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엘팬알백] ⑩1983년 MBC 청룡의 KS 진출과 자중지란 준우승

『120여 일간의 험난한 여정을 거쳐 이제 최고 영좌를 눈앞에 둔 해태 타이거즈와 MBC 청룡. 과연 누가 올 시즌 최후의 그라운드를 장식할 것인가. 문자 그대로 용호상박(龍虎相搏) 격이 된 이번 코리안시리즈는 15일 광주서 1차전을 치른 후 16일부터 잠실구장으로 옮겨 6연전을 벌이게 된다.』 <1983년 10월 13일자 매일경제>
위 기사에서 보듯 1983년의 한국시리즈는 용과 호랑이의 만남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당시 각 언론마다 ‘용호상박’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0번째 주제는 서울팀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준우승에 그친 1983년 이야기다. 청룡이 가장 높이 날아올랐던 해였지만, ‘용의 눈물’로 귀결된 청룡의 마지막 한국시리즈이기도 했다.

◆재일교포와 국가대표 선수 가세…격변의 1983년
한국시리즈에 앞서 KBO 출범 이듬해인 1983년의 리그 상황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제도적으로나 선수구성으로나 큰 변화를 맞이한 격변의 해였기 때문이다.
우선 페넌트레이스 경기수 증가다. 원년에 비해 전·후기리그가 10경기씩 늘어나 총 100경기 체제로 확대됐다. KBO 역사상 처음으로 팀당 세 자리수 경기를 소화하는 리그에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또한 해태 타이거즈는 국가대표 사령탑 출신의 김응룡을, 삼미 슈퍼스타즈는 ‘인천야구의 대부’ 김진영을 새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사령탑 지형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1982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27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위해 강제로 프로 진출이 유보돼 있던 국가대표 선수들이 각 구단에 대거 가세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당초 1985년부터 도입하려고 했던 재일교포 선수 제도를 2년 앞당기기로 하면서 1983시즌 판도에 큰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당시 6개 구단 중 1982년 상위팀을 제외하고 하위팀인 해태 타이거즈(4위), 롯데 자이언츠(5위), 삼미 슈퍼스타즈(6위)는 재일교포를 영입할 수 있는 혜택을 줬다.
원년에 0.188의 승률로 압도적 꼴찌를 한 삼미는 기존 선수 15명에 새로운 전력 16명을 영입하면서 돌풍을 예고했다. 국가대표 출신 투수 임호균과 포수 김진우 배터리를 받아들였고, OB가 양보해준 국가대표 내야수 정구선과 이선웅의 가세도 눈에 띄는 전력보강이었다. 무엇보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에이스급으로 활약하던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와 유격수 이영구의 입단은 삼미를 더 이상 만만하게 볼 수 없는 팀으로 변모시켰다.
1982년 4위에 그쳤던 해태도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과 사이드암 투수 주동식을 영입하면서 전력을 업그레이드했다.

롯데는 불세출의 에이스 최동원을 비롯해 포수 심재원과 한문연, 내야수 박영태, 외야수 유두열 등 국가대표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재일교포를 영입하지 않았지만 전년도에 비해 뎁스의 깊이를 더했다.
삼성은 최고의 투타 김시진과 장효조가 가세하는 상황이었고, 원년 우승팀 OB는 국가대표 한대화와 함께 동국대 동기 투수인 장호연, 외야수 박종훈 등을 뽑으면서 2연패에 도전장을 던졌다.

◆이해창 김정수 오영일에 이원국까지…MBC의 전력 변화
[엘팬알백] ⑨편에서 설명했듯이, MBC 청룡도 역시 국가대표 출신의 새로운 전력들이 대거 눈에 띄었다.
1982년 시즌 막판 3경기를 남겨놓고 유니폼을 입은 김재박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것은 물론 국내 최고의 주력과 방망이 솜씨를 갖춘 국가대표 주장 이해창도 MBC 청룡 입단 계약을 완료했다.
고려대 4학년 외야수 김정수(신일고 출신)와 인하대 장신 우완투수 오영일(배명고 출신)도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멤버들이었다.

MBC가 기대하는 선수는 따로 있었다. 멕시칸리그에서 뛰고 있던 이원국이었다. 중앙고 시절 불같은 강속구를 뿌리면서 1966년 일본프로야구 팀 도쿄 오리온스 유니폼을 입었다. 4년 전 백인천이 한국 고교 선수 최초로 일본프로야구에 스카우트됐다면, 이원국은 한국 고교 투수 중 최초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는 역사를 쓴 주인공이었다.
2년 후에는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미국 무대에 진출했고, 1972년부터는 트리플A급으로 평가받는 멕시칸리그에서 전설적인 활약을 펼쳐온 투수였다. 특히 1981년에는 멕시칸리그 MVP를 차지했던 터. MBC는 그를 극비리에 접촉한 뒤 계약금 5000만 원, 연봉 3000만 원 외에 멕시칸리그 팀에 이적료 1500만 원, 이사비용 2000만 원, 승리보너스 1500만 원 등 총 1억3000만 원을 투자했다.
미국 더블A까지 뛰다 전년도에 들어온 OB 박철순이 계약금 2000만 원, 연봉 2400만 원 특급대우를 받았는데 이와 비교해 보면 이원국이 어느 정도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백인천 감독의 이탈과 ‘빨간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 영입
1983년 전기리그 출발부터 좋지 않았다. 4월 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OB 베어스와 개막전에서 상대 루키 선발투수 장호연의 완봉투에 막히면서 0-7로 패했다.
4월 한 달 동안 9승10패로 치고 나가지 못했다. 그 사이 충격적인 일은 따로 있었다. 백인천 감독 겸 선수가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MBC 구단과 백인천의 불협화음은 사실 1982년 시즌 후 연봉협상 때부터 시작됐다. 감독으로 3년, 선수로 1년 계약을 한 백인천 감독은 4할 타율을 올리며 맹활약했다. 이듬해에도 다시 감독뿐만 아니라 선수로 뛰기 위해서는 큰 폭의 연봉 인상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구단은 팀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백인천은 결국 자유계약선수로 풀린 뒤 다른 구단과 입단 협상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12월 중순에 재입단 형식으로 MBC 유니폼을 다시 입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MBC는 4월 23일과 24일 광주에서 해태에 연속 패하면서 4연패에 빠졌다. 팀은 롯데전을 치르기 위해 부산으로 이동했지만 백인천은 서울 집으로 올라왔다. 공식 발표로는 건강상의 이유. 휴가 형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급기야 감독 계약금의 3분의 2를 반납하고 6월 30일 선수 자격으로 삼미로 전격 트레이드됐다.

유백만 감독대행과 한동화 감독대행 체제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전기리그를 치러온 MBC는 결국 6월 9일 ‘빨간장갑의 마술사’로 유명한 김동엽 감독을 영입하기에 이르렀다.
김동엽은 1982년 해태 초대 감독을 맡은 뒤 13경기 만에 성적부진으로 경질됐지만, MBC로서는 어수선한 팀 분위기를 장악하고 수습하는 데 적임자로 판단했다. 실업야구와 대학야구에서 우승을 시킨 커리어에 MBC 라디오 프로그램 ‘홈런 출발, 김동엽입니다’를 오랫동안 진행하는 등 MBC 측과 깊은 관계를 이어왔기에 자연스럽게 MBC 지휘봉을 잡게 됐다.
전기리그 우승은 새 사랑탑을 영입한 해태와 삼미의 각축전. 결국 김응용 감독이 이끈 해태가 ‘너구리’ 장명부의 삼미를 추월하면서 우승을 차지해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먼저 따냈다.
MBC는 김동엽 감독이 전기리그 막판 5경기를 지휘하면서 4승1패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전기리그 최종 성적은 25승1무24패로 3위.
전기리그가 종료된 뒤 6월 27일에 구단 역사상 최초의 트레이드가 이뤄졌다. 김재박 입단으로 주전 유격수에서 물러난 정영기를 롯데에 내주고 포수 차동열을 영입했다.
팀을 재정비한 MBC는 7월 9일 시작된 후기리그에서 5할 승률 안팎을 기록하면서 해태와 삼미의 선두싸움을 뒤에서 바라보며 레이스를 펼쳤다. 8월 중순까지 장명부를 보유한 삼미가 7할 승률을 올리고 있어 후기리그 우승 도전이 쉽지 않은 흐름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MBC가 8월 28일 대전 OB전부터 9월 10일 인천 삼미전까지 10경기에서 7승1무2패 호성적을 올린 것. 이와 맞물려 선두로 치고 나가던 삼미는 갑자기 11경기에서 2승9패의 수렁에 빠졌다. 후기리그 우승은 막판까지 MBC, 삼미, 해태의 삼파전으로 전개됐다.

MBC는 8월 26일 부산 롯데전에서 최동원의 완봉투에 밀려 0-4로 패했지만 잔여 4경기를 남겨두고 후기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해태가 삼미 장명부의 30승 제물이 되며 0-5로 진 덕분이었다. MBC의 후기리그 최종 성적은 30승1무19패(승률 0.612).
이로써 MBC는 서울 연고팀으로는 사상 처음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하는 역사를 썼다. OB 베어스가 198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우승했지만 당시엔 대전(충청)이 연고지였다.

◆보너스 문제 자중지란 & 버마 아웅산 폭발 사건
『전기 1위 해태와 후기 1위인 MBC 청룡의 패권 다툼…. 나는 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해태의 창단 감독을 맡아 실업야구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빨간 장갑의 마력을 다시 한번 발휘하리라던 나의 의욕은, 불과 스무 게임도 지휘하지 못한 채 목이달아는 것으로 꺾여야 했다. 그로부터 1년 반 만에 내 웅지를 꺾은 해태를 상대로 프로야구의 우승 감독이 될 기회를 이제 맞게 되다니….』
고 김동엽 감독이 1995년 펴낸 자서전 <그래, 짤라라 짤라>에 나오는 1983년 한국시리즈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달리 MBC 청룡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내분에 휩싸였다. 원인은 김동엽 감독이 호기롭게 약속한 우승 보너스. 김 감독도 자서전에서 밝혔지만 이는 역대 한국시리즈 승부를 가른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김동엽 감독이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시즌 도중 “우승만 하면 1인당 500만 원의 보너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이해창 선수가 김동엽 감독을 살살 꼬드긴 거죠. 건국대 시절부터 감독과 선수로 사제지간이었거든요. 김동엽 감독님이 불같은 성격을 자랑했지만 사실 이해창한테는 꼼짝을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김동엽 감독님이 ‘우승만 하면 1인당 500만 원을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겁니다. 당시 500만 원이면 잠실야구장 인근 15평짜리 작은 아파트 정도는 살 수 있는 큰 돈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후기리그 우승을 하면서 일이 터진 거죠.”
독립구단 연천 미라클 김인식 감독의 이야기다. 그는 1953년생으로 이해창과 동기다.
9월 26일 부산에서 후기리그 우승 확정 후 축하연이 펼쳐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증 단장이 선수단을 향해 노고를 치하했다.
“선수 여러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이러쿵 저러쿵, 저러쿵 이러쿵….
선수들이 듣고 싶은 내용은 따로 있었지만 끝까지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한마디로 ‘보너스’의 ‘보’자도 나오지 않았던 것. 행사가 끝난 뒤 선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MBC는 10월 3일 후기리그를 마친 뒤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합숙훈련에 돌입했다. 결국 몇몇 고참 선수들이 김 감독에게 다가와 우승 보너스 약속 문제를 꺼냈다. 다음은 김동엽의 자서전 <그래, 짤라라 짤라>에 나오는 대화 내용이다.
걱정하지 마라. 곧 나올 거다. 신경쓰지 말고 훈련이나 열심히 하자.”
“그래도 해태는 1억 원이나 준다고 약속했다는데요.”
“야, 이놈들아. 1억 원쯤은 우리도 받을 수 있어. 우승만 하면 돼.”
얼마 후 선수단에 봉투가 지급됐다. 거기에는 1인당 100만 원이 들어있었다. 선수들은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며 흥분했고, 이를 모두 구단에 반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제가 주장이었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일단 큰 게임이 남아 있으니 훈련에 집중하자’면서 달랬어요. 그런데도 수습이 안 되더라고요. 당시 선수들이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건국대 야구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거든요. 야간에는 실내에서 배트만 가지고 가서 스윙 훈련을 했고요. 그런데 낮이나 밤이나 선수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온통 보너스 얘기만 하면서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어요.”
현재 대한유소년야구연맹 경기감독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종도는 1983년 우승 보너스 이야기를 꺼내면서 “당시 MBC 청룡 전력이 꽤 괜찮았는데 한국시리즈를 하기도 전에 팀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원래 시즌에 앞서 발표된 KBO 일정대로라면 한국시리즈는 10월 1일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우천 순연 경기가 많이 발생하면서 MBC 청룡도 10월 3일 대구 삼성전을 끝으로 후기리그를 마쳐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그해 전국체전이 10월에 광주에서 열렸다. 결국 한국시리즈 1차전 일정을 10월 12일 광주 무등야구장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조정했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0월 9일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이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겨냥해 폭탄 테러를 벌인 것으로 부총리와 장관을 비롯한 수행원과 취재진 등 총 17명이 목숨을 잃고 14명이 다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정부는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15일 또는 17일에 국민장을 거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한국시리즈를 비롯한 모든 체육행사도 20일 이후로 미뤄졌다. 온 나라가 애도하는 분위기인데 축제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13일로 국민장이 앞당겨지면서 한국시리즈도 15일부터 치러지게 됐다.
MBC로서는 후기리그 우승의 여세를 몰아 바로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편이 좋았을 터. 하지만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오히려 우승 보너스 문제만 더 부각됐고, 팀은 내홍에 휩싸였다.
김동엽 감독이 구단에 들어가 보너스 지급 문제를 꺼냈지만, MBC 이증 단장은 "지금 온 나라가 이런 분위기에서 돈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지 않느냐"며 "선수들에게는 열심히 뛴 만큼 회사가 알아서 해 줄 거라고 잘 타일러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실 MBC는 공영방송이어서 일반 대기업처럼 돈을 펑펑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83년 시즌을 앞두고 모든 팀이 처음으로 해외 스프링캠프를 갔지만 MBC와 삼미만 국내에서 전지훈련을 치렀을 정도였다.

◆ ‘용호상박(龍虎相搏)…전력은 MBC 우세로 점쳐졌지만
용과 호랑이가 만난 한국시리즈. 전력상 ’백중세‘라는 평가 속에 MBC 청룡의 우세를 점치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우선 마운드에서는 MBC가 고른 투수력과 다양성 측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해태는 그해 20승 투수 이상윤(20승10패, 6세이브, 2.67)을 필두로 김용남(13승10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83)과 주동식(7승7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3.14) 등 똘똘한 3명이 사실상 한국시리즈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MBC는 기대했던 해외파 투수 이원국(8경기, 1승1패, 평균자책점 4.42)이 어깨 부상 등의 여파로 시즌 내내 실망스러운 투구를 했지만, 활용할 수 있는 카드는 많았다.
그해 에이스 하기룡(10승11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2.34)은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했고, 잠수함투수 이길환(15승7패, 4세이브, 평균자책점 2.51)은 승률왕(0.682)에 올랐다. 여기에 신인 오영일(10승9패, 4세이브, 2.91)은 요즘 같으면 신인왕이 되고도 충분한 성적이었다.
좌완 유종겸은 8승7패, 평균자책점 2.40, 사이드암 이광권도 7승7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3.72로 쏠쏠하게 활약했다.
2루수 김인식~유격수 김재박~3루수 이광은으로 짜여진 내야진의 수비력 역시 해태에 비해 우세하다는 전문가들이 많았다.
1차전만 전기리그 우승팀 홈구장인 광주에서 하고, 2차전 이후 모든 경기는 잠실구장에서 치러지는 일정도 MBC 쪽에 유리한 부분이었다.
팀 도루는 2년 연속 도루왕 김일권을 보유한 해태가 130개로 1위, 김재박과 이해창이 가세한 MBC가 128개로 2위에 올랐을 정도로 막상막하였다.
팀홈런에서는 해태가 78개로 2위, MBC가 46개로 최하위였다는 점에서 일발장타력에서는 해태가 분명 앞서 있었다. 하지만 원년 홈런왕 김봉연이 올스타 브레이크 때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점이 변수였다.

◆한국시리즈 1승도 못하고 1무4패…승천하지 못한 ‘용의 눈물’

다음은 1983년 1차전 선발 라인업이다. MBC 청룡부터 LG 트윈스로 이어지는 구단 역사에서 최초의 한국시리즈 게임이기에 이 라인업의 의미는 크다.

‘김씨 타이거즈’로 불린 해태는 이날도 김 씨들이 선발 라인업에 대거 포함됐다. 1번 김일권부터 7번 김준환까지 9명 중 7명이 김 씨였다.
해태 선발투수는 그해 최고 투수인 이상윤이 예상대로 등판했지만, MBC 선발투수는 예상과 달랐다. 베테랑 에이스 하기룡 대신 루키 오영일이 나섰다.
‘용호상박’이라는 긴장감은 시작부터 깨졌다. 1회말 해태가 3점을 선취하며 승기를 잡았다. 김일권의 중전안타와 김일환의 사구로 만들어진 무사 1·2루. 3번타자 김성한의 타구는 부러진 배트와 함께 3루수 이광은 쪽으로 날아갔다. 이광은이 배트를 피하려다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무사 만루.
여기서 오영일은 4번타자 김봉연을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어 김종모에게 2타점 2루타와 김무종에게 1루 땅볼을 허용하면서 3점을 내주고 말았다.
김동엽 감독이 경기 도중 “배트 쪼가리가 날아들었어도 수비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며 간판스타 이광은을 질타해 벤치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해졌다.
2회말 1실점, 4회말 2실점, 5회말 1실점…. 스코어는 7-0으로 벌어졌다. 어찌된 일인지 김동엽 감독은 오영일을 교체하지 않았다.
MBC 타선은 이상윤의 구위에 눌린 것인지, 분위기에 눌린 것인지 5회까지 1안타에 그치며 무기력했다.
정적인 깬 것은 6회초 ‘악바리’ 김인식의 투런홈런. 당시 KBO 최단신으로 1983년 시즌 내내 홈런 1개밖에 없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귀한 홈런을 날렸다. 8회초 2사 만루에서 이종도가 2타점 적시타를 날려 7-4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초반 대량실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상윤은 9이닝 동안 139구를 던지며 4실점 완투승을 올렸고, 오영일은 8이닝 동안 7실점(6자책점)으로 완투패를 기록했다.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보너스 문제로 팀 분위기가 뒤숭숭했는데 1차전에, 그것도 초반부터 대량실점을 하니까 우리 팀 선수들이 급속도로 무너졌던 것 같아요.”
아직도 그날의 패배가 아픈 것일까. 이종도는 당시 분위기를 회상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2차전부터 MBC 홈구장 잠실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해태 팬들이 관중석 절반을 차지하며 ‘목포의 눈물’ 노래를 뜨겁게 불러 어떤 팀의 홈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2차전 선발투수로 해태는 재일교포 잠수함투수 주동식을, MBC는 좌완 유종겸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번에도 선취점은 해태의 몫이었다. 3회초 8번타자 서정환의 좌전안타와 차영화의 볼넷, 김일권의 삼진으로 만들어진 1사 1·2루. 해태 김응용 감독은 2번타자인 좌타자 김일환 대신 우타자 양승호를 대타로 내보냈다. 2타점 좌중월 2루타가 터졌다.
MBC는 4회말 1점을 추격했다. 이날 2번타자로 올라선 이광은이 좌전안타로 포문을 열고, 4번타자 송영운의 우전안타로 1사 1·2루 찬스를 잡았다. 여기서 주장 이종도의 중전 적시타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때 해태 김응용 감독은 한 박자 빨리 움직였다. 투수를 우완 김용남으로 교체했다. MBC 신언호의 3루수 앞 병살타가 나오면서 추가점이 무산됐다.
해태는 돌아선 5회초 안타 하나 없이 볼넷 2개와 3루수 이광은의 송구실책, 내야땅볼, 희생플라이로 추가 2득점하면서 4-1로 달아났다.
7회초에는 김응용 감독이 무사 1·2루서 4번타자 김봉연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했다. 이어 김종모의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5-1로 점수 차를 벌렸다.
MBC는 1사 만루서 신인 김정수의 2타점 좌월 2루타와 대타 김바위의 2루수 앞 땅볼로 5-4까지 따라붙었다.
해태가 8회초 2루타만 4방을 날리며 3점을 추가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김동엽 감독은 이날도 투수교체 없이 유종겸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2차전도 해태의 8-4 승리.
투수 숫자가 양적으로 적었던 해태는 2차전에 김용남까지 투입하며 2연승을 거둔 반면, MBC는 하기룡 이길환 이광권 등을 벤치에 남겨두면서 2경기 동안 2명의 투수로만 싸우다 2연패를 당했다.


잠실구장에서 3차전이 열렸지만 해태의 홈경기로 치러져 MBC가 선공을 펼쳤다. 선발투수로 MBC는 사이드암 이광권을 내세운 반면 해태는 2차전 선발투수 주동식 카드를 또 꺼내들었다.
1회말 선두타자 김일권의 중전안타와 김일환의 희생번트, 김성한의 삼진으로 만들어진 2사 2루에서 김봉연의 3루수 쪽 강습타구가 날아들었다. 타구가 베이스 귀퉁이를 맞고 가라앉아 좌측 파울라인 펜스까지 흘러나갔다. 1타점 2루타. 이상하리만치 시리즈 내내 3루수 이광은 앞에서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3회말 무사 1·2루 상황이 되자 MBC 김동엽 감독은 투수를 하기룡으로 바꿨다. 이번 시리즈 들어 처음으로 단행한 투수교체. 그런데 여기서 김봉연이 초구를 통타해 좌월 3점홈런으로 연결했다. 4-0.
MBC는 5회까지 주동식에게 1안타로 끌려가다 6회초 연속 볼넷으로 1사 1·2루 찬스를 잡았다. 그러자 해태 김응용 감독은 곧바로 1차전 완투승을 거둔 이상윤을 투입했다. 이틀밖에 쉬지 못한 이상윤이 흔들렸다. 2번타자 송영운의 볼넷으로 1사 만루. 3번타자 김재박의 2타점 우월 2루타와 해태 유격수 서정환의 실책이 이어지면서 스코어는 4-3, 1점차로 좁혀졌다.
결국 해태가 7회말 김봉연의 내야땅볼로 추가점을 뽑으면서 5-3으로 이겼다. 하기룡은 등판하자마자 홈런을 맞은 것 외에는 무실점으로 끝까지 던졌지만 MBC는 3연패로 벼랑 끝에 몰렸다.


MBC 청룡 구단주인 이웅희 사장이 4차전이 열리기 전 숙소인 서울 타워호텔(현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로 김동엽 감독을 찾아왔다.
<그래, 짤라라 짤라>에 나오는 이웅희 사장과 김동엽 감독의 대화.
“자식들, 보너스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해태는 1억 원을 걸었다는군요.”
“아, 그래요? 우린 그럼 2억 원을 준다고 하세요.”
“늦었습니다, 이젠. 2억 원이 아니라 10억 원을 준다고 약속해도 뒤집긴 힘들지요. 한 번만 지면 끝인 걸요. 하여간 김일성이는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니까요.”
“네? 김일성이라니요.”
“아웅산 말입니다. 김일성이가 폭탄만 터뜨리지 않았어도….”

김동엽은 1938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1950년 12월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월남했다. 해태 김응용 감독은 1941년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1951년 1·4 후퇴 때 부산으로 월남했다. 이 한국시리즈는 그래서 실향민 감독간의 대결이기도 했다.
MBC는 이길환, 해태는 이상윤을 선발투수로 내보냈다. 4차전 선취점도 해태의 몫이었다. 2회초 무사 1·3루에서 김무종의 2루수 앞 병살타 때 뽑은 점수였다.
MBC 타자들은 전날 3차전 3.2이닝 동안 57구를 던지고 휴식도 없이 등판한 이상윤을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9회말 선두타자 송영운의 좌전안타가 나오자 김응용 감독은 김용남으로 교체했다. 김재박의 희생번트와 이해창의 유격수 땅볼, 이종도의 고의볼넷으로 만들어진 2사 1·3루. MBC 김동엽 감독은 신언호 타석에서 대타 김바위를 호출했다.
볼카운트 1-1에서 김바위는 3구째를 때렸다. 다소 빗맞은 타구는 우익수 앞에 뚝 떨어졌다. MBC는 9회말 2사에서 극적으로 기사회생했다. 그러나 양 팀은 연장 15회까지 무수한 찬스를 얻고도 추가점을 뽑지 못했다. 원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 이어 한국시리즈 사상 두 번째 15회 무승부가 만들어졌다.
해태는 이상윤 김용남이 각각 8이닝과 7이닝을 분담한 반면 MBC는 이길환(2.1이닝)에 이어 오영일(5이닝 무실점)과 하기룡(7.2이닝 무실점)이 이어던졌다. MBC 청룡 시대의 한국시리즈에서 유일하게 패하지 않은 경기였다는 점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MBC는 4차전에서 연장 15회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버텨봤지만 입장수익 8000만 원을 더 올려 준 것 외에 소득이 없었다.
5차전에서 MBC는 이원국 카드를 처음 꺼내들었다. 해태 선발투수는 주동식.
1회말 시작부터 어수선했다. 선두타자 김일권이 2루수 김인식의 송구 실책으로 살아나간 뒤 ‘대도’답게 2루를 훔쳤다. 이때 포수 김용운의 송구가 빠지면서 무사 3루가 됐고, 김일환의 유격수 땅볼로 해태는 5경기 모두 선취점을 뽑았다.
해태는 홀수 이닝만 되면 점수를 뽑는 퐁당퐁당 득점으로 5회까지 5-0으로 달아나며 승기를 잡았다.
MBC는 7회초 2사 1·2루에서 김용운의 중전 적시타로 영패를 모면하는 점수를 얻었을 뿐이었다. 해태에게 7회말 3점을 추가로 내주면서 5차전마저 1-8로 패했다.
MBC 이원국은 4.2이닝 4실점(3자책점)으로 패전투수가 됐고, 오영일이 나머지 4이닝을 4실점으로 마무리했다. 이날 경기는 이원국의 KBO리그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
해태 김응용 감독은 주동식(6.2이닝 1실점)에 이어 이상윤을 구원으로 투입시켜 2.1이닝을 마무리했다. 한국시리즈 내내 이상윤, 김용남, 주동식 투수 3명만으로 운용하면서 첫 우승을 달성했다.
수술 자국을 숨기기 위해 콧수염을 기르고 나타난 김봉연은 한국시리즈 5경기에서 홈런 1방을 포함해 19타수 9안타(타율 0.473), 8타점을 기록해 기자단 투표에서 이상윤(4경기 1승2세이브)을 6표-4표로 제치고 MVP를 수상했다.
한국시리즈에만 올라가면 우승하는 해태의 신화는 이때부터 시작됐고, 김응용의 10회 우승 신화 역시 여기서 출발했다.

“만약 MBC가 보너스 문제로 자중지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한국시리즈 일정 연기가 없었다면 또 어땠을까, 1983년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허허.”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지만, 이종도는 지금 생각해도 허무하게 패퇴한 1983년 가을야구가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선수로서 유일하게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거니까.
아무튼 1982년부터 1989년까지 8년간 KBO리그에 존재했던 MBC 청룡은 1983년 그해 서울팀 최초로 한국시리즈 진출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 이후 다시는 청룡의 이름으로 한국시리즈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MBC 김동엽 감독은 지휘봉을 잡자마자 후기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끌었지만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다.
MBC 구단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이끈 어우홍 감독을 제3대 사령탑으로 선임한다.
[엘팬알백] ⑪편에서 계속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