. 야영지 → 싱기Singi → 샐카Salka 22.7km → 야영지 4.5km 추가 이동(9시간)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질퍽거리는 습지에 물이 고이면서 땅을 고르며 걷는 백패커들이 정체되기 시작했다. 창호 오빠는 거침없이 물속을 걸었다. 나도 잠긴 돌 중 가장 큰 돌을 골라가며 밟고 건넜다. 방수가 안 되는 신발을 신은 이들은 건너 뛸 만한 곳을 찾느라 분주했다. 수중전이었다. 둘째날은 이동 거리가 길어 속도를 냈다. 또 승민 팀을 만났다. 맨 뒤로 두 명, 또 가다가 두 명, 또 한참을 가다가 바위에 몸을 피해 쉬고 있는 승민과 선희를 만났다. 케브네카이세에서 야영하고 오전 7시에 출발했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빗속을 걸어 춥고 지쳤을 텐데 활기가 넘쳐났다.
나도 느린 걸음이 아닌데, 오빠 걸음에 맞추다 보니 오버페이스로 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오버 트라우저의 밑단 벨크로가 풀린 줄도 모르고 무아지경으로 물을 건너다 오른쪽 발뒤꿈치로 물이 새어 들어왔다. 발바닥이 스멀스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걸음이 부자연스러워지는 걸 느꼈다. 너덜길과 푹푹 빠지는 습지를 장시간 걷다 보니 피로가 쌓였다. 앞뒤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지쳐가고 있나 보다. 나처럼.
싱기에서 체크인을 하고 샌드위치와 주스를 받았다. 생각해 보니 우리의 첫 끼였다. 날씨가 좋아지니 나도 컨디션이 돌아왔다. 샐카까지는 무리 없이 도착했다. 광활한 캠프사이트는 벌써 텐트가 많이 채워져 있었다. 차디찬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체크인을 하고 맘에 드는 야영지가 나올 때까지 걸었다. 이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한 시간여를 더 걸으니 호수가 나왔다. 그 주변으로도 꽤 많은 텐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날 쉐크티아Tjaktja 패스를 넘기 위해 거리를 단축시킨 듯하다.
발에 커다란 물집이 생겼다!
Day3. 야영지 → 알레스아우레Alesjaure 24km → 야영지 2.4km 추가 이동(8시간30분)
쉐크티아 패스는 최고점이 1,140m로 야영지에서 370m 고도를 올린다. 경사가 완만해 힘들 건 없었다. 스멀스멀 젖어 든 양말 때문에 발 앞꿈치에 커다란 물집이 잡혔다. 무아지경으로 달리느라 피고름이 맺혔다. 응급처치를 했지만, 오른발을 디딜 때마다 통증이 심했다. 하지만 걷다 보면 곧 무감각해질 것이다. 늘 그랬듯이.
멀리서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패스를 향해 직진했다. 지그재그의 맨땅보다는 폭신해서 오르기 수월했다. 뒤돌아보니 몇몇이 뒤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자연훼손이라며 질타를 받겠지만, 스웨덴은 국립공원만 아니라면 상관없다. 멀리 물줄기를 따라 장대한 길이 보였다. 이 멋진 길을 걷고 있다니! 아침에 터뜨린 물집이 훈장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훈장은 패스 반대편을 넘어 하산길에는 족쇄처럼 내 발을 조여 왔다. '에라! 모르겠다.' 이를 악다물고 내달리는데, 어라? 쿵스레덴에 갑자기 웬 황철봉인가? 너덜바위가 나타났다. 발을 헛디뎌 삐끗할까 봐 몸을 사렸다. 윽 으 윽… 발 디딜 때마다 신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다행히 평지로 내려오니 널빤지가 깔려 있었다. 마침내 알레스아우레 체크포인트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내 발이 아니었다. 체크인 후 오빠에게 보트를 타자고 했다.
"다 안 걸어도 괜찮겠어?"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도 일주일 걷다가 탈출한 사람이에요. 백두대간도 100대명산도 하다가 그만뒀고. 피엘라벤 클래식도 이벤트가 궁금해서 온 거고. 원래 완주 이런 거 욕심 없어요. 고산 등정이라면 모를까? 하하"
피엘라벤 클래식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오면서 들러 보고 올라가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물론 감탄사가 터져 나올 만큼 멋진 트레일이긴 하지만, 가도가도 똑같은 풍경에 지치는 것이다. 우리는 운 좋게 마지막 배에 올라탔다. 첫날처럼 이벤트는 없었지만 5km를 단축시켰다는 게 기쁠 따름이었다. 보트에 함께 탔던 이들 모두 야영지를 찾아 출발했다. 하나 둘 자리를 잡으며 작별인사를 했지만, 오빠는 말없이 앞장서 갈 뿐이었다. 나는 지치고 힘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못 걷게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싶었다. 한 시간쯤 더 걷고 나서야 자리가 정해졌다. 블루베리가 풍부한 연립주택 같은 자리였다. 앞에는 멋진 산과 호수가 펼쳐져 있고, 층층으로 텐트가 두 동 씩 세워져 있었다. 이번 트레킹 중 최고의 장소였다. 오빠를 처리하는 건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훗!
짐을 벗자 '찐풍경' 보여
Day4. 야영지 → 아비스코아우레Abiskojaure 12km(4시간30분)
파란 하늘. 눈부신 햇살. 에메랄드빛 호수. 신비롭게 드리워진 구름. 아침 풍경은 3일간의 고생을 보상해 주듯 환상적이었다. 자유여행이었다면 하루를 더 머물렀겠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길 위에 올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오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발뒤꿈치 통증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나 둘 다른 이들을 지나 보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오빠의 모습이 보였다. 내 배낭을 들어주러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짐이 된다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산에서의 도움에 고맙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냉큼 배낭을 오빠에게 건넸다. 몸이 가벼워지니 확실히 짓누르던 발의 통증도 없어졌다. 악천후 때문에 놓쳤던 쿵스레덴의 찐풍경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흩뿌리는 국지성 호우는 무지개를 선물했다. 아무리 걸어도 닿지 않는 무지개는 쿵스레덴이 얼마나 광활한지 보여 주었다.
키에론Keron 체크 포인트에 도착했다. 자유롭게 야영할 수 있는 마지막 포인트였다. 다음 체크포인트인 아비스코아우레부터는 국립공원에 속하기 때문에 지정된 야영지에서만 야영할 수 있었다. 다음날 여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아비스코아우레까지 내려갔다. 야영장은 협소했지만,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속 완주
Day5. 아비스코아우레 → 아비스코 파이널 포인트 14km(4시간)
마지막 날이다. 북부는 여전히 날씨가 좋았다. 여전히 밤도 없었다. 하얀 밤을 보내고 느지막이 사이트를 정리했다. 야영장을 나서자 승민 커플과 마주쳤다. 키에론에서 야영하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결국 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진 듯했다. 아비스코에서 만나기로 하고 먼저 출발했다. 발바닥 통증은 식사 때만 되면 찾아오는 허기처럼 익숙해졌다. 아비스코에 가까워질수록 나란히 걷는 하이커들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마주 오는 이들은 기꺼이 축하인사를 건네주었다. 파이널 체크 포인트에 들어섰을 때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적군을 물리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애프터 파티 분위기가 한껏 고조될 무렵 승민을 만났다. 선희도 발 상태가 좋지 않아 좀 늦었지만 무사히 완주한 것이다. 함께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축하해 주었다.
피엘라벤 클래식 공식 일정이 끝나는 날이다. 스톡홀름으로 떠나기 위해 광장으로 나갔는데, 승민과 헤어졌던 팀원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안전하게 완주한 것이다. 길이 지루하다고, 날씨가 좋지 않다고, 발바닥이 아프다고 타박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했다.
물론 사람마다 길을 걷는 의미와 방법은 다르다. 혹자는 본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완주를 염원하고, 혹자는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우기 위해 아름다운 트레일을 찾으며, 혹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왕의 길'은 매너리즘에 빠진 백패커 민미정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었다.
10월에는 피엘라벤 클래식 코리아가 제주에서 열린다. 이번에는 참가자가 아닌 스태프로서 참여하게 된다. 나는 세계 각국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품고 참여하는 개성 있는 하이커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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