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추락하는 타구
지난 15일이다. 도쿄돔에서 평가전이 열렸다. 시카고 컵스와 한신 타이거스의 일전이다.
결과는 알려진 그대로다. 스코어 0-3, 한신의 승리였다. 컵스 타선은 무기력했다. 안타 3개로는 이길 수 없다.
이 게임에서 화제가 된 대목이 있다. 4회 초 시카고의 공격 때다. 일본인 타자 스즈키 세이야가 타석에 들어섰다. 카운트 2-1에서 4구째가 조금 높았다. 89.6마일(약 144.1㎞) 싱커가 가운데로 몰렸다.
‘왔다!’ 타자의 눈이 반짝 빛난다. 동시에 허리가 힘껏 돌았다. 완벽한 타이밍을 잡아낸다. 타구는 정확히 걸렸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뻗어 나간다. 날카롭고 하얀 직선이 도쿄돔을 절반으로 쪼갤 기세다.
순간 투수의 얼굴이 볼만하다. 몬베쓰 게이토는 ‘아차’ 하는 표정이 된다. 출구속도 111.7마일(약 180㎞), 발사각도 20도.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비행이다.
그런데 뜻밖이다. 타구는 중견수 머리 위에서 갑자기 출력을 잃는다. 그리고는 맥없이 추락한다. 별 기대도 없이 따라가던 치카모토 고지의 글러브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343피트(약 104.5m) 밖에 날지 못했다. (도쿄돔 가운데 담장 거리 122m.)
경기 후 이 장면에 시끄럽다. 온라인을 후끈 달군다. 특히 시카고 팬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뭐지? 분명히 홈런인데, 평범한 플라이볼이 됐다.’
‘돔 구장에도 맞바람이 부는 건가? 미스터리다.’
‘The Wrigley Wire’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컵스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곳이다. 여기서는 조금 더 감각적인 어휘를 구사한다. “미친 것 아냐? 어떻게 저렇게 되지”라는 어이없음이다.
‘날지 않는 공’ NPB 공인구
이 타구에는 비밀이 있다. 공인구의 문제다.
요즘 벌어지는 MLB와 NPB 사이의 평가전에는 공수 교대 때마다 공을 바꾼다. 다저스나 컵스의 수비 때는 MLB 공인구를 쓴다. 반대로 요미우리나 한신 차례가 되면 NPB 공을 사용한다. 아무래도 투수들의 감각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차이가 생긴다. ‘통일구’라고 부르는 일본 공인구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가장 뚜렷한 것은 반발력이다. 다른 리그에 비해 유독 떨어진다. 이날 스즈키 세이야의 타구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완벽한 타이밍에 걸려도, 거리가 많이 나지 않는다. 어느 지점부터 추진력을 잃고, 급격히 낙하한다.
일본 팬들은 이를 ‘날지 않는 공’이라고 칭한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반발계수가 0.41에 그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다. MLB의 0.55에 비해 75% 밖에 나오지 않는다. 단순 논리로 접근하면 100m는 가야 할 타구가 75m 밖에 날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일본 야구는 투수의 시대가 됐다. 평균자책점(ERA) 3점이 넘으면 명함도 못 내민다. (규정이닝 기준) 1점대가 양 리그 합해 6명이나 된다. 퍼펙트게임, 노히트노런, 완봉승이 자주 나오는 이유다.
반면 타자들을 기를 못 편다. 3할 타율은 가뭄에 콩이 날 정도다. 센트럴리그에 2명, 퍼시픽리그에는 1명만 넘겼다. 모두 3할 1푼대의 턱걸이 수준이다.
심지어 리그 평균 OPS가 0.620을 간신히 넘긴다. 1950년대 수준으로 후퇴한 숫자다. 공격력 실종, 소극적인 스몰볼…. 그러다 보니 흥행에 빨간 불이 켜지며, 위기론이 대두된다.
그럼에도 며칠 새 일본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리그 3위 팀 한신이 컵스와 다저스를 연파한 덕분이다. 모두 3-0으로 셧아웃 승리를 거뒀다. 신예 투수를 앞세워 빅리거들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다만,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물론 일본 투수들이 잘 던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ML 타자들이 날지 않은 공에 막힌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스즈키 세이야의 장타성 타구가 평범한 플라이볼이 된 것처럼 말이다.
1인치 더 긴 배트로 바꾼 오타니
이런 악명 높은 공인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공교롭게도 일본 출신이다. 바로 오타니 쇼헤이다.
그는 첫 경기부터(15일) 폭발했다. 요미우리 전 3회 초였다. 2-0으로 앞서던 무사 2루에서 맞은 타석이다. 초구 변화구에 반응했다. 도고 쇼세이의 변화구(124㎞ 커브 혹은 슬라이더)는 꽤 예리하게 떨어졌다. 보통이라면 당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다르다. 빼앗긴 타이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찰나의 멈춤으로 밸런스를 극복한다. 간결하게 따라붙으며 스윙을 완성시킨다.
순간 도쿄돔에는 4만 개의 함성이 터진다. 출구속도 169㎞, 비거리 120m의 타구는 우중간 담장을 훌쩍 넘었다. 4-0으로 승부가 결정 나는 장면이다. (최종 스코어 5-1)
피홈런 투수는 경기 후 이런 소감을 남겼다. “잘 들어갔다고 생각한 변화구였는데, 오타니가 잘 쳤다. 역시 대단한 파워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날지 않는 공’이 훨훨 날아간다. 그리고 외야석 중간에 꽂혔다. 비결이 뭘까. 물론 새삼스러운 얘기다. 이미 세계 최고 레벨의 공격력을 인정받은 MVP다. 홈런 50개도 넘기는 파워다. 반발계수 따위는 그 앞에서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추가할 요소가 있다. 바로 ‘무기’의 변화다.
그는 이번 캠프부터 새로운 배트를 쓴다. 길이가 35인치(88.9cm) 짜리다. 작년보다 1인치 늘었다. 2.54cm 길어진 셈이다.
따지면 겨우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생각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다.
멈추지 않는 진화
일단 마음가짐이 대단하다.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려는 자세다.
34인치로 홈런 50개를 쳤다. 50-50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기록도 수립했다. 덕분에 만장일치 MVP에도 올랐다. 더할 나위 없는 성적이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더 좋은 기록을 위해 새롭게 도전한다.
더 길고, 더 무거운 배트는 장점이 크다. 더 넓은 스트라이크 존을 커버할 수 있다. 그리고 타구를 더 멀리 보낼 수 있다.
반면 단점도 뚜렷하다. 그걸 제대로 휘둘러야 한다. 더 강한 근력과 순발력이 필요하다. 그걸 위해서는 더 많은 훈련을 해야 한다. 게다가 올해는 투수 복귀라는 과제도 있다. 무엇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말이 35인치다. 동양인에게는 버겁다. 훈련 중에나 가끔 들어보는 길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이 정도를 쓰는 타자는 별로 없다. 2m가 넘는 거구의 애런 저지 외에 손에 꼽는다. 팀 동료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도 고개를 젓는다. 한번 잡아보더니 “와, 이건 너무 긴데?”라며 화들짝 놀란다.
다저스의 애런 베츠 타격 코치의 설명이다.
“오타니(193cm)는 현재 34.5인치와 35인치 두 종류를 같이 쓰고 있다. 무게는 같다. 32온스(약 907그램) 짜리다.”
아마도 두 가지를 시험 중인 것 같다. 시즌이 시작되면 장착이 완료될 것이다. 아무튼 길이는 늘어나는 셈이다. 0.5인치냐, 1인치냐만 남았다.
이도류는 2023년부터 아이템을 교체했다. 일본제 배트를 쓰다가 접었다. 이후 업계의 후발주자인 미국산 챈들러 브랜드를 사용한다. 유명한 고객으로는 저지, 브라이스 하퍼, 카를로스 코레아, 크리스 브라이언트, 로날드 아쿠냐 주니어 등이 있다.
북미산 단풍나무로 만든 제품이다. 가장 단단한 재질로 꼽힌다. 제대로 맞으면 샷건 소리가 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반면 잘 부러지고, 빗맞으면 손에 울림이 심하다는 지적도 있다.)
아무튼.
악명 높은 일본 공인구다. 하지만 아랑곳 않는다. 가볍게 펜스를 넘겨버린다. 그건 가장 높은 레벨에 올라가서도 진화를 멈추지 않으려는 도전 정신이 만들어낸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