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서 일하는 중년 여성에게 닥친 디지털 성범죄

조회수 2024. 4. 25.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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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정순> ⓒ (주)더쿱디스트리뷰션

[양기자의 영화영수증 #891] <정순> (Jeong-sun, 2024)

글 : 양미르 에디터

'정순'(김금순)은 지방의 한 견과류 생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하나뿐인 딸 '유진'(윤금선아)의 결혼을 앞두고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이 공장의 젊은 관리자 '도윤'(김최용준)은 윗선에서는 아부의 왕으로, 직원들 사이에서는 권력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정순'은 '도윤'에게 나름 소리를 낼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년 남성 '영수'(조현우)가 '정순'의 동료로 새롭게 출근한다.

'영수'는 공사장을 전전하며 살다가 무릎이 다친 이후 써준 곳 없어 배회하던 중 낯선 동네의 공장에 온 것이었고, 모텔을 임시 거처로 삼게 된다.

남편과는 일찍이 사별한 '정순'은 '영수'와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그사이 '영수'는 '정순'이 속옷만 입고 자신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게 된다.

'영수'는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도윤'에게 그 영상을 보여주고, '도윤'은 이를 공장 직원들에게 모두 뿌려버린다.

영상은 일파만파 퍼졌고, '정순'의 일상은 순식간에 파괴되고 만다.

'정순'은 경찰에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지만, 딸 '유진'은 자신이 다니고 있는 직장까지 엄마의 영상이 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결혼 준비도 미룬 채, '정순'을 대신해 경찰에 신고 및 고소를 진행하려 한다.

하지만 '영수'의 자필 사과문 한 장에 경찰은 합의를 제안하고, 이후 '정순'과 '유진'은 다른 길을 걷는다.

'정순'은 힘겨운 싸움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상처를 극복하는 것을 택하며 고소를 취하하지만, '유진'은 그런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유진'은 본인의 길을 걸어가려는 엄마를 보며 분노 대신 이해를 하고, 응원을 하게 된다.

<정순>은 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고, 17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 여우주연상(김금순)을 받은 정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정지혜 감독은 영화 속 '정순'과 마찬가지로 식품 공장에서 생산직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고.

정 감독은 "공장이라는 공간은 어느 면에서 보면 사람을 기계 부품 중 하나처럼 감각케 하는 곳"이라면서, "나의 근무지는 '정순'과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주 근로자였고, 그들과 12시간 가까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막연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정순> 시나리오의 큰 틀을 잡으며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작품을 연출하게 된 계기를 전했다.

같은 여성이지만, 다른 세대를 살아온 이들이 먼저 겪어낸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

<정순>은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한 편견을 가시화한 영화 <69세>(2019년), <갈매기>(2021년)와 비슷한 결을 가졌지만, 동시에 '정순'이 가해자, 동조자들이 보는 앞에서 '사이다'와 같은 행동을 취하는 점에 차별화를 보여준다.

언론 시사회 이후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정지혜 감독은 "<정순>은 피해 사실에만 집중하기보다 '정순'이라는 한 사람의 삶과 사랑, 그리고 또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이기도 하다"라면서, "이 영화가 공장에서는 이모로, 집에서는 엄마로 불리던 '정순'이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 담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정순'을 둘러싼 환경과 모든 인물을 최대한 보편적이고, 현실적으로 세세하게 그려내려고 했었다"라고 전했다.

참고로 <정순>의 촬영 콘셉트는 '사건'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계획했다고.

정지혜 감독은 사건 이전, 정순의 일상을 담아내는 장면들에서는 카메라가 인물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보는 방식으로 존재하길 바랐다.

사건 이후에는 핸드헬드로 카메라가 인물에 가깝게 다가가 함께 호흡하며 따라가는 방식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특히, 영화 중반 '정순'이 자신의 영상이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옥상 장면에서 퇴근길 장면으로 넘어갈 때 이러한 방식은 도드라진다.

옥상에서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무리의 낌새를 살며시 느끼기 때문에, 카메라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면 자신을 피하는 '영수'의 표정을 보며 '정순'은 명확한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카메라도 함께 '정순'과 호흡하며 흔들린다.

김금순 배우의 자유로운 동선을 존중하며 촬영하는 것으로 뜻을 모았기에, 리허설을 진행한 뒤, 콘티에 연연하지 않고 카메라가 유동적으로 배우에 맞춰 위치해 촬영을 진행했다고.

정지혜 감독은 "다르덴 형제 감독의 <내일을 위한 시간>(2014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처럼 보편적인 한 인물을 천천히, 또 성실하게 따라가고자 했다"라고 전했다.

또한, <정순>의 폐쇄적인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 조명에서 보조 라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키 라이트로만 장면을 세팅한 경우가 많았다고.

예를 들어, 실제 공장 작업장에서는 밝은 조명으로 실내 전체를 비추어야 하지만, 영화 속 공장 작업장에서는 라이트를 최대한 절제하여 사용해 공간에서 인물이 고립될 수 있도록 세팅했다.

한편, 영화 속에서 '정순'이 직접 부르는 노래 '지나가'는 1980년대 후반에 발표되었을 법한 음악 스타일에, 단순한 멜로디를 가진 트로트풍 발라드곡을 원한 정지혜 감독의 요청으로 황현태 음악감독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시련'을 대입하면 잊히지 않을 것 같던 인생의 시련도 어느새 희미해지고 그저 지나간 일이 될 수 있다는 노랫말로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지나가' 음악은 총 3번 나오는데,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지나간다는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듯하지만, 특히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정순'의 목소리에서는 모든 것이 다 지나가기에 또 다른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정순>은 앞서 언급한 여성 대상 성범죄 소재 영화들 속에서 차별화를 이뤄내는 데 성공했고, 이런 작품들이 서로의 색채를 가지면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연대 의식을 강조하는 영화가 됐다.

2024/04/04 CGV 용산아이파크몰

정순
감독
출연
최원욱,황현태,최혜리,정진혁,정지혜
평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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