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84 분황사 설화

강시일 기자 2026. 3. 2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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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이 창건해 자장율사, 원효대사가 주석하며 신라 대중불교의 산실이 되었던 분황사, 대천수대비가 등의 설화가 줄줄이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위치한 보물 분황사 당간지주. 강시일 기자

분황사는 선덕여왕이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로 손꼽히며 불교 중흥에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자장율사가 처음 주석하고, 다음 원효대사가 주석하면서 100여 종에 240여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원효가 신라 대중불교를 이끌어 낸 중심사찰이었다.

특히 분황사는 왕실 중심으로 호국불교의 진산으로 전하는 황룡사와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일반 백성들에게 종교적인 안식처가 되었던 대중불교의 중심사찰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구별된다.

분황사가 신라 불교의 중심축으로 기능하기도 했던 만큼 많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광덕과 엄장이라는 청년들의 성불기, 도천수대비가로 전하는 희명 모자의 기도, 원성왕의 업적을 노래한 변룡어정, 원효의 소상이 설총의 뒷모습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는 이야기도 사실처럼 전하고 있다. 이러한 설화들을 뒷받침하는 유적들은 사라지고, 훼손되기도 했지만 우물, 모전석탑, 국사비부 등의 형태로 일부가 남아있다.
당나라 사신이 신라 호국용을 잡아갔다는 말을 듣고 원성왕이 쫓아가 찾아와 우물에 넣어주었더니 용이 되어 들어갔다는 분황사 돌우물.

◆신화전설 1: 광덕과 엄장

신라 문무왕시대에 분황사 인근 마을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청년들이 두터운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다. 한 명은 서쪽 마을에서 신발을 꿰매며 가난하게 살던 광덕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남쪽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엄장이라는 청년이었다.

두 사람은 비록 신분은 낮았으나 불심만큼은 누구보다 깊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친구는 "누구든 먼저 극락세계에 가는 자는 남은 이에게 소식을 전해주자"고 굳게 약속하고 수도에 정진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엄장의 꿈에 "나 광덕은 이제 서방정토로 가네. 그대도 부디 정진하여 뒤따라오게나"라며 친구가 화려한 구름을 타고 손을 흔들며 서쪽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엄장이 급히 광덕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광덕은 단정히 앉은 채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고려시대에 원효대사를 국사로 추증했다는 내용을 담은 비석을 세웠던 화쟁국사비부.

광덕이 떠난 후 엄장은 홀로 남은 광덕의 아내와 함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내심 광덕의 아내에게 연민을 느껴 그녀와 함께 살기를 청했다. 광덕의 아내는 거부하지 않고 엄장의 집으로 따라와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밤이 깊어 엄장이 그녀와 가까이하려 하자 여인은 단호히 거부하며 훈계했다. "광덕님은 십수 년을 저와 한 이불 아래 지냈으나 단 한 번도 몸을 섞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가부좌를 틀고 오직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르며 보문의 법계를 관하셨지요. 그러니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대는 탐욕을 먼저 부리며 염불을 게을리하시니 어느 세월에 성불을 하시겠습니까?"라며 심하게 다그쳤다. 부끄러움에 휩싸인 엄장은 즉시 분황사로 달려가 원효대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원효는 그에게 정관법을 일러주며 참회할 길을 열어주었다.

엄장은 그날부터 분황사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 뼈를 깎는 수행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엄장 역시 눈부신 빛에 휩싸여 서방정토로 향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분황사를 찾는 수많은 중생에게 진정한 수행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전설이 돼 전하고 있다.
분황사 동쪽에 최근 발굴에서 조화로운 연못과 건물터가 드러난 구황동 원지.

◆신화전설 2: 천 개의 눈

경덕왕 시대에 서라벌 한기리에 '희명'이라는 눈 먼 아이와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희명은 처음에는 생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면서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시각장애인이 되어버렸다. 아이만 바라보며 살아가던 여인은 희망을 잃고 울음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으로부터 그 어머니는 분황사 천수관음에 기도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난한 과부였던 희명의 어머니는 앞을보지 못해 허공을 휘젓는 아들의 손을 잡고 분황사 북쪽 벽화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천수관음보살'이 그려져 있었다. 천 개의 손바닥마다 눈이 달려 있어 세상 모든 중생의 고통을 살핀다는 보살이었다.

희명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얘야 이 보살님은 눈이 천 개나 되신단다. 그중 하나만 네게 달라고 노래를 부르며 빌어보아라"고 말하고, 그날부터 아침부터 해가 지도록 부처님 앞을 떠나지 않고 아이와 함께 엎드려 기도했다.
선덕여왕이 창건해 자장율사와 원효대사 등이 주석했던 분황사의 일주문.

모자의 기도가 백일이 되던 날. 벽화 속 관음보살의 눈에서 은은한 금빛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법당을 가득 채우던 그 빛이 아이의 감긴 눈꺼풀에 닿는 순간 아이가 번쩍 눈을 떴다. "어머니! 밝아요! 세상이 보여요!"라고 외치며 다시 관음보살을 향해 백팔배를 올렸다.

희명 모자는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분황사를 찾아와 참배하며 감사의 나날을 보내며 행복하게 살았다. 희명 모자가 간절히 원했던 소원은 어느 새 중생들의 마음에도 새겨져 노래를 불렀다.

"무릎을 굽히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천 개의 눈 중 하나만이라도 몰래 내어주소서. 아아, 나에게 하나만 주신다면 그 자비 얼마나 크리이까.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천 개의 눈 중 하나만이라도 몰래 내어주소서. 아아, 나에게 하나만 주신다면......" 이 노래가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는 '도천수대비가' 향가이다.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분황사로 향하는 중생들의 발걸음도 천년을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효대사의 유적을 전시하고 있는 분황사 원효각.

◆신화전설 3: 원효의 소상

원효대사가 칠순의 나이로 혈사에서 입적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신라 전역은 슬픔에 잠겼다. 그의 아들이자 신라의 대학자였던 설총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설총은 아버지 원효대사의 유해를 정성스럽게 수습하여 고운 가루로 만든 뒤, 진흙과 함께 이겨 생전의 모습과 똑같은 소상을 빚었다. 설총은 아버지가 가장 오래 머물며 학문을 닦고 중생을 구제했던 분황사에 이 소상을 안치했다. 설총은 매일 분황사를 찾아 불상 옆에 계신 아버지의 소상 앞에 절을 올리며 자신의 학문적 고민과 그리움을 털어놓기도 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어느 날 설총이 절을 올리고 일어나려는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앞을 똑바로 응시하던 원효의 소상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절을 하고 일어서는 설총을 인자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마치 "오냐, 내 아들아. 네가 왔느냐"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듯하는 모습이었다.

설총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환영에 감사했다. 그날 이후 설총이 학문이 막히거나, 궁금한 일이 있을 때 분황사를 찾아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주위를 탑돌이하듯 돌았다. 그럴때면 의례 소상은 아들 설총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돌려 바라보곤 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원효대사의 영험한 힘에 의지해 기도하는 발길이 몰려들었다. 이 설화는 시대를 뛰어넘는 부자간의 정과 성인의 법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후학들은 원효성사라 부르며 추종하고 있다.
분황사의 종각.

◆신화전설 4: 변룡어정(變龍魚井)

분황사 마당 가운데 팔각형 모양의 돌우물이 하나 있다. 겉보기엔 평범한 우물이지만 이곳에는 신라의 국운을 지키는 호국룡(護國龍)이 살고 있었다.

신라 원성왕 시절이었다. 신라의 기운이 성하다는 소문을 들은 당나라 사신 일행이 서라벌을 방문했다. 그들의 목적은 신라의 수호신들을 제압하여 국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원성왕이 즉위한지 11년째인 을해년(795)이었다. 당나라 사신이 서라벌에 왔다가 보름을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 다음 하루는 두 여자가 궁 안에 들어와 왕에게 "저희들은 동지와 청지에 있는 두 용의 마누라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 둘을 데려와서 우리 남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의 용 등 세 용에게 주문을 걸어 작은 물고기로 바꾼 다음 통에 넣고 돌아갔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을 붙잡아 주소서. 우리 남편들은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입니다"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왕은 곧 그렇게 하마하고 하양관까지 쫓아갔다. 왕은 손수 잔치를 베풀면서 하서국 두 사람에게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 용 세 마리를 잡아 여기까지 이르렀느냐? 만약 사실대로 이르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야"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당나라 사신들은 호국룡을 물고기로 변환시켜 담은 호로병을 건네면서 잘못을 빌었다. 왕이 돌아와 용들이 살던 세 곳에 각각 풀어주니 용들은 물살을 한길 남짓 튀기면서 기뻐하며 우물로 들어갔다.

이후 용들의 기운으로 서라벌에는 가뭄이 들지 않고, 풍년이 이어졌다. 당나라 사신들은 왕의 명석함에 탄복하고, 돌아가 황제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려 감히 엿보지 못했다.

분황사의 우물은 물고기로 변했던 용이 사는 곳이라 하여 지금도 '변룡어정'이라 부르며 문화유산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분황사 입구에 원효대사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는 안내문.

◆신화전설의 터

1천400여년 전에 신라 대중불교의 가람으로 자리매김한 분황사 터에는 여전히 다양한 흔적이 남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분황사 모전석탑을 3층으로 복원했다. 기록에 의하면 9층이었다. 지금 분황사 담장 너머에 석탑에 활용되었던 벽돌들이 가득 쌓여 있어 9층이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한다.

모전석탑과 약사여래불이 있는 보광전 사이에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는 돌우물이 있다. 경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전설을 담고 있는 변룡어정이다. 또 최근 발굴을 통해 규모가 드러나고 있는 구황동 원지가 분황사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왕실에서 이용했던 유적이라는 설과 분황사 유구라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분황사와 연접해 있고, 분황사 또한 선덕여왕이 설립한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라고 본다면 원지 또한 분황사와 관련된 시설일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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