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원 시장 두고 벌이는 재벌 후계자들의 ‘햄버거 전쟁’
일각에서는 “후계자들 길 터주려 손쉬운 사업 진출” 지적도
(시사저널=김경수 기자)
국내 햄버거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패스트푸드 대표 주자로 꼽히는 맥도날드·버거킹·맘스터치 등 프랜차이즈 햄버거 기업은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해외 유명 햄버거 브랜드의 경우 굴지의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유치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재벌 3세들의 美 3대 햄버거 대리전
2016년 미국의 3대 프리미엄 버거 브랜드 중 하나인 '쉐이크쉑(쉑쉑)'을 국내에 선보인 SPC그룹 3세 허희수 부사장과 '파이브가이즈' 유치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현재 프리미엄 버거 시장 선점을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남은 브랜드는 '인앤아웃 버거'인데, 이미 다수의 기업이 유치 경쟁에 뛰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과정에서 재벌 3세의 승계구도 또한 급물살을 타고 있다. '햄버거 사업=승계'라는 공식이 성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우려도 나온다. 국내 재벌들이 해외에서 이미 검증된 사업을 국내로 들여와 재벌 3세의 승계에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영 전문가들은 "경영능력 검증 절차를 생략한 대기업의 승계 방식은 한국 경제에도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국내 외식업계는 코로나 팬데믹과 글로벌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햄버거 업계의 분위기는 달랐다. 나날이 성장을 거듭했다. '프리미엄'을 앞세운 햄버거가 외식업계의 틈새시장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특히 미국 유명 3대 프리미엄 햄버거의 인기가 높았다. 이들 브랜드는 패스트푸드, 정크푸드의 대명사로 불리는 기존 프랜차이즈 햄버거의 이미지를 지워버렸다. 가격대는 높지만, 건강하고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 집중해 시장을 공략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햄버거 시장은 2015년 2조3038억원에서 2018년 2조8000억원, 2020년 2조9636억원으로 5년 만에 28.6% 성장했다. 2020년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성장세가 가팔라졌다. 언택트(비대면) 문화 확산과 배달의 일상화로 시장 규모가 3조9875억원으로 확대됐다. 불과 2년 만에 74%나 성장한 것이다. 올해는 시장 규모가 5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재벌 3세들은 왜 햄버거 시장에 집착할까
국내에서는 SPC그룹이 가장 먼저 프리미엄 버거 시장에 뛰어들었다. 허영인 회장의 차남인 허희수 부사장이 쉑쉑 유치를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허 부사장은 2016년 7월 강남에 첫 매장을 오픈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햄버거를 맛보기 위해 줄을 서는, 당시로서는 아주 생소한 진풍경이 연출됐다. 오픈 초기 하루 평균 판매량은 3500개가량이었고, 입점 1년 만에 글로벌 쉑쉑 매장 가운데 매출 1위를 달성했다. 연평균 매출 신장률은 20%대를 기록했다.
이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SPC그룹은 강남역을 시작으로 코엑스, 청담, 용산, 신림역 등 젊은 층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매장을 오픈하면서 성장세를 이어갔다. 햄버거 시장 규모가 커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시장 수요 확대에 대한 기대도 상승했다. 시장 진출을 희망하는 대기업 간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다. '총성 없는 프리미엄 버거 전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프리미엄 버거 전쟁의 2막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3남인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이 최근 파이브가이즈를 국내에 도입하면서 시작됐다. 파이브가이즈 역시 쉑쉑, 인앤아웃과 함께 미국 3대 햄버거 브랜드로 꼽힌다. 김 부사장은 지난 6월 강남에 1호점을 냈다. 오픈 일주일 만에 햄버거 1만5000개를 판매하는 매출고를 올렸다. 지난달에는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에 2호점을 오픈했다. 2호점 역시 오픈 후 3일간 일평균 고객 수 2000명을 기록하는 실적을 냈다. 1호점과 맞먹는 호성적을 거둔 것이다.
외식업 불황 속에서 미국 유명 햄버거 브랜드를 론칭한 매장이 큰 인기를 끌자 남은 '인앤아웃 버거'에 시선이 쏠렸다. 인앤아웃 버거는 지난 6월 서울 강남구에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개시는 오전 10시30분이지만, 오전 6시부터 고객들이 줄을 서는 '오픈런' 현상이 벌어졌고, 오픈과 동시에 준비된 500여 개의 햄버거가 완판됐다.
'한국에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대기업들은 '인앤아웃 버거 모시기'에 혈안이 됐다. 최근 롯데그룹 관계자들이 인앤아웃 버거 운영진과 만나 사업 관련 논의를 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물론 롯데그룹 측은 "당시 팝업스토어에서 만난 인앤아웃 측 관계자와 명함을 주고받고, 서로 인사만 나눴을 뿐"이라며 "브랜드 사업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해명했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국내 진출설에 대해 인앤아웃 버거 미국 본사 관계자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인앤아웃은 신선한 식품과 우수한 고객 서비스, 깨끗한 매장을 최우선 가치로 운영하고 있다. 힘들게 얻은 명성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모든 매장은 개인 소유이며, 가족이 운영하고 있다. 당사는 기존 방침에 따라 국외에 투자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재벌들의 '버거 사랑'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신세계그룹과 BHC그룹 또한 최근 햄버거 사업에서 방향성을 같이하고 있다. BHC가 운영하는 프리미엄 버거 '슈퍼두퍼'가 우선 눈에 띈다. 지난 8월 기준으로 대표 메뉴 4종의 판매량이 22만 개를 돌파했다. 지난해 11월 국내 첫 매장을 연 이후 9개월 만에 일궈낸 성과였다. BHC가 유치에 성공한 슈퍼두퍼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프리미엄 수제 햄버거 브랜드다. 강남점은 개점 2주 만에 버거 약 2만 개를 판매했다. 2호점인 홍대점에는 일주일 만에 약 1만 명이 방문하기도 했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도 2019년 신년사를 통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간'은 결국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라면서 '노브랜드' 버거를 론칭했고, 그해 8월 홍대에 1호점 문을 열었다. 정 부회장의 경우 가성비 전략을 통해 2800~6300원 사이의 경쟁사 대비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 안착했고, 올해 7월 기준 전국 매장은 200곳을 돌파했다.
재계에서는 재벌 후계자들의 잇단 프리미엄 수제 햄버거 시장 진출을 후계구도와 연결 지어 바라보고 있다. 쉑쉑을 성공적으로 국내에 안착시키고 고속 승진한 허희수 SPC 부사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2007년 파리크라상에 입사하면서 경영수업을 시작했고, SPC 계열사인 BR코리아의 총괄임원 상무와 전무를 거쳤다. 허 부사장은 쉐쉑을 성공적으로 안착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오너 3세로 승계를 위한 경영 일선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최근에는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전략본부장이 '전무'가 된 지 불과 1년 만에 '부사장'으로 파격 승진했다. 한화갤러리아뿐만 아니라 한화호텔앤드리조트, 한화로보틱스의 직급 또한 부사장으로 변경됐다. 이번 승진은 파이브가이즈 국내 론칭을 성공적으로 이끈 점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햄버거 사업은 곧 그룹 내 경영 일선에 나선다'는 꼬리표가 붙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화그룹 측은 "파이브가이즈 성과가 일부 영향을 끼쳤지만, 이외 다른 요소들도 함께 반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룹 관계자는 "파이브가이즈를 국내에 유치하는 과정에서 굉장한 어려움이 있었고, 사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과정에서도 큰 부담이 있었다"면서 "김 부사장이 이러한 과정을 진행하면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김 부사장은 한화갤러리아를 비롯해 3개 계열사에서도 업무를 맡고 있다. 파이브가이즈 성공적 론칭과 함께 맡고 있는 계열사 사업들이 고루 좋은 영향을 끼친 점이 승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능력 검증 없는 세습은 한국 경제에 위협"
하지만 재계 일각의 시각은 달랐다. 그룹 총수가 이미 검증된 사업을 통해 후계자들의 경영능력을 과시하고, 승계의 발판으로 삼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요컨대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 여파로 국내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기업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능력이 검증된 최고경영자를 발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국내 대다수 재벌은 3세 체제로 전환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순혈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일부는 장자 승계 원칙을 고수하면서 뒷말이 나오고 있다.
경영능력 검증도 소홀하다. 주요 그룹 후계자들이 그룹에 입사 후 임원으로 승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4년 남짓이다. 재벌 후계자의 상당수는 현장을 포함한 다양한 업무를 두루 섭렵해 풍부한 실무 경험을 쌓기보다는 본사 기획부서에서 일하다 바로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한다. 형식적인 경영수업, 경영능력 검증 시스템 부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기업의 모든 권한이 총수에게 집중된 1인 지배 체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엄격한 능력 검증을 거쳐 최고경영자를 선택하는 것과 비교된다. 실제로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제프리 이멜트 전 회장은 최고경영자(CEO)에 오르기까지 19년이 걸렸다. 최고경영자가 되기 직전엔 4년간 회장 자리를 놓고 다른 후보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경영 전문가들은 "최고경영자 후보를 능력 검증 없이 총수 자녀들로 한정하는 후진적 승계 풍토는 이제 없어져야 한다"면서 "재벌 경영 세습의 허점은 해당 기업은 물론, 한국 경제에도 큰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국내 재벌 대부분은 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경영을 승계한다는 점에서 중세 봉건왕조의 왕위 계승과 흡사하다. 이사회는 형식상 최고 의사결정기구일 뿐, 실제로는 총수의 결정을 추인하는 거수기 역할에 불과하다"며 "초고속 승진이더라도 경영수업 과정이 충실하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 교수는 "재벌 경영 세습의 허점이 해당 기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경제에도 큰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면서 "100년 기업이 되고 싶다면 글로벌 경제위기에 따른 경영환경 변화에 발맞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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