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의 숨은 명산 서룡산] 지리산 서북능선 특급 조망 품은 '3암자'
남원 서룡산西龍山(1,073m)은 알려지지 않은 불교 문화유산의 보고다. 세간에는 삼봉산(1,187m)이나 법화산(993m), 금대산(852m)을 가기 위한 길목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사실 서룡산에는 남원 실상사實相寺의 3암자인 '백장암, 서진암, 금강암'이 있다.
3암자 모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정진했던 고승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다. 스님들이 인월마을에서 백장암까지 마실 다녔던 '백장암 옛길'은 '3암자 순례길'로도 불린다. 백장암까지 2km 가까이 소나무가 울창하다. 6~7부 능선에 위치한 조붓한 길은 백장암을 지나 서진암 인근까지 이어진다.
독도법 필요한 3암자 가는 길
서룡산 산행은 흩어져 있는 3개의 암자를 하나씩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다. 3암자 순례길은 햇볕 한 점 없이 산행이 가능하다. 암자들이 자리 잡은 곳은 한결같이 지리산 서북능선과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 특급 조망이다.
CJ제일제당 남원공장(구 영우냉동) 입구의 대형주차장을 들머리로 잡으면 원점회귀가 가능하다. 해당 코스는 산행거리가 결코 짧지 않지만, 서룡산 정상부의 경사면을 제외하고는 크게 힘들지 않다. 무엇보다 3곳의 암자에서 식수를 보충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체력에 따라 백장암 옛길만 걷거나, 서진암에서 하산할 수도 있다. 다만, 주요 갈림길의 이정표는 명확하지 않아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선답자의 표지기와 더불어 산행 경로 GPX 파일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구룡관광호텔 담장에서부터 백장암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 솔잎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솔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푹신한 길이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실상사는 우리나라 선종禪宗의 뿌리다.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에 의해 9산선문 중 최초로 문을 연 곳이다. 이때 실상사의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도 함께 건립했다고 한다. 백장암은 암자보다는 큰 사찰에 가까울 정도로 전각이 많고, 역사도 깊다. 참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명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백장암의 이름은 선종의 기틀을 세운 당나라의 선승 '백장百丈스님'에서 유래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손에서 호미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는 의미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一日不食이라는 가르침이 유명하다.
백장암에는 국보 1점, 보물 2점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은 9세기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하는 이형석탑이다. 이형석탑이란, 기존의 석탑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천인상, 십이지신상 등 여러 상을 조각해 화려하게 장식한 석탑이다.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은 섬세한 연꽃무늬 조각이 돋보이는 문화재다. 삼층석탑과 나란히 있으며 동일한 시기에 세워졌다. 참고로, 보물 제140호인 '백장암 청동 은입사 향로'는 현재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백장암 벚나무 아래에서는 다반사가 이루어진다. 행선 스님은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차 한잔 하시죠"라며 선문답 같은 말과 더불어, 따뜻한 차와 미소도 함께 건넨다. 다선일미茶禪一味를 경험할 수 있는 셈이다.
서진암으로 가려면 백장암 종무소 뒤쪽으로 들어서면 된다. 작은 건물 벽면에 눈길을 사로잡는 글씨가 있다. '多弗留是다불유시'. 글자대로라면 '모든 부처가 이곳에 머문다'는 뜻이지만, 사실 화장실을 뜻하는 WC더블유시를 유쾌하게 사자성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백장암 선승들의 재치와 유연함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서진암으로 가는 길은 둘레길처럼 편안하다. 계곡 주변에는 산수국이 많다. 산길은 선명하지만, 갈림길에는 그 어떤 이정표도 없어, 길찾기에 유의해야 한다. 백장암에서 40분 정도 산행하면, 2년 전 산불로 인해 밑동이 그을린 소나무 군락이 있다. 계속 직진하면 매동마을이 나온다. 서룡산으로 가려면 직진이 아닌 왼쪽 능선으로 차고 올라야 한다. 10분 정도 오르면 이정표가 쓰러진 갈림길이 나온다. 서진암은 갈림길 오른쪽 250m 지점에 있다.
청화 스님은 없지만, 명당의 터는 그대로
서진암瑞眞庵은 세암世庵 또는 세진암世眞庵, 洗塵庵이라 했다. 나한 기도 도량으로 알려진 유서 깊은 암자다. 나한상 밑바닥에는 1516년에 경희라는 사람이 시주해서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보아 창건 연대는 훨씬 오래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당에는 석조로 조각한 나한상 5구가 봉안되어 있다. 나한羅漢은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만한 성자인 '나한'의 모습을 표현한 불교 조각이다.
서진암의 자랑은 암벽에서 흘러나오는 달고 깨끗한 석간수 반야샘이다. 서진암 감나무 아래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작은 평상이 있다. 이곳에선 삼정산을 비롯해 지리산 형제봉, 연하봉 등 높은 봉우리들이 그림처럼 보인다.
금강암金剛庵으로 가는 길은 마치 보물찾기하는 기분이다. 서진암 갈림길에서 소나무 조망대를 지나면 헬기장이 나오고, 3분만 더 가면 커다란 소나무가 쓰러져 있다. 여기서 금강암으로 가려면 산행 표지기가 많이 걸려 있는 왼쪽으로 꺾으면 된다. 약초꾼들이 다녔을 법한 좁고 희미한 길을 10분 정도 가야 한다. 주변에는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검은 호스들이 많다.
금강암은 해발 1,000m에 위치한 작은 토굴암자다. 하루 한 끼 공양(식사)하는 일종식과 40여 년을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로 유명한 청화靑華 스님이 기거했던 수행처다. 현재는 거주하는 이가 없어 폐사 상태지만, 조망만큼은 명당 중의 명당이다.
암자 앞 바위에 올라서면 정면으로 지리산 벽소령, 왼쪽으로는 천왕봉, 오른쪽으로 반야봉이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금강암에서 서룡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두 가지다. 바위 끝에서 개척산행 하듯 능선을 치고 오르는 길과 금강암 입구에서 계곡 따라 오르는 길이다. 두 코스 모두 10분이면 능선과 만난다.
서룡산 정상엔 아담한 정상석이 전부다. 잡목이 사방을 가려서 조망이 없다. 0.7km 거리에 조망 좋은 '투구봉(1,033m)'이 있다. 빠른 걸음으로 왕복 30분이면 다녀올 수 있다. 투구봉은 돌출된 암릉지대로, 인근에 산불감시철탑이 있다. 삼봉산을 비롯해 대봉산, 황석산 등 함양의 명산들이 줄줄이 보인다. 정면으로는 해발 1,000m 이상의 고봉들이 천왕봉을 호위하듯 쭉 늘어서 있다.
서룡산에서는 '범바위'를 놓치면 안 된다. 정상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범바위는 로프를 타고 오를 수 있다. 정면에 보이는 덕두봉과 바래봉을 비롯해 지리산 태극종주 길이 손바닥 지도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장엄하고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다. 백장봉 능선을 따르는 하산길은 경사가 완만하다. 고도를 천천히 내리기에 부담이 없다. 이정표의 '하우마을' 방향으로 따라가면 된다. 수청봉 삼각점을 지나면 살짝 급경사 내리막이 나온다. '영우냉동' 방향으로 5분이면 주차장에 닿는다.
산행길잡이
▶ CJ제일제당 입구 주차장 - 구룡관광호텔 옆 - 백장암 옛길 - 백장암 - 갈림길 - 서진암 - 갈림길 - 소나무 조망대 - 헬기장 - 금강암 - 서룡산 - 투구봉 - 서룡산 - 범바위 - 수청봉 - 주차장 (12.8km, 6시간)
교통(지역번호 063)
서울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인월 지리산공용터미널 가는 시외버스가 하루 9회(07:00, 08:20, 10:30, 13:20, 15:20, 17:30, 19:00, 23:00, 23:59) 운행한다. 요금 우등 3만 2,600원, 프리미엄 4만 2,400원, 3시간 30분 소요.
인월 지리산 공용터미널에서 서룡산 입구인 CJ제일제당 앞까지 불과 5분 거리다.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수월하다. 기본요금 3,300원,
문의
지리산 인월택시 010-3680-2088, 010-5636-5088.
먹거리(지역번호 063)
남원은 추어탕의 고장이다. 인월면의 '흥부골 남원추어탕(636-5686)'은 뒷맛이 맑은 진짜배기 추어탕으로 유명하다. 자체적으로 양식한 국내산 미꾸라지만 사용한다고 한다. 추어탕 1만2,000원, 흥부 정식(미꾸리 깻잎튀김 + 추어군만두 + 산양산삼 + 추어탕) 2만 원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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